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ㆍ아귀ㆍ축생ㆍ아수라의 중생계보다 위 단계이고 천상세계 바로 아래 단계에 있는 이성을 가진 존재이다. 인간계는 노력에 따라 천상계에 태어나거나 반대로 아래 단계로 떨어질 수도 있는 위치에 있다. 다시 말하면 천상계에서 수행이 부족하여 인간계로 떨어지거나 아래 단계에서 천상계로 가기 위해 윤회해온 존재가 머무는 세계이다. 그러므로 인간 중에서 천상의 생활습성을 지닌 자들도 있고, 아귀ㆍ축생ㆍ아수라의 습성을 지니고 있는 자도 있다. 이것은 인간 심성에 천상의 습성과 인간 이하 중생계의 습성을 같이 가지고 있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인간은 이성을 가진 존재로서 자신의 의지와 노력에 따라 다음의 존재 양태를 결정할 수 있는 중생이다. 인간보다 낮은 단계의 중생계에서는 높은 단계로 윤회하기 어려운 것은 앞에서 살펴보았다. 그런데 인간계 또한 고통스럽고 힘든 곳임은 우리 스스로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고통의 바다 속에서 상위 단계로 올라가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고 되는 대로 산다면 축생으로 윤회할 가능성이 높고, 분노를 참지 못하고 시비만을 일삼는다면 아수라로 윤회될 것이다.
반대로 자신의 노력에 따라 상위단계로 올라갈 수 있는 중요한 위치에 있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된다. 물론 인간이 다시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도 쉽지 않다. 하물며 상위단계에 태어나고자 한다면 얼마나 많은 노력과 정성이 요구되겠는가. 그렇지만 같은 인간이면서도 원효대사나 성철스님과 같은분이 계시는가 하면 강도ㆍ살인ㆍ절도 등을 일삼으며 악업을 짓는 무리가 있다.
우리가 어떤 업을 짓고 살아가고 있는가를 스스로 생각한다면 자신들의 다음 존재 양태는 어떠한지 짐작할 수 있으련만 많은 인간들이 아직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으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부처님도 모든 업은 중생 스스로 지어서 스스로 그 과보를 받는다고 하였다. 아무쪼록 인간의 몸 받기가 어려운데 인간으로 태어났을 때 열심히 수행하여 더 높은 경지로 갈 수 있기를 빌어본다.
인간으로 태어나기도 어렵지만 부처님의 법을 만나기는 더욱 더 어렵다. 불교에서는 이를 “대해에 떠다니는 구멍뚫린 판자에 거북이 목을 내밀어 쉴 수 있는 확률의 인연이다.” 고 한다. 향수해의 눈먼 거북이 천 년마다 한번씩 숨을 쉬기위해 수면 위로 올라오는데 이때 향수해를 떠다니는 나무판자의 뚫린 구멍으로 고개를 내밀어 쉴 수 있었다고 한다. 천 년마다 한 번씩 수면으로 올라오는 것도 오랜 시간인데, 그 넓은 향수해에 떠도는 작은 판자를 눈 먼 거북이 어떻게 보고 찾을 수 있겠으며, 우연히 머리를 내밀어 판자에 뚫린 구멍에 맞추어 고개를 내밀 수 있는 확률은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이렇게 어려운 확률에 맞추어 만난 귀한 인연이므로 다음으로 미루지 말고 금생에 노력하여 조금 더 나은 단계로라도 상승할 수 있도록 수행하라는 경계의 말이다. 부처님의 법을 만나 불교에 귀의하여 불교신도가 되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물질적 만족을 추구하는 데에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자신이 처한 위치를 돌아보고 나아가 자신의 존재 본질을 참구하여 궁극적으로 성불을 위해 끝없이 노력해 나가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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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의 벽에 그려진 그림을 벽화라고 한다.. 특히 각 건축물의 벽은 황토로 만들어져 있다. 황토로 만들어진 벽에 백토를 붙여 단장하고 금색의 단청을 입힌 뒤 그 위에 그림을 그린 것이다. 그림의 내용은 대체로 그 사찰의 창건에 얽힌 이야기로 의상대사나 원효대사와 관련된 내용이 많다. 불교설화에 얽힌 이야기로 호랑이, 봉황, 흰 코끼리 등이 그려져 있기도 한다. 또 자기의 본래 마음을 찾아 진리를 깨달아 가는 과정을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한 '심우도'가 그려져 있기도 하다. 보통 10단계의 장면으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십우도' 라고도 한다.
십우도란 첫째 자기 본심인 소를 찾으러감, 둘째 소의 발자취를 봄, 셋째 소를 발견함, 넷째 소를 붙잡음, 다섯째 소를 길들임, 여섯째 소를 타고 깨달음의 세계인 자기 집으로 돌아옴, 일곱째 이제 소가 달아날 걱정이 없으니 안심됨, 여덟째 다시 사람도 소도 본래 공임을 깨달음, 아홉째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듯이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여실하게 보아 본래의 마음자리로 돌아감, 열째 중생을 건지기 위해 거리로 나감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와 같이 '심우도' 는 인간의 본래 마음자리를 찾아가는 단계를 소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구성한 것이다. 곧 첫째의 '심우'란 깨달음을 얻고자 처음으로 보리심을 일으킨 것, 둘째의 '견적'에서 여섯째의 '기우귀가' 까지는 수행의 과정, 일곱째의 '망우존인'부터 여덟째의 '인우구망'까지는 깨달음을 얻는 과정, 아홉째의 '반본환원'은 열반의 경지에 이른것, 그리고 마지막의 '입전수수'는 깨달음을 얻은 뒤 세상 안으로 들어가 중생들을 제도하는 단게를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십우도' 이외에도 부처님의 일대기를 그린 팔상도와 부처님과 관련되는 다른 장면도 많이 그려져 있다. 벽화 중에서 흰 뼈와 검은 뼈가 나오는 장면은『부모은중경』을 설하는 장면이며, 연꽃을 들고 있는 모습은 '염화미소. 그리고 설산동자가 나찰하는 몸을 던지는 장면은 '설산구도의 과정'을의미한다. 관 밖으로 발을 내놓은 장면은 심법을 전하는 것은 상징하는 것이다.
이처럼 각 벽에 그려진 장면마다 이야기가 담겨있다. 그 내용들은 간략하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여기서 상세하게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 최근에 벽화를 자세히 설명한 책자가 발간되어 있으므로 참고하길 바라며, 여기서는 벽화의 종류와 내용을 예로 든 것으로 그치고자 한다.
사찰의 적각은 목재로 골격을 구성하고 그 벽면을 황토를 이용하여 벽면을 구성하고 있다. 이렇게 황토로 된 벽면은 건축의내외를 구별짓는 용도로 쓰이기도 하지만, 부처님이 앉아 계신 곳의 뒷면은 탱화를 그리는 데 활용되기도 한다. 대부분의 탱화가 종이류나 천을 이용하여 걸개처럼 만들지만, 곳에 따라서는 벽화로 된 곳도 있다.
이러한 후불벽화는 전남 강진에 있는 무위사와 전북 고창의 내소사, 그리고 경북 안동의 봉정사가 유명하다. 무위사와 내소사의 후불벽화는 부처님의 탱화가 그려져 있지만 그 뒤로 돌아가면 관세음보살상이 벽화로 그려져 있다. 그 탱화는 보는 이로 하여금 놀라움을 자아내게 할 정도로 뛰어나다. 그 밖에도 신라 때 솔거가 그렸다는 황룡사의 벽화는 날아가는 새가 벽화에 그려진 나무에 앉으려다 떨어져 죽었을 정도로 뛰어난 작품이었다고 하나 불에 타서 없어져 아쉽게도 지금은 볼 수 없다.
벽화의 특징은 물감이 벽면 안으로 스며들어가 있어 벽면에 흠집이 생겨 겉면이 떨어져도 안쪽 벽면의 색채가 지워지지 않고 그대로 남는 다는 점이다. 단지 물에 약하고 충격에 약해 영구히 보존하는데 약점이 있어 많이 없어지고 현존하고 있는 것은 대부분 국보나 보물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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