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에서 예수님을 보게 될 때까지 우리는 에덴의 동편, 가시가 무성한 저항의 땅에서 살아야 한다. 우리는 안락한 삶을 추구하지만, 안락함은 이생이 주는 선물이 아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무거운 짐을 지고 이마에 땀을 흘리며 살아가야 하는 삶이다.
평탄하고 완만한 동부 콜로라도와 울퉁불퉁하고 굴곡이 심한 서부 콜로라도의 지형은 우리가 원하는 삶과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차이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 또한 이 지형은 다윗의 삶과 그 아들 솔로몬의 삶의 차이도 예시해준다.
솔로몬은 '화평한 자'(peaceful one)라는 뜻이다. 그가 이스라엘을 통치할 때 그 나라는 태평성대였다. 그는 온갖 특권을 누리며 살았다. 마음껏 연구하며 글을 쓰고, 호화로운 연회를 주최하고 더없이 정교한 예술품을 수집하고, 뛰어난 음악을 들었다. 고품종의 동물을 키우고, 꿈에나 볼듯한 집에 주위 경관까지 세심하게 가꾸며 살았다(전 2:1-10).
솔로몬의 인생은 평탄하고 예측 가능했다.
동부 콜로라도가 바로 그랬다.
다윗의 인생은 온갖 격변들로 울퉁불퉁했다.
서부 콜로라도가 바로 그러했다.
그드이 어디서 살았느냐는 후에 그들이 각자의 삶을 어떻게 마쳤느냐와 큰 관련이 있다. 다윗의 묘비에는 그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행 13:22). 솔로몬의 묘비에는 그가 아비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아니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 앞에 온전치 못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왕상 11:4).
이것을 생각할 때마다 의문이 생긴다. 내 부음에는 어떤 말이 따를까? 내 묘비에는 어떤 말이 새겨질까? 나는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기 원하는가? 나는 후손들이 다윗을 추모하듯 나를 기억해주었으면 좋겠다. 나뿐 아니라 모두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윗의 묘비명과 같은 내용이 새겨지도록, 다윗과 같은 삶을 살기 원하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나는 다윗의 묘비명을 원하면서도 솔로몬과 같은 삶을 살기 원한다. 실로 모순이다.
--- pp.128~130
우리는 장례식에 참석했다. 성경봉독에 이어 말씀이 선포되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善)을 이룬다는 소망의 말씀이었다. 사람들은 주로 아이의 아버지에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 장례식에 참석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아이의 아버지와 친분이 있어 찾아온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친구들은 이번 일을 계기로 더 훌륭한 설교자가 될 것이며, 더 좋은 글을 쓸 수 있을 것이라며 그를 위로했다(죽은 그 소년의 아버지는 목회자이자 작가였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신실한 크리스천이었고, 그들의 말은 진심이었다. 나 또한 이 일을 계기로 가족간의 유대가 좀더 긴밀해지고, 그 가정이 더욱 강하게 성장하리라 믿는다. 아이의 아버지가 더욱 훌륭한 설교자, 더욱 훌륭한 작가가 될 것이라 확신한다. 하지만 그에게 선택권이 있었다면, 차라리 덜 훌륭한 설교자, 덜 훌륭한 작가가 되는 쪽을 택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어쩌면 그는 이미 집필을 끝낸 책과 전에 했던 설교를 포기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그런 선택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어쩌면 그는 자기 목숨을 버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그 선택권 역시 주어지지 않았다. 콜로라도를 돌아오는 길은 참으로 지루하고 적막했다. 머릿속이 갖가지 생각들로 복잡했다. 집에 돌아와 보니, 지금 당신이 읽고 있는 이 책이 겨우 일부만 끝난 상태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책을 마무리하고 싶은 마음이 더 이상 들지 않았다. 그럴 만한 기력도 없었고, 시중에 넘쳐나는 뻔한 내용의 책들에 내 책을 한 권 더 보태고 싶지도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인생에 닥치는 격변들을 통해 아름다움을 일궈내신다는 이야기를 써야 할 텐데, 그렇게 말하고 싶은 마음이 안 생겼다. 그런 격변에서 아름다움이라는 어린 가지가 나오는 것을 잘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비단 이책뿐만 아니라 앞으로 다시는 글을 쓰고 싶지 않았다.
--- pp.38~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