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네 전통이 가르치는 바에 따르면, 실재에는 세가지 본성이 있습니다. 상상, 상호의존성, 그리고 궁극적 온전함의 본성이 그것이지요. 망각과 편견 때문에 우리는 대체로 그릇된 관점과 견해의 베일로 실재를 덮습니다. 그리하여 상상으로 실재를 보는 것입니다. 상상은, 실재를 독립된 실체와 자아들의 집합으로 보는 착각을 불러일으키지요. 착각을 깨뜨려 부수기 위해 수행자들은 모든 현상들이 생멸生滅의 과정 속에서 어떻게 서로 의존하고 있는지 또는 서로 연결되어 있는지를 명상하는 것입니다. 사유는 명상의 수단이지 철학적 이론의 바탕이 아닙니다. 사람이 개념들의 체계에만 매달리면 궁지에 몰리게 돼 있어요. 상호의존성에 대한 명상은 철학적 견해나 명상 방법들에 사로잡히지 않고, 실재 속으로 들어가 그것과 하나 되도록 우리를 돕습니다. 뗏목은 강을 건너는 데 쓰는 물건이지 어깨에 메고 가라고 만들어진 게 아닙니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은 달이 아니란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사람은 궁극적 온전함의 본성-상상으로 만들어진 모든 그릇된 견해에서 해방된 실재로 나아갑니다. 실재는 실재입니다. 그것은 모든 개념을 초월하지요. 그것을 제대로 서술할 수 있는 개념은 없습니다. 상호의존성이라는 개념도 물론이에요. 우리로 하여금 철학적 개념에 집착하지 않도록 경계하면서 또한 세 가지 본성이라는 이론에도 사로잡히지 않도록 하기 위해, 불교는 세가지 비-본성(non-natures)을 말하고 잇습니다. 대승불교의 근본 가르침이 여기에 있지요.
궁극적 온전함의 본성 안에서 실재를 지각할 때, 수행자는 이른바 평등성지平等性智의 경계에 도달하여 더이상 주主와 객客의 분별이 이루어지지 않는 놀라운 합일에 들어갑니다. 이것은 멀리 떨어져, 이를 수 없는 그런 경지가 아니에요. 누구든지 웬만큼만 수련을 계속하면 그 맛을 볼 수 있어요.
내 책상에는 후원받기를 원하는 고아들의 서류가 쌓여 있습니다(베트남 불교 평화대표단은 베트남에서 고아들을 돌보는 가족을 후원하기 위해 기금을 모으고 있었다. 미국에서는 후원자들이 매달 6달러씩 고아들에게 보냈다). 하루에 몇장씩 번역을 하지요. 서류 한 장을 번역하기 전에 나는 사진에 있는 아이의 눈을 들여다 보고 그 표정과 특징을 자세히 살펴봅니다. 그러면 그 아이와 나 사이의 깊은 관계가 느껴지고 이어서 그 아이와 특별한 통교를 나누게 됩니다. 그대에게 이 글을 쓰면서 나는 신청서류를 한 줄 한 줄 번역하는 동안 느꼈던 특별한 통교가 일종의 평등성지였음을 깨닫습니다. 나는 더이상 아이를 돕기 위해 문서를 번역하고 있는 '나'를 보지 않습니다. 또한 나는 더이상 사랑과 도움을 받는 아이를 보지 않습니다. 아이와 나는 하나예요. 아무도 불쌍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아무도 도움을 청하지 않고 아무도 도움을 주지 않아요.해야 할 임무도 없고 이루어야 할 사회사업도 없고 자비도 없고 특별한 지혜도 없습니다. 이것이 평등성지에 들어간 순간들인 것입니다.
이렇게 실재를 궁극적 온전함의 본성 안에서 경험할 때, 그대 뜰의 복숭아나무가 마침내 제 실상을 온전하게 드러냅니다. 복숭아나무는 그 자체로서 진리요 실재며 그대의 자아입니다. 그대 뜰 앞을 지나간 많은 사람들 가운데 과연 몇 사람이 복숭아나무를 참으로 보았을까요? 예술가들의 가슴은 좀더 민감하니까 어쩌면 다른 많은 사람들보다 더 깊이 나무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의 가슴이 남들보다 좀더 열려 있기 때문에 예술가와 나무 사이엔 벌써 통교가 이루어져 있겠지요. 중요한 건 그대 가슴이에요. 만일 그대 가슴이 그릇된 견해로 덮여 있지만 않다면, 그대는 나무와 자연스런 통교에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복숭아나무는 자신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옹글게 보여줄 준비가 다 돼 있을 거예요.
--- pp 88~90
예를 들어 한 마술사가 자기 몸을 여럿으로 잘라내어 각기 다른 곳에 나누어 놓습니다. 손은 남쪽, 팔은 동쪽, 다리는 북쪽, 이런 식으로 나누어 놓았다가 한 마디 기합 소리와 함께 그 모든 부분을 맞추어 다시 한몸으로 만드는 겁니다. '마음 모음'이란 이와 같은 거예요. 그것은 한 순간에 우리의 흩어진 마음을 불러들여 하나로 회복시키고 그리하여 삶의 순간순간을 살 수 있게 하는 기적입니다.
--- p.30
몇 년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내가 미국에서 짐과 함께 처음으로 여행을 할 때였는데 한번은 나무 아래 앉아 오렌지를 먹게 됐어요. 짐이, 자기가 앞으로 할 일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지요. 앞으로 있게 될 매혹적이고 고무적인 일거리를 생각할 때마다 짐은 거기에 깊이 빨려 들어가, 말 그대로 지금 자기가 무얼 하고 있는지 잊곤 했어요. 오렌지 한 조각을 입에 넣고는 그것을 미처 다 씹기도 전에 다른 조각을 넣으려고 하는 겁니다. 자기가 지금 오렌지를 먹고 있다는 사실을 거의 모르고 있었어요. 그래서 내가 이렇게 말해 주었지요.
"입에 넣은 오렌지를 먼저 먹게나."
짐은 깜짝 놀라 지금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을 깨달았어요. 지금까지 그는 오렌지를 전혀 먹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그가 무엇을 먹었다면 장래 계획을 먹었던 거지요.
오렌지는 여러 조각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만일 그대가 한 조각을 제대로 먹을 수 있다면, 그대는 아마도 오렌지 전체를 먹을 수 있을 겁니다. 한 조각을 먹지 못하면 전체도 먹을 수 없습니다. 짐은 알아들었지요. 천천히 손을 내리고 마음을 모았어요. 신중하게 씹어서 모두 삼킨 다음 다른 조각을 입에 넣었습니다.
뒤에 짐이 반전(反戰)활동을 하다가 투옥되었을 때, 나는 그가 좁은 감방에서 잘 견뎌내고 있는지 염려되어 짤막한 편지를 보냈지요.
"우리가 함께 나눠 먹던 오렌지를 기억하는가? 그대가 거기 있는 것도 오렌지와 같다네. 그것을 잘 먹어서 그것과 하나 되시게. 내일이면 더 없을 테니까."
--- pp 17~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