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몇년 전 제가 무신론자였을 때 "왜 하나님을 믿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았다면, 대략 이런 식의 대답을 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를 보세요. 그 대부분이 완전히 어두울 뿐 아니라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추운 빈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 공간과 비교할 때 그 안에서 움직이고 있는 천체들은 수도 너무 적을 뿐 아니라 크기도 너무 작아서, 설사 모든 천체가 완벽하게 행복한 생물들로 꽉 차 있다 해도 그런 생명과 행복이 우주를 만든 힘에게 일종의 부산물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고 보기는 여전히 어렵지요. 그런데 사실 과학자들은 우주의 태양들 중 극소수만이 - 어쩌면 우리가 보고 있는 태양만이 유이랗게 - 행성을 거느리고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 우리 태양계만 보더라도 지구 외의 다른 행성에는 생명체가 살고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더구나 지구도 수백만 년 간 생명체 없이 존재했고, 이 생명체들이 다 사라진 후에도 또 그렇게 수백만 년 이상 존재할 겁니다.
생명체가 있을 동안의 사정은 또 어떻습니까? 모든 형태의 생명체는 서로를 먹이로 삼아야만 살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하등한 형태의 생명체에게는 그저 죽음으로 이 과정이 끝나 버리지만 고등생물의 경우에는 의식이라는 새로운 특질이 나타나 고통을 느끼게 만들지요. 그 생물들은 고통을 일으키며 태어나, 고통을 가하며 살다가, 대부분 고통 속에 죽습니다.
가장 복잡한 형태의 생물이 인간에게는 이성이라는 또다른 특질이 나타나 자신의 고통을 예견하게 함으로써 실제 고통이 닥치기도 전에 예리한 정신적 고통을 먼저 겪게 할 뿐 아니라, 영원을 간절히 열망하면서도자신의 죽음을 내다보며 살 수밖에 없게 만들어 버립니다. 또 인간은 이성을 통해 교묘한 책략들을 많이 꾸며 냄으로써, 이성이 없었을 경우 다른 인간이나 이성이 없는 생물들에게 가했을 고통보다 훨씬 더 큰 고통을 가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성의 힘을 한껏 써먹었습니다. 그들의 역사는 대부분 범죄와 전쟁과 질병과 테러의 기록으로서, 그 사이사이 끼어 있는 행복이라고 해봐야 막상 행복을 누리고 있을 때에는 그것을 잃으면 어쩌나 노심초사하게 만들고, 행복을 잃고 난 후에는 쓰라라리고 비참한 심정으로 과거의 기억을 그리워하게 만드는 수준에 불과합니다.
가끔 상태가 나아지면 이른바 문명이라는 것이 등장하지요. 그러나 모든 문명은 사라지게 마련이고, 지속되는 동안에도 인간이 늘상 겪는 고통들을 덜어주는 측면보다는 그 문명이 고유하게 양산해 내는 고통을 가중시키는 측면이 더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문명 또한 그런 작용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그리고 이 문명 또한 이전의 문명들처럼 사라질 것이 분명하지요.
설령 사라지지 않는다 해도 뭐가 달라지겠습니까? 인류는 어차피 파멸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주 어느 곳에 생겨난 종족이라 해도 결국은 다 파멸하고 말 것입니다. 사람들의 말처럼 우주는 쇠락하고 있으며, 언젠가는 저온 상태에서 동형 동질의 무한지대가 되어버릴 겁니다. 그간의 사연들은 전부 무(無)로 돌아가 버릴 테고, 모든 생명이란 결국 무한한 물질이 그 천치 같은 얼굴을 별 뜻 없이 잠깐 찡그린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입증되겠지요.
당신이 이런 우주를 자비롭고 전능한 영의 작품으로 믿으라고 한다면, 저는 모든 증거가 오히려 정반대의 결론을 가리키고 있다고 대답하겠습니다. 즉 우주의 배후에는 어떤 영도 존재하지 않거나, 선과 악에 무관심한 영이 존재하거나, 악한 영이 존재하거나, 셋 중에 하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문제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이 비관론적 주장이 설득력 있고 유창한 만큼, 그 즉시 제기되는 문제가 있다는 것을 그 당시에는 전혀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만약 우주가 그토록 나쁜 곳이라면, 아니 제가 말한 바의 반만큼이라도 나쁜 곳이라면, 사람들은 어떻게 그처럼 나쁜 것을 지혜롭고 선량한 창조자가 만들어 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요? 인간들이 바보라서 그랬을 수도 있겠지만, 사실 아무리 바보라 해도 그 정도까지 어리석을 수는 없습니다 .검은 것에서 흰 것을, 악의 꽃에서 덕의 뿌리를, 무의미한 작품에서 무한히 지혜로운 장인을 곧바로 유추해 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인간들이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을 우주의 실제 모습을 종교의 근거로 삼았을 리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다른 출처를 통해 종교를 갖게 되었을 것이고, 우주의 실제 모습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그 종교를 견지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 pp 17~20
"하나님이 선하다면 자신이 만든 피조물들에게 완벽한 행복을 주고 싶어할 것이며, 하나님이 전능하다면 그 소원대로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피조물들은 행복하지 않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선하지 않은 존재이거나 능력이 없는 존재, 또는 선하지도 않고 능력도 없는 존재일 것이다." 이것은 고통의 문제를 가장 단순하게 표현한 말입니다. 여기에 대답할 수 있으려면 '선하다', '전능하다', '행복하다'는 말에 여러가지 뜻이 있다는 사실부터 밝혀 내야 합니다. 널리 알려진 뜻이 곧 가장 좋은 뜻이거나 유일한 뜻이라면, 이 논증에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 장에서는 '전능'의 개념에 대해, 그리고 다음 장에서는 '선함'의 개념에 대해 몇가지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전능(Omnipotence)이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고 말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과 논쟁하다 보면 "하나님이 존재하며 그가 선한 분이라면 왜 이러저러한 일들을 하시지 않느냐"는 말을 흔히 듣게 됩니다. 그래서 그런 식의 일들은 하나님이 하실 수 없다고 말하면, 즉시 "하나님은 못하시는 일이 없는 줄 알았는데"라는 응수가 돌아오지요. 여기에서 '불가능성'의 문제가 대두됩니다.
일상적으로 불가능하다(impossible)'라는 말에는 대개 '...하지 않는다면(unless)이라는 구절이 숨어 있습니다. 지금 제가 글을 쓰고 있는 이 방에서는 바깥에 있는 거리를 보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즉 제가 시야를 가리는 저 건물 너머를 볼 수 있을 정도로 높은 이 집 맨 위층으로 올라가지 않는다면 거기를 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만약 제 다리가 부러졌다면 "하지만 위층으로 올라가는 건 불가능한걸"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여기에는 '누군가 나를 안고 올라가 줄 사람이 나타나지 않는다면'이라는 뜻이 숨어 있습니다.
자, 이제 "어쨌든 내가 지금 이 자리에 그대로 있고 시야를 가로막는 건물들도 그대로 있는 한, 바깥 거리를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라는 말에 나타나는 바, 불가능성의 또다른 차원으로 나아가 봅시다. 어떤 사람은 여기에 "공간이나 시야의 본질이 지금과 달라지지 않는다면"이라는 말을 덧붙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인류 철학자들과 과학자들은 뭐라고 이야기할는지 모르겠지만, 저로서는 이 말에 대해 "공간과 시야의 본질이 당신이 말하는 식으로 달라지는 것이 가능한지 모르겠군요."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에서 가능한지라는 것은 분명히 우리가 앞서 살펴본 것처럼 상대적인 가능성 및 불가능성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어느 정도 절대적인 가능성이나 불가능성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새로운 의미에서 볼 때 '지금 이 자리에 앉은 채 시야를 가리는 저 건물을 우회하여 그 앞에 있는 거리를 본다는 것이 가능하냐 불가능하냐'에 대해 저는 말할 수가 없습니다. 이 말에 자기 모순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약 이 말에 자기 모순이 있다면, 이 자리에서 거리를 보는 것은 절대 불가능할 것입니다. 절대적 불가능성은 외부의 다른 불가능한 것들-에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 안에 원인이 있다는 점에서 내재적 불가능성이라고도 부를 수 있습니다. 이 경우에는 '...하지 않는다면'이라는 구절이 첨부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어떤 조건, 어떤 세계, 어떤 행위자에게도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행위자' 안에는 하나님도 포함됩니다.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는 것은 내재적으로 가능한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뜻이지, 내재적으로 불가능한 일도 하실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기적을 행하시는 분이지 말이 안되는 일을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이것은 그의 능력에 한계가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가령 "하나님은 피조물에게 자유의지를 줄 수 있는 분인 동시에 주지 않을 수도 있는 분이다"(God can give a creature free-will and at the same time withhold free-will from it)는 말은 하나님에 관해 어떤 내용도 전달해 주지 못합니다. 단어들을 무의미하게 조합해 놓고 그 앞에 'God can'이라는 말을 붙인다고 해서 없던 의미가 갑자기 생겨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께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말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내재적으로 불가능한 것은 '것'(things)이 아니라 '헛것'(nonentities)입니다. 상호 모순되는 일은 하나님이 만드신 가장 약한 피조물도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하나님도 하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장애물을 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보기에 말도 안되는 일은 하나님께도 똑같이 말도 안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성적인 사람들도 잘못된 데이터나 부주의한 논증으로 인해 종종 실수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실제로는 불가능한 일을 가능한 일로 생각할 수도 있고, 가능한 일을 불가능한 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전능으로도 할 수 없는, 내재적으로 불가능한 일들을 규정할 때 상당한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 pp 39~43
이 유비가 강조하는 진리는, 사랑은 본질상 그 연인을 완벽한 존재로 만들고자 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상대방이 고통을 당하지만 않는다면 무엇이든지 허용하려 드는 단순한 '친절'은 사랑과 상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을 때 그가 깨끗하든 더럽든 아름답든 추하든 신경쓰지 않게 됩니까? 오히려 그제서야 비로소 그런 점들에 신경을 쓰게 되지 않습니까? 남자가 자기 외모에 대해 아는 바도 없고 신경도 쓰지 않는 것을 사랑의 표시로 여길 여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야말로 사랑은 그 연인이 아름다움울 잃어도 사랑할 수 있지만, 아름다움을 잃었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랑은 모든 허물을 용서해 줄 수 있고 모든 허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랑할 수 있지만, 그 허물을 없애 주겠다는 결심을 접지는 않습니다. 사랑은 미움보다 더 예민하게 연인의 모든 흠을 감지합니다. 사랑의 "감각은 달팽이의 촉수보다 더 부드럽고 예민합니다." 사랑은 그 어떤 힘보다 더 허물을 용서하면서도 더 허물을 묵과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작은 것에 기뻐하면서도 모든 것을 요구합니다.
--- pp. 67~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