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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검은토끼와 그 밖의 이야기들

머리검은토끼와 그 밖의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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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6년 05월 13일
쪽수, 무게, 크기 264쪽 | 350g | 145*205*20mm
ISBN13 9788954435970
ISBN10 8954435971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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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책 속으로 책속으로 보이기/감추기

그때 처음으로 틈새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 나는 세상의 틈새에 있다. 여기는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래서 안전하다. 여기서 나는 세상으로 다시 나갈 준비를 하는 거다. 1인 돈까스라는 게, 나한테는 그런 의도 있는 거야. 세상의 풍랑에서 안전하다는 느낌. 자기 세계를 가질 수 있다는 느낌. (「레오파드」, 15p)

딱딱하게 굳은 그의 얼굴을 보면서 나는 여기서 일할 수 없으리라는 걸 알았다. 내 탓이 아니라는 건 그들도 알고 나도 알았다. 그러나 폭풍이 불어닥쳤을 때 선원들이 밀항자를 찾아내 바다로 던져버리듯 누구가는 이 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했다. 나는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다. 거기서 내가 망친 게 아니라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있을 때 일이 좆 됐다는 게 중요했다. ([반ː], 62p)

어질어질한 머릿속에서 민희의 얼굴과 현숙의 목소리가 뒤섞였다. 마치 민희가 지금 자기 아내로, 다른 남자와 낳은 딸과 함께 언제든지 조곤조곤한 말투로 자신을 속일 준비가 되어 있는 현명하고 머리 검은 아내로 둔갑해 지금 자신과 이야기하고 있기라도 하듯. (「머리검은토끼」, 87p)

하지만 누가 손에 피를 묻히건 그의 죽음은 부패한 전 정부의 복수로 비칠 것이다. 새 정부에게는 어느 쪽이건 남는 장사였다. (……) 귀국에 대한 갈망과 손상된 명예에 대한 집착이 경험 많은 베테랑의 눈을 가리고 있었다. 블랙이 봤다고 생각했던 빛은 그의 내면에서 나오던 게 아니라 그를 가리고 있던 희망의 장막에서 반사된 것이었고 그를 감싸는 활기는 덫을 보지 못하고 먹이에 달려드는 짐승의 성급함에 불과했다.
--- p.119

보석상을 털지 않았다면 지금쯤 어찌 됐을까 생각해보곤 했어. 많이는 아니고 가끔. 딱히 결론이 나진 않더라고. 세상일이 그렇지. 옳고 그른 게 딱 나뉘질 않잖아. 여섯 정도는 옳고 넷 정도는 그를 수도 있고, 반반일 수도 있고. (……) 우린 불확실한 상황에서 판단을 내리고 결정을 해야 해. 그에 대한 책임도 져야 하고. 남자라면 더.
--- p.127

우리가 필요할 때는 말을 걸고 관심을 기울이고 때로는 동정도 하지만 결코 얼굴을 기억하지는 않는 사람들과 불현듯 눈을 마주치게 되는 바로 그때, 코끼리처럼 큰 귀에 우람한 덩치의 중년 남자와 커서 미인이 될지도 모를 퉁퉁한 여중생이 불길한 비밀을 감춘 채 인구 천만의 도시 속에서 약간의 후원금을 벗 삼아 발걸음을 옮기며 골목과 거리를 떠도는 모습을 본 것 같다는 착각에 가끔 빠지기도 했다.
--- p.169

좁고 고요한 임대아파트 부엌에서 부용이 병철의 목에 칼을 찔러 넣었을 때 그의 동공은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바싹 졸아들었다. 그다음부터 그는 고기였다. 누가 만져도 똑같은 고기. 누구라도 살과 뼈를 가르고 뼈와 뼈를 분리하고 가죽을 벗겨내고 연골을 파내고 지방을 밀어내고 털을 골라내고 내장을 다듬고 피를 씻어낼 수 있는 고기.
--- p.201

사고에 대해 아무도 사과하지 않았고 누구도 책임지지 않았다. 청문회에 나온 증인들은 어쩔 수 없었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윗사람이 시킨 대로 하다 보니, 아랫사람이 멋대로 하는 바람에 벌어진 일이라고 했다. 윗사람이건 아랫사람이건 모두 그렇게 말했다. 수연은 자기가 단지에 들어간다면 아버지의 목숨을 길에 내다 파는 거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 p.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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