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에 제시된 25개의 질문에 대해 “그렇다”, “아니다” 혹은 “때로는 그렇다”라고 대답할 뿐 더 이상 파고들지 않는 것이 낫다는 결론을 내리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성경이 왜 이런 대답을 건네는지에 대해 알고자 한다면 그런 식의 태도는 결코 유익하지 않다. 가장 난해하고 시급한 인생의 질문에 대해 피상적이고 간단한 대답은 우리의 영적 성장과 성숙을 지연시킬 뿐이다. 그리고 이런 문제에 대한 궁금증을 안고 우리를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유익을 끼칠 수도 없다. 하나님이 누구시고, 그분이 역사하시되 어떻게 그리고 왜 그렇게 역사하시는지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충분히 깊지도 실제적이지도 않다. 핵심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성경 속의 어려운 본문들, 난제들과 씨름해야만 한다. 그럴 때에만 사고하는 능력이 연마되고, 정신은 확장되며, 영혼은 풍성해지고, 마음은 위대하신 하나님과 구세주의 신비한 역사를 이해하게 되었다는 환희와 희열로 충만해질 것이다.---「서문」중에서
지역 악령의 존재에 대한 충분한 사유가 이루어졌다면 모든 사람이 다음으로 묻는 질문은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일 것이다. 영적 전쟁을 위해 우리가 받아들이고 추구해야 할 특별한 전략이 있을까? 성경 어디에도 우리가 지역 악령의 존재를 마주했을 때, 일상적인 귀신의 영향력에 대처할 때와는 다른 책임을 져야 한다는 언급은 없다. 지역 악령을 구분하고 그와 적극적으로 맞서 싸우라는 지시도 없다. 마치 특정한 지정학적 지역에 대해 그가 갖는 능력과 권세를 우리가 홀로 깨부술 수 있는 것처럼 지역 악령에 맞서거나 그를 책망하라는 명령도 없다.---「14장」중에서
따라서 사도적 메시지의 인증과 증거가 그런 신적 능력이 나타난 유일하고 배타적인 목적이었음을 증명할 수만 있다면, 이것은 은사중지론자가 되는 것이 좋은 이유에 속할 것이다. 하지만 신약 어디에도 기적과 은사의 목적이나 기능을 증거로 제한한 경우는 없다. 어떤 형태로 나타났든지 기적은 몇 가지 다른 분명한 목적을 성취했는데, 예를 들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찬가의 목적(마 15:29-31; 요 2:11; 9:3; 11:4, 40), 복음이 알려질 길을 예비하는 복음전도의 목적(행 9:32-43), 양들을 위한 긍휼과 사랑과 돌봄을 표현하는 목회적 목적(마 14:14; 막 1:40-41), 그리고 공동의 선을 위해 신자를 세우고 강하게 하는 세움의 목적이다(고전 12:7; 고전 14:3-5, 26).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것이다. 방언이나 가르침, 예언이나 긍휼, 병 고침이나 도움,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성령의 “모든” 은사는 무엇보다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고, 격려하고, 가르치고, 위로하고, 거룩하게 하기 위해 주어졌다. 따라서 증거와 인증을 목적으로 하는 기적의 은사들이 중단되었다는 주장을 백번 받아들인다고 해도, 위의 은사들은 앞서 언급된 다른 이유 때문에라도 교회 안에서 지속적으로 기능할 것이다.---「18장」중에서
두통이 심해 약장을 연 당신은 아스피린이라고 생각되는 약통을 집어들었다. 불행히도 그 약통에 붙어 있는 스티커는 이미 해진 지 오래다. 그래도 약효는 있었다. 두 알을 삼키고 15분이 지나자 두통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본 당신의 배우자가 당신이 삼킨 것이 사실은 타이레놀이었다고 이야기하는 게 아닌가! 이것 때문에 당신의 두통이 다시 되돌아올까? 아니다. 타이레놀의 약물적 가치는 단순히 당신이 그것을 틀리게 지칭했다는 이유로 감소될 수 없다. 그것을 아스피린으로 불렀다고 타이레놀 안에 들어 있는 물리적 성질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회심 후 성령을 경험하는 것의 실재는 우리가 그 사건을 이제껏 잘못 지칭해왔음을 알게 된다고 해도 전혀 약화되지 않는다. 바꾸어 말하면, 영적 “약효”는 여전히 유효하다. 문제는 이 경험이 실재인가이지, 그것을 무엇으로 부르느냐가 아니다. 개인적으로는 성령세례라는 용어를 모든 사람이 회심할 때 경험하는 것으로 제한하고 싶지만, 오순절주의자들이 이것을 후속적이고 좀 더 제한적인 능력 주심으로 적용한다고 해서 이런 현상 자체가 무효화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문제는 신약이 우리의 중생과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포함시키는 최초의 구원 역사와, 이것과는 신학적으로 구별된(늘 후속적이지는 않은) 역사, 곧 증거와 섬김과 영적 은사들을 위해 기름 부으시는 역사 모두를 지지하느냐 하는 것이다. 나는 그렇다고 믿는다.
---「19장」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