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6시쯤 페이스북이 날 깨운다. 30분쯤 댓글을 달고 친구들이 간밤에 고민한 걸 공짜로 엿본다. 7시 30분쯤 도매상에서 물건을 싣고 저녁 7시까지 장사를 한다. 저녁에 돈 계산하고 밥 먹고 졸음이 몰려오면 살살 글을 써본다.
글을 쓰려고 TV와 술, 소파를 끊었다. 본의 아니게. 난 정말 글 쓸 조건이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우습게도 지금은 그냥 쓴다. 2시간 정도 썼는데 글이 조금씩 길어져서 지금은 수면 시간이 부족하다. 글이란 게 컴퓨터 앞에 앉으면 저절로 써지면 좋은데 쉽지가 않다.
아내가 밥을 많이 주는 날은 감정이 분산되기에 글쓰기가 힘들다. 햇빛이 너무 강렬해서 몸이 피곤하면 섬세한 글이 도망간다. 무미건조한 글자만 남는다. 글자만 남아있는 글을 몇 번 써보다 어쩔 수 없이 지운다. 조금 더 긴 이야기를 쭉 쓰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내가 쓴 글들은 대부분 운전하면서 쓴 글들이다. 아침에 머리가 맑아서 출근 시간 운전 중에 제일 많이 쓴다.
어떤 주제나 이야깃거리가 문득 생각이 나면 그 장면을 계속 생각한다. 로또 맞으면 돈을 어디에 쓸까 상상하는 것처럼. 그러면 과거에 있었던 일들이 스멀스멀 떠오른다. 과거에서 상황과 주변, 인물을 가져오고, 이야기 주제는 운전 중인 지금의 내가 정한다. 신호대기 중에 장면을 연상할 수 있는 단어나 문장을 메모한다. 내 글에 나오는 중에서 좋은 문장은 대부분 이렇게 운전하면서 얻어진다.
묘하게도 그 절절했던 장면이 거래처에 들어가면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내가 한 생각을 내가 기억하지 못한다. 그 상황을 놓치면 결국 글자만 남는다.
정말 내 가슴에 와 닿는 문장이 있고 메모할 상황이 아니면 그냥 울면서 거래처로 간다. 물건을 팔고 울면서 “돈 주세요” 하면 수금도 잘된다.
중요한 건 감정을 유지해야만 문장이 기억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친구의 하루’라는 글을 쓰는 동안 많이 울었다. 울어야만 그 문장이 생각난다.
퇴근해서 집에 오면 그 감정을 살릴 자신이 없다. 컴퓨터가 겁난다. 자판을 보고 첫 문장 쓰기가 막막하다. 메모를 보면서 겨우 감정을 살려본다. 그 감정이 내 글에 리듬을 부여한다. 글자가 아니라 감정에 글을 띄운다는 표현이 맞는 거 같다.
11시가 넘으면 급격히 체력이 떨어지면서 글에 리듬이 사라지고 다시 건조한 글자가 될 조짐이 보인다. 악착같이 마무리를 하고 바로 페이스북에 올린다.
나랑 같이 놀 사람, 여기 붙어라!
이런 이야기와 글맛, 참 오랜만에 만나는가 싶다.
힘 빼고 읽어야 맛이 나는 내면의 수필과는 다르다. 자기감정에 취해 내면의 벽을 만들어 안주하게 되는 글이 아니다. 자기 연민에 취하기보다 차라리 나눠먹는 과자의 즐거운 맛에 취하게 한다고나 할까?
자기 속으로 파고드는 사람들한테 손짓을 한다. 같이 놀자고. 자기가 계속 술래해도 좋으니까 같이 놀자고. 같이 놀면 우리는 한 편이라고 손짓을 한다.
손짓이 너무 다정해서 눈물도 잠깐 글썽이게 되는데, 어느새 눈물 쓱 훔치고 옆에서 놀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다른 손에 과자꾸러미를 들고 손짓을 하는데 당할 재간이 없이 그의 엄지손가락을 부여잡고 같이 놀 사람 같이 외치고 있는 나를 본다. 같이 놀아야 재미있다.
이웃집 슈퍼맨 같은 과자장수 맹긴이의 매력, 그의 글은 정말 뜨거워지는 글이다.
“와, 너 권용득 작가랑 페친이네, 의왼데?”
“네, 글 잘 쓰는 만화가라 친구 신청했어요!”
조기축구회 총무인 명균이와 페이스북에서의 첫 대화였다. 만화가 권용득과 페이스북 친구라는 게 의외였다. 과자를 파는 장사꾼이 작가랑 친구라는 게 말이다. 선입견이었다.
“형, 나도 글 좀 써요.”
“그래, 함 써봐!”
조기축구회 알림문자에 열심히 좋은 문구들을 써 보내던 게 생각났다. 좋은 동생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형, 글 올렸어요.”
그냥 따뜻하고 좋은 얘기를 써서 올리려니, 쉽게 생각하고 있었던 차였다. 제대로 한 방 먹었다.
한 달음에 읽히는 글의 기세와 머리를 찌릿하게 만드는 절묘한 문장. 억지로 짜내거나 머리를 굴려 뽑아낸 것이 아닌 감정들이 글 좀 읽는다는 편집자의 뒤통수를 친 것이다.
난 채하거나 잰 채하는 먹물 섞인 글이 아니었다. 몸으로 비벼 대고 마음으로 문질러 댄 진짜 글이었다. 평소 모습과 다르게 나는 호들갑을 떨면서 그의 글을 공유했다. ‘진짜 글쟁이가 나타났다.’라고 하면서.
소설가 하명희가 반응을 했다.
“박명균이 그 박명균 맞구나!”
하명희는 27년 전 박명균을 끄집어 올렸다.
‘우리 고등학교 때 박명균이라는 고등학생이 낸 책을 돌려 읽으며 공부했어요. 어떻게 이렇게 글을 쓰냐 감탄하면서.’
또 한 방 먹었다.
27년 전 책을 냈던 저자였던 것이다.
어느 날, 술 한잔 걸치는 날이었다. 그동안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엮어 책을 내겠다고 꾀는 자리였다.
“형, 만 부는 팔릴 거예요.” 하며,
책 한 권을 내밀었다.
『친구야, 세상이 희망차 보인다』(동녘, 1990).
이미 만 권의 책을 본인의 이름으로 팔아봤던 저자였다. 술 한잔 걸치고 사무실에 들어와 읽기 시작했다.
독자를 빨아들이는 몰입감은 오랜만이었다. 그동안 축구를 하면서 보았던 박명균이 거기에 있었다. 남들 안 뛸 때 뛰고 또 뛰고, 남들 실수해도 소박하게 웃어주고, 싸울 일 있으면 따뜻하게 다독이던 그의 모습이 겹쳐졌다.
내가 그의 원고를 책으로 만들 수 있게 되었다는 게 참 멋진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날인가 별로 친하지도 않았는데 “형, 기운 내요!” 하면서 보내주었던 초코파이 한 박스(12개 들이 한 상자가 10개 들어있는 박스)가 떠올랐다.
박명균은 누군가에게 평생 기억에 남을 무언가를 주는 과자장수다. 자기를 누군가의 머릿속에 어떤 의미로 오래도록 기억하게 만드는 쫌 멋진 남자다.
이제 그의 두 번째 책이 나온다. 당신이 그 책을 읽게 된다면 당신도 끄덕일 것이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