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 5년 만에 외국어를 다시 공부하는데 한자가 도저히 외워지지 않아서(그간 컴퓨터와 휴대전화의 한자자동변환기능에 너무 의존했더니), 혹시 힌트를 얻을 수 있을까 하고 고3때도 안봤던 공부법이나 암기에 대한 책을 찾아읽고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한 책은 많지만 알맹이를 들여다보면 저자들이 준비한 시험이 제각각이고, 각각 그 시험에 특화된 내용을 주로 설명하다 보니 내게 응용하기가 어려운게 대부분이다. 그런 중에 이 책, 가장 재미있게 읽었다.
책에는 기억술에 대한 미시사, 저널리스트가 현대 기억술 산업에 대해 취재한 르포, 그리고 평범한 사람이 전미 메모리 챔피언십에서 우승하기까지의 체험담이 녹아있다. 분량도 골고루 들어있고, 토픽간의 관계도 유기적이다. 제목도 그렇고 원래 제일 궁금했던 건 역시 어떻게 보통 사람이 1년 만에 암기력으로 미국 1위가 되었는가 하는 점이었지만, 막상 읽고 보니 저자 조쉬 포어가 1위를 한 영역인 카드 암기는 내가 활용할 일이 없어서... 가상의 건물을 떠올리고 움직이는 동선에 따라 콘텐츠를 하나씩 놓아두는 기억의 궁전은 연대표 등을 기억하는데 유용하겠지만 역시 당장은 쓸 일이 없어서... 바로 적용할 방법은 없었다.
대신 범용적인 암기에 대한 힌트도 많다. 저자는 기억술과 관련이 있는 뇌과학 연구 결과를 풍부하게 소개하면서, 직접 자신의 훈련에 응용한 방법도 공개한다. 예를 들어 슬럼프가 왔을 때에 대한 다음 구절.
새로운 능력을 학습하는 사람의 뇌를 fMRI로 촬영해보면 단계마다 활성화되는 뇌의 부위가 다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임무를 자동적으로 수행함에 따라 이성적 추론을 담당하는 뇌 부위의 활성화 정도는 떨어지고 다른 부위는 활성화된다. 이것을 '오케이 플래토'라고 한다. 오케이 플래토란 계속 연습하던 것을 어느 순간 자유자재로 할 수 있게 되면서 만족하는 수준이다.
임무가 자동적인 것, 즉 무의식적인 것이 되면서 더는 발전하지 않는다.
(...)
초기에 심리학자들은 오케이 플래토가 개인이 타고난 능력의 상한선을 나타낸다고 생각했다.
(...)
이런 주장을 보면,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최선을 다하는 것뿐이다.
하지만 에릭손과 그의 동료 심리학자들은 실험 과정에서 골턴의 논리와 반대되는 경우를 계속 발견했다. 그들은 골턴의 벽이 선천적 한계와는 관련이 없고 우리 자신이 설정한 만족도와 관련이 있다고 믿었다.
(...)
세계 정상급 수준의 피겨 선수들은 연습 시간에 평소 실수가 잦은 점프만 연습하지만, 평범한 선수들은 벌써 완벽하게 숙달한 점프를 계속 연습한다.
그래서 본인도 메트로놈을 가져다 놓고 훈련 시간을 의식적으로 단축시키고, 매일 일지를 쓰면서 약점을 분석해서 슬럼프를 극복했다고 한다. 저자와 저자에게 도움을 준 사람들은 기억력을 키나 시력같은 신체의 기본적 특질이 아니라, 악기다루기 같은 기술로 보고 있는데, 이를 향상시킬 방법은 지금 수준에서 단점과 약점을 계속 찾아내서 극복하는 것, 그리고 즉각적인 피드백을 얻는 것이라고 한다. 오... 평소 공부법이 어땠는지를 돌아보니 바로 찔리는게 나온다. 또, 이미지화 해서 외우는건, 어원+어원인 단어의 경우에는 효과적이라(영어와 한자쪽에서 응용한 단어장도 많고) 앞으로 좀 더 염두에 두려고 한다.
그리고 한가지 더 흥미로운 것은, 저자가 기억술의 한계에 대해서도 짚어둔 부분이다. 저자는 '기억술은 맥락을 배제한 지식 형태'라는 비판에 수긍하면서, 자신이 취재차 상하이에 사흘간 가 있었지만 중국 역사에 대해 배운 적이 없었기 때문에 박물관과 유적지를 돌아다니면서도 중국에 대해 이해하지 못한 것을 예로 든다. 즉, 기초 정보가 없어서 학습할 능력 자체가 없었다는 건데, 결국 기억술과 지혜는 상호 보완적이므로 어느 하나를 배제하면 안된다는 결론. 공부하다가 탄력이 붙는 것도 어느 정도 배경지식이 쌓여야 나오는 것이니까 이것도 무척 공감되었다.
그 밖에도 역사는 길지만 다소 생소한 기억술에 대해서 줄줄 나오는 이야기가 술술 읽히는 이유는, 저자의 신중한 묘사 덕분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책에서 제일 좋았던 부분은, 작가가 평소에는 집중력을 높이기 위해 다소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연습했으나 대회 때는 일부러 익숙한 모습을 포기하고 그나마 멀쩡한 모습으로 있기로 결심한 다음 구절.
몇 년 동안 못 본 고등학교 친구들, 내가 기억술에 관심 있다는 것을 모르는 친구들, 내 여자 친구의 부모님이 떠올랐다. 그들이 텔레비전을 틀었는데 검은색 커다란 안전 고글과 귀마개를 쓰고 카드 한 벌을 너기는 내 모습을 본다면 어떻게 생각할까? 결국 나는 대회가 중요하기는 해도 내 주변 사람들이 당황할 것을 고려해 고글을 쓰지 않기로 마음먹고 탁자 밑에 내려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