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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슬로베니아

디어 슬로베니아

: 사랑의 나라에서 보낸 한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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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6년 05월 30일
쪽수, 무게, 크기 272쪽 | 150*210mm
ISBN13 9791186499283
ISBN10 1186499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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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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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베니아, 다정한 사람들과 가만히 마음을 주고 받는 곳
박형욱 (kaeti@yes24.com)
2017-01-25
떠나고 돌아오는 행위를 거듭할수록 분명해지는 게 몇 가지 있다. 매년 휴가의 마지막 날이면 시계를 아무리 노려봐도 묵묵하게 제 갈 길을 가는 시간이 야속해지지만 역시 가장 든든하고 고마운 건 돌아갈 보통의 날들을 등 뒤에 두고 하는 여행이라는 것, 도시의 느낌과 나라의 인상을 결정짓는 데는 사람에 대한 기억이 생각보다 크게 작용한다는 것, 우리 모두가 시한부 여행자이기는 하나 사실은 그렇게 조급해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그런 생각들이 깎이고 견고해지면서 여행은 점점 더 일상과 가까워지지만 오히려 낯선 공간에서 보내는 그 얼마간이 다음의 하루를, 일년을, 어쩌면 평생을 바꾼다는 것.
시인의 여행도 그런 생각들과 상당부분 닿아있다. 디어 슬로베니아는 한국문학 강의를 위해 슬로베니아로 파견된 시인이 그곳에서 보낸 92일을 담아낸 책이다. 전라도 크기의 국토에 인구 200만이 모여 사는 나라에서 보낸 세 달 가량의 시간. 그는 이 여행을 화려하거나 과장된 감정으로 포장하기보다 먹고 산책하고 누군가와 만나는 매일의 기록을 담백하게 들려주는 것으로 발칸의 이 작은 나라가 품은 매력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시인이 소개하는 슬로베니아Slovenia는 낭만적이다. 이름부터가 사랑love을 품고 있는데다 수도인 류블랴나에는 사랑스럽다는 뜻이 있단다. 류블랴나 곳곳에는 체코 프라하 성의 건축가로 잘 알려진 슬로베니아 출신 요제 플레치니크의 작품들이 산재해 있고, 그 위로 사랑하는 이들의 수많은 이야기가 흐르고 있다. 무엇보다 도시 중심에 자리한 프레셰렌 광장에서 주위를 둘러보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로맨틱한 도시를 마주하게 된다고 한다. 영화에서 본 붉은 지붕과 이국적인 노천 카페, 아름다운 야경과 종종 들려오는 길 위의 음악들까지. 책에 실린 사진들을 함께 들여다보고 있자면 그 순간 스스로가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사람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는 말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다.

책에서 느껴지는 슬로베니아의 또 다른 주요한 이미지는 ‘여유’. '특별한 계획을 세우며 많은 일들을 할 수도 있었겠지만 숨 가쁘게 살고 싶지 않았다. 무심하고 나른하게 쉬면서 지독히 게으름을 피웠다. 책을 읽거나 글을 쓰다가 몸을 쭉 뻗고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음악을 들었다. 지인들은 유럽의 다른 나라로 여행갈 수 있는 최적지에서 왜 그러고 있냐며 한심해했지만, 나는 정말로 아무것도 안 하면서 사는 방법을 터득한 사람처럼 그 적적하고 단조로운 시간을 즐겼다.' 일에 치여 만신창이가 된 심신으로 슬로베니아를 찾은 시인은 천천히 느긋하게 때로는 더할 수 없이 여유롭게 낯선 나라와 새로운 경험을 즐기고 그곳에서 건네 받은 에너지로 다음 걸음을 걷는다. 어떤 의미에서는 진짜 '휴가'다. 각자의 속도로 묵묵하게 걷되 틈을 두자. 가만히 있자니 영 불안하다면 덜 열심히 하는 정도로 시작해봐도 좋겠다.

마지막 하나는 사람이다. '류블랴나는 첫눈에 반할 만큼 눈부신 도시는 아니었다. 이 도시의 첫인상은 그저 작고 풋풋하며 아기자기하고 깨끗하다는 느낌 이상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성실하고 무덤덤해 보이는 슬로베니아 사람들 속에서 센티멘털하고 느리게 이 도시의 매혹을 느끼기 시작했다. (p.5)' 슈퍼마켓에서도 빵집에서도 약국에서도 먼저 말을 건네며 알은체를 하는 주민들, 거리낌없이 머물 공간을 나눠주는 이들과, 초행길을 가야 하는 여행자를 위해 기꺼이 동행자가 되는 사람, 떠나온 곳에서 문득 연락해 안부를 묻는 익숙한 사람들까지. 이방인이라고 해서 굳이 걸어 잠그지 않는 그 마음이 예쁘고 안녕을 묻는 인사가 고맙다. 그런 작은 배려와 관심이 여행자들을 그곳으로 다시 부르고 또 돌아오게 하는 건 아닐까?
슬로베니아, 호들갑스럽게 겉으로 티 내지 않아도 마음으로 다정한 사람들이 있는 그곳에 가자. 그리고 '너 지금 어디 있니?', '빨리 오라' 말해주는 내 사람들이 있는 이곳으로 돌아오자. 그리고는 또 다음을 준비하면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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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힐링’ 혹은 ‘위로’라는 말을 거의 쓰지 않는, 그것이 지닌 가식적인 느낌을 싫어하는 다소 까칠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곳에 온 후로 조금씩, 천천히 마음을 치유받았다. 바쁘게 뛰어다니며 불안하고 초조하게 살아온 지난 삶을 돌아보며 자족과 평화를 길어올렸다. 태생적 방랑자인 양 수없이 여행을 다니며 노마드적인 생활이 몸에 배어 있는 내가, 슬로베니아에서 고향에서조차 느낄 수 없었던 수수하고 평화로운 삶의 길을 발견한 것이다.(6쪽)

류블랴나 중심에 있는 프레셰렌 광장은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인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누군가를 기다리거나 단체로 사진을 찍거나 다채로운 공연을 펼친다. 특히 슬로베니아의 전체 산림 중 가장 곧고 크고 아름답게 자란 구상나무를 옮겨와 만든다는 대형 크리스마스트리와 조명이 설치되는 12월 초부터는 여느 이름난 대도시 못지않게 야경이 아름답다. 슬로베니아의 국민 시인인 프레셰렌의 동상 아래 계단에 앉아서 광장 주위를 둘러보면 나 자신이 마치 신비롭고 어여쁘며 다정한 세계로 들어온 느낌을 받곤 했다.(20쪽)

잠시 후 가이드가 동굴 벽에 붙어 있는 스위치를 켰다. 그녀는 세 명 의 관광객을 위해 몇 초간의 이벤트를 벌인 것이었다. 우리는 지하 계곡 아래로 떨어지지 않게 조심하라고 서로에게 말하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조촐하고 자유로운 느낌이 좋았다. 나는 나무줄기 같은 석순을 보며 가이드에게 말했다. “이건 곧 종유석과 만나 석주가 되겠네요. 내 새끼손가락 하나 정도 틈이 남았으니.” “맞아요. 석순과 종유석이 금방 만나 하나가 되겠군요.

아마 천 년이면 충분할 거예요.”“십 년도 아니고 천 년이요?”“예. 십 년 동안 0.1 밀리미터씩 자라니까요. 우주의 나이에 비하면 천 년도 짧은 거죠.” 모두 웃었다, 동굴 안에서. 너무 크게 웃으면 동굴 안의 생물들뿐 아니라 석주와 석순도 놀라니 살살 웃자고 했다. 내 내면의 불안과 어둠이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그 암흑이 빚은 시간 속에는 빛 속에서 볼 수 없는 놀랍도록 아름답고 무궁무진한 세계가 있으니까. 무엇보다 동굴 속처럼 어둡고 고독한 시간의 동력이 나를 성장시킬 것이다.(154쪽)

언덕길을 걸어 성 유리아성당 근처의 높은 곳에서 먼 바다와 집들과 광장을 바라보았다. 붉은색 지붕과 푸른 바다의 어울림을 한참이나 감상하다가 광장을 향해 난 길을 내려갔다. 해안 근처 베네치아풍의 작은 집에서 나이 든 남자가 정원의 올리브 나무와 레몬 나무 등을 손질하고 있는 걸 보고 웃어 보이자 그는 내게 레몬 몇 알을 따서 건네주었다. 바닷가에는 인기척이 거의 없었고 많은 어선과 요트가 정박해 있었다. 나는 그 근처 발코니가 있는 호텔을 올려다보며 언젠가는 저 방에서 며칠 머물 거라고 혼잣말을 했다.(170쪽)

소화도 시킬 겸 나는 혼자 정원으로 나와 달빛 아래를 천천히 걸었다. 울타리가 없어서 어디까지가 정원인지 알 수 없었다. 정원에는 꽤 큰 연못도 있었는데 어두워서 물고기는 보이지 않았다. 여남은 집들이 있는 마을은 쥐죽은 듯 조용했고 내가 있던 식당 쪽에서는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두 팔로 어깨를 감싸고 연못 옆에 쪼그려 앉았다. 가만히 귀 기울이니 수면 아래로 물고기들이 헤엄치는 소리가 들렸다. 보이지는 않지만 존재한다는 걸 알려주겠다는 듯이. 사과나무에는 사과 몇 알이 남아 있었다. 새가 파먹었는지 둥글지 않았다. 바람이 나뭇가지를 스쳐 나뭇잎을 흔들었다. 자연의 만물은 서로 맞닿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과 물고기처럼, 바람과 잎사귀처럼, 밤과 낮처럼. 혼자인 것은 없지만 고독하지 않은 것도 없으리라.(228쪽)

‘빨리 오라’는 문장을 보며 내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바닥에 있던 걸레로 눈물을 훔쳤다.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것처럼 막막하고 답답하던 시절, 나는 시 창작에 거의 모든 것을 걸었던 것 같다. 시를 쓰면 하늘로 치솟아 다른 시공간으로 가는 느낌이었고, 구원이란 것이 있다면 시를 통해 가능할 것 같았다. 썼던 시 원고들을 묶어 출판사 신인공모에 보내보았고 신춘문예에도 투고했지만 번번이 최종심에서 떨어졌다.

나는 문창과 출신도 아니고 시 창작 교실 근처에 가볼 기회나 의지도 없었으며, 친한 도반道伴이나 시인, 스승도 전혀 없었다. 진주라는 작은 도시에서 혼자 끙끙거리며 책을 읽고 글을 썼다. 그랬던 내가 2001년에 《포에지》의 첫 번째 신인으로 등단하게 됐다. 황현산, 김혜순 선생님이 당시 심사위원이었는데, 그때까지 나는 두 분을 단지 책으로만 알고 있었다. 내게는 등단이 재생이나 부활처럼 느껴졌다. 피폐하고 부정적인 자아가 죽고 새사람이 되어 다시 태어난 것 같았다.(270쪽)
__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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