사형대에 묶인 세 명의 청년들. 그러나 그들은 엄습해오는 죽음의 공포 때문에 추위조차 느끼지 못했다. 그중 가운데 있던 청년은 지극히 평범한 스물여덟의 문학도였다. 그가 정치범이 되어 사형대에 오른 것은, 반체제 성향의 비밀독서 클럽에 가입했기 때문이었다. 차르 치하 러시아. 반역의 대가는 혹독했다.
사형 집행을 앞두고 집행관은 죽음을 준비할 시간 단 5분만을 허락한다. 청년은 함께 묶인 두 명의 동료 사형수에게 인사하고 가족을 생각하며 지난 일들을 정리하는 데 2분을 쓰고,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을 되돌아보는 데에 2분을 쓰기로 했다. 그리고 남은 1분은 오늘 이 시간까지 발붙이고 살았던 대지와 자연을 둘러보는 데에 사용하기로 했다. 그는 인사를 시작했고, 2분은 금세 흘러가 버렸다. 마침내 삶을 정리하려던 그는 문득 3분 뒤 자신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과연 나는 어디로 가고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자 갑작스레 눈앞이 캄캄해지고 정신이 아찔했다. 매 순간을 아껴 쓰지 못했던 스물여덟 해가 뼈아프게 후회되었던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말 것을···. 다시 한 번만 생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순간순간을 정말 값지게 쓰련만!’ 청년은 지난 세월을 끝없이 한탄했다.
이윽고 탄환을 장전하는 소리가 들렸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다시 엄습했다. 바로 그때였다. 말발굽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차르의 특사였다. 사형을 중지시키고 대신 4년간의 강제노동과 군복무를 명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날은 마침 성탄절이었다. 운 좋게 사형장에서 목숨을 건진 이 청년의 이름은 도스토예프스키.
그러나 모스크바에서 3,300킬로미터나 떨어진 시베리아 옴스크에서의 유형생활은 사형의 공포 못지않게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고된 노동, 벼룩과 바퀴벌레가 들끓는 감방, 죄수들과 간수들로부터 가해지는 가학적 폭행…. 도스토예프스키의 체험은 실로 가공할 만했다. 1,500여명의 죄수들과 함께한 4년. 그 끔찍한 환경은 청년 도스토예프스키로 하여금 인간의 내면과 삶의 다양한 일면을 끊임없이 탐색하고 사색하게 만들었다.
“감방에 있는 동안 죄수들 중에서 인간들을 발견하게 됐어요. 죽음의 집이 나를 민중에게 데려다줬어요.”
유형생활을 하는 동안 도스토예프스키는 형에게 이런 내용을 담아 편지를 썼다. ‘죽음의 집의 기록’은 그 같은 당시의 생생한 체험을 기록한 작품이다.
고된 수형생활이 도스토예프스키가 위대한 명작을 낳을 수 있었던 창작의 원천이 된 것이다. 수형생활 이후 그는 놀라운 대작들을 연이어 발표한다. 모두 선과 악, 도덕과 양심 그리고 냉정한 현실을 놀라울 정도로 날카롭게 그려낸 작품들이었다. 삶의 진실과 인간의 내면을 꿰뚫어본 그의 작품은 1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연극, 영화 등 다양한 장르로 재창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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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프라 윈프리. 그녀는 미국 최초의 흑인 앵커이자, <보그지>의 패션모델이고,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이며, 자산이 15억 달러를 넘는 갑부이다. 무엇보다도 <오프라 윈프리 쇼>로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이 시대 진정한 커리어 우먼이다. 그러나 그녀의 과거는 온통 얼룩투성이다. 사생아, 가난, 미혼모 그리고 마약과 비만….
오프라 윈프리는 1954년에 미국 미시시피의 작은 시골마을에서 사생아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너무 가난하여 감자포대로 만든 옷을 입고 다닌다고 ‘감자포대 소녀’라는 놀림을 받았다고 한다.
9세였던 어린 나이에 사촌오빠에게 성폭행 당한 후 친척과 주변사람들에게 성적 학대를 받았다. 14세의 나이에는 임신을 하여 아이를 낳았지만 그 아이조차 2주 만에 세상을 떠났다. 20대 초반에는 마약을 하기도 했고, 100kg이 넘는 비만의 몸이 되기도 했다.
그녀의 과거는 그야말로 치명적인 약점투성이였다. 그러나 그녀의 현재는 어떤가. 시사 주간지 <타임>은 그녀를 20세기의 중요한 인물 중 하나로 선정했고, 1998년 <포춘>지는 미국 최고의 비즈니스 우먼 2위로 오프라 윈프리를 선정했다. 1997년 <월스트리트저널>에서 조사한 ‘미국인이 존경하는 인물’ 3위에 선정되기도 했다. 그것만이 아니다.
『오프라 윈프리는 아마도 정신적인 면에 있어서 교황을 제외하고는 어느 대학 총장이나 정치가, 종교적 지도자보다도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배니티 페어(Vanity Fair)>지의 기사 中
『영국인들이 군주를 투표로 뽑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옥좌에 올라서 왕관을 쓰시오, 오프라』
-<뉴스워크>의 한 칼럼니스트
한 여자에게, 아니 한 인간에게 쏟아지는 찬사가 이보다 더 찬란할 수 있을까. 그 여자가 바로 오프라다. 그녀는 이제 인기면 인기, 존경이면 존경 그리고 돈까지, 모든 것을 얻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늘날 오프라 윈프리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녀는 미국을 움직이는 또 하나의 힘이자 막강한 브랜드이다.
오프라의 약점투성이 과거는 현재의 그녀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그녀의 대단한 성공 비결은 과연 무엇일까?
오프라 윈프리의 삶을 오늘날 성공으로 이끈 것은 물론 <오프라 윈프리 쇼>이다. <오프라 윈프리 쇼>는 4,900만 명의 미국인이 시청하고 121개국에서 방영된다. 이 프로의 인기 비결은 다름 아닌 솔직함이다. 미국에는 ‘오프라 윈프리화’라는 신조어가 있다. ‘속마음이나 과거 철없는 행동을 만인에게 털어놓으려는 사람이 늘어나는 현상’을 뜻하는 표현이다.
자신의 쇼에 나오는 게스트들의 ‘고백 본능’을 자극하여 마음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그녀는 ‘국민 심리치료사’로도 불린다. 게스트들을 고백하도록 만드는 힘은 다름 아니라 그녀 자신의 고백이었다. 성, 이혼, 아동 학대 등의 문제에서 자신의 아픈 과거, 즉 사생아였으며 가난했고, 성폭행을 당했으며, 마약도 하고, 비만이었다는 사실들을 그녀는 진솔하게 고백했다. 그런 그녀의 용기에 게스트들은 동감했고, 시청자들은 감동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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