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이란 도대체 뭘까요? 자기계발을 해야 성공한다는 둥, 한시라도 자기계발을 멈춰서는 안 된다는 둥, 자기계발이라는 말만 들어도 마음이 막 초조해질 정도니 자기계발이 선풍은 선풍인 모양입니다. 대형 서점에만 가봐도 베스트셀러 코너는 온통 자기계발서로 꽉꽉 메워져 있죠. 니 치즈는 누가 옮겨놨는지 지금 알기나 하냐, 부자 아빠 될 대책은 있냐, 20대 안에 ‘쇼부’ 안 보면 넌 망해 이 계집애야, 나쁜 여자가 되고 여우 같은 여자가 되어서 1그램도 손해 보지 말고 살아라, 배려를 하고 존중을 해라, 맛있는 마시멜로가 있다고 홀랑 먹다니 정신이 있냐 없냐, 칭찬받으면 춤추는 고래에 피라니아에 펭귄 핑에 금수도 자기계발을 하는데 와서 좀 배워라, 폰더 씨처럼 위대한 하루를 보내려면 열심히 살아야 되니까 긍정의 힘을 발휘해서 개처럼 일하라…….
서점에 가서 이런 책들을 보다 보면 왠지 흠씬 두들겨 맞은 기분이 되어서 나오게 되더라구요. 이런 책들이 다 말하는 것, 아니 외치는 것 같거든요. “언제까지 그 따위로 살 텐가!” “지금 니 상황에 잠이 오십니까?” “지금 니 팔자 조져놓은 건 다 너 때문이다.” 이렇게 자기를 초조하게 만드는 게 무슨 자기계발서인가요? 자기학대서 아닌가요?
나도 불안에 잠식되어 매달리듯 자기계발서를 읽어치우던 시절이 있었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더 불안해졌습니다. 내가 몰랐던 건 바로 그거였어요, 자기계발서를 읽는 건 자기계발이 아니라는 사실. 그건 아주 잠깐 동안의 안도감을 사는 행위일 뿐, 실제로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고 아무것도 계발되지 않는다는 사실.
--- <1부 자기계발서를 덮으세요> 중에서
이런 종류의 섭식 장애나 다이어트 강박을 가지고 있는 우리는 각기 다른 사람이지만 모두 한 가지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허전함, 외로움, 쓸쓸함을 견디지 못하는 마음 약한 여자들이라는 것, 내가 한심하다는 걸 스스로가 제일 잘 알아서 밤낮 부끄러워하면서도 결국 잠시라도 뭔가 채워진 것처럼 느끼게 해주는 음식의 달콤한 유혹에 굴복하고야 마는 약한 여자들이라는 것, 그렇게 깔때기를 단 거위처럼 꾸역꾸역 목구멍 위로 넘치기 직전까지 음식을 밀어넣고 애초에 원했던 포만감과 안정감은 이런 종류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처절하게 느끼면서 언제나처럼 또다시 후회하고 마는 그런 여자들이라는 것. 결국 슬픔이 깊을수록 위장도 커지는 거였습니다.
(……) 아직도 텔레비전에 나오는 뚱뚱한 여자들은 손에서 단 것 놓지 못하고 요만큼도 움직이기 싫어하는 게으름뱅이로 그려지지만 뚱뚱하다는 건, 살찐다는 건 그렇게 단순한 일만은 아닙니다. 뚱뚱해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단지 나태와 식탐만은 아니라고요. 날씬해지기 위해서 그러하듯, 뚱뚱해지기 위해서도 근성과 고통은 꼭 필요한 겁니다.
--- <2부 우리의 뚱뚱함은 외로움 탓이에요> 중에서
공사에 관계없이 사람들이 모인 자리를 수없이 겪으면서 알게 된 것은, 비단 젊고 서투른 연인들이 모였던 그런 자리를 제외하고도 ‘젊은 여자’가 순전히 자기 자신으로서 기능하고 존재하는 것은 너무나 어렵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은 젊은 여자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바라지만, 또 어떤 면으로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요. 그녀가 누구인지, 꿈은 무엇인지, 두려움은 무엇인지, 무엇을 열망하는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에 대해서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 거죠.
(……) 이렇게 젊은 여자에게는 역할만 있고 자아는 없으므로 우리에게 손가락질하기는 너무나 쉽습니다. 우리는 우리 몸이 우리 것인지 알았는데 세상의 생각으로는 그것은 사회와 나라의 소유인 거죠. 담배를 피우거나 술을 마시는 젊은 여자를 욕하는 이들이 휘두르는 근거는, 그녀가 결혼을 하거나 출산을 할 의사가 있건 없건 애를 낳을 여자가 그런 짓을 하면 안 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이때 그녀는 개인이나 한 여자, 한 인간이 아니라 그냥 사회의 자산인 자궁인 셈이죠. 젊은 여자들의 이기심으로 출산율이 낮아지고 있다고 준엄하게 야단하는 신문 기사를 읽을 때 반도 읽기 전에 알 수 있는 건 그들이 우리의 자궁을 사회의 소유로 여기고 있다는 겁니다.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건 그들의 생각에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아니라 장차 국민을 생산할 자궁 그 자체이며 자궁으로서의 의미나 의무를 방기하고 있는 나태한 자궁에 불과한 거예요.
--- <3부 내가 나의 이름을 불러도 우리는 꽃이 됩니다> 중에서
그래도 어린 남자를 사랑하던 시절의 나는, 부끄럽지만 아직 희망이란 걸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진정한 낭만주의자였는지도 모르겠어요. 배를 곯는 데이트를 한다 해도, 기댈 수 없고 어리광 부리는 귀여운 여자가 될 수 없는 페널티를 다 감수한다 해도, 나는 아무도 들어가지 못했던 나만의 영토 같은 곳을 그들의 가슴 안에서 찾고 싶었던 거예요. 온전히 나만의 것, 아무도 침입하지 않은 나만의 영토, 계산에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사랑을 혹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 같은 것.
그따위 게 아무 곳에도 없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호된 대가를 치러야만 했습니다. 그러면서 아주 느리게, 난 젊고 순수한 게 그토록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죠. 그들의 풋풋함과 사랑스러움에 끌렸다면 미숙함과 치기 역시 감당했어야 하는 거예요. 그들이 가르쳐준 것은, 젊음의 다른 이름은 맹목이고 불같은 사랑의 다른 이름은 불안이며 순수의 다른 이름은 무지함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누구의 가슴에도 완전한 새것은 없다는 것, 누구도 디뎌보지 않은 순결한 영토는 없다는 것, 그리고 사랑에도 깨끗한 것만이 늘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것.
--- <4부 연하남에 흔들리나요?> 중에서
내가 그들을 저버린다고 해서 오빠들이 추호도 섭섭해할 리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악착같이 지는 고대 오빠들 편에 붙은 건 사실 작전 타임 때문이었습니다. 최희암 감독은 자석판에다 빨간 자석과 파란 자석을 요리조리 움직이며 뭔가 멋지게 작전 지시를 했지만, 훗날 인터넷 유머란에 오르내릴 정도로 ‘작전 없는 농구’로 유명했던 박한 감독은 종이에다 좀 성의 없는 태도로 매직으로 뭔가 찍찍 그리면서 버럭버럭 열심히 말했는데 그 지시라는 것들이 또 가관이었던 겁니다.
예를 들면 이런 거였습니다. “얘들아, 지금 상황이 어떤 거냐 하면, 지금 30초가 남았잖아, 그 동안에 우리가 골을 넣으면 이기고 못 넣으면 져. 알겠지? 가라!” “얘들아, 너네가 지금 안 되는 게 딱 두 가지가 있어. 그게 디펜스랑 오펜스야. 그거 두 개만 잘 하면 돼. 알겠지? 가라!” 그때 카메라에 잡힌 오빠들의 표정은 절망 그 자체였습니다.
10년도 더 지난 오늘까지도 오빠들의 그 표정, 여드름 송송 난 그 얼굴들이 생생하게 살아 그토록 사랑스러운 이유가, 어른이 되어보니 이놈의 인생이란 게 참 종종 박한 감독 같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이십몇 년을 살았잖아, 일을 하면 밥을 먹고 안 하면 굶는 거야. 가라!” “지금 너네가 안 되는 게 딱 두 개가 있어. 그게 잘 사는 거랑 열심히 사는 거야. 그거 두 개만 잘하면 돼. 가라!”
네, 네, 감독님, 갈게요. 옛날 우리 오빠들도 그 작전 듣고 그렇게 열심히 달렸는데요 뭐. 갈게요, 가라면 가야지요.
--- <5부 그냥 열심히 살아보는 겁니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