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여덟 해 행화춘풍 담았건만, 이제 더 이상의 봄은 맞이하지 못할 것 같았다. 윤 5월의 밤기운은 스산하기만 하였다. 겹겹이 덧댄 탁한 나무판으로 늦은 밤 춘풍과 초하의 바람마저도 스미지 못하였다. 아니, 그 일렁이는 봄의 끝자락도 아비는 허락지 않을 모양이었다. 허리 한번 펴지 못한 자세로 닷새째였다. 구부정해진 허리가 좁은 끝 모퉁이에 닿아 있었고, 모퉁이의 위로 직선으로 짧게 세워진 나무 벽에 다리가 제멋대로 겹쳐 있었다. 그것들은 이미 자신의 것이 아닌 먼저 죽은 것들이었다. 어둠 속에서, 잡귀도 피해 갈 좁은 뒤주에서 제 몸의 것으로 얼룩진 오물의 쓴 구린내를 맡으며 사내의 미친 웃음이 사방을 *섬연하게 만들었다.
저승사자를 기다리는 것이 이토록 가혹할 줄은 몰랐다. 시퍼런 칼날에 심장이 도륙당해도 이런 고통과는 견주지 못할 것이었다. 저려오는 사지의 고통을, 그로 인해 뼈 구석구석에 구더기도 아닌 무언가가 스멀스멀 기어 다니며 신경을 갉아먹는 듯한 이 오묘한 죽음의 전율은 그 뉘도 가히 상상치 못할 것이었다. 늘어진 손바닥에서 벌레들이 사내를 괴롭혔다. 그마저도 사내는 감각을 잃은 상태였다. 말라비틀어진 입술에는 이미 사자의 기운이 진하게 드리워져 있었다.
“하하! 하하하! 하하하하!”
또 한바탕 사내의 미친 웃음이 사방을 사로잡았다. 뒤주를 지키고 있던 금군들이 하나같이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두려움에 떨어댔다. 닷새째 물 한 모금 넘기지 못한 사람의 웃음이 아니었다. 실성을 하더라도 저런 웃음은 아닐 것이었다. 사내의 웃음은 한없이 가벼워 나비의 몸짓 같기도 하였으며, 더없이 힘차 장사도 쓰러트릴 기세였다. 웃음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나서야 금군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안도하였다.
그때였다. 창덕궁의 담을 넘어 홀연히 검은 사내가 나타났다. 사내는 미복을 하고 있었는데, 눈만을 제외한 나머지를 모조리 검은 천으로 가리고 있었다. 그 눈이 어둠을 밝히는 달보다도 섬뜩하게 빛났다. 검은 미복의 사내가 검을 움켜쥐고선 천천히 뒤주를 향해 걸음하기 시작하였다. 금군 몇이 뒤주를 에워싸며 소리쳤다.
“잡아라!”
시끌벅적한 소란에도 뒤주 속의 사내는 움직임이 없었다. 이미 한바탕의 미친 웃음에 기력을 모두 소진한 모양이었다.
미복을 한 사내가 검을 빼어 들고는 걸음을 빨리하여 몸을 날렸다. 제아무리 빼어난 무예를 지녔다 할지라도 무모한 짓이었다. 미복을 한 사내도 그것을 알고 있는 듯하였다. 미복의 사내 앞으로 금군 하나가 먼저 쓰러졌다. 창덕궁에 대장장이가 들어왔는지 쇳덩이 부딪치는 소리가 섬세하면서도 날카롭게 어둠을 가르고 있었다.
뒤주에 갇힌 사내가 그제야 귀에 고개를 맡기며 소리 나는 쪽으로 목을 뉘었다. 사내의 입술에 때 아닌 미소가 아리게도 스치었다.
‘미련하구나. 왔더냐? 어찌하여 온 것이더냐. 내 마음을 모르지는 않을 터.’
뒤주 속 사내의 말이 전해지지도 않았건만, 금시 이는 미풍에 웬 사내의 대답이 희한하게도 날아들었다.
‘저하! 소인이 왔사옵니다. 소인이 뫼실 것이옵니다. 예서 이리 저하를 보낼 수는 없사옵니다. 조금만, 조금만 더 참으시옵소서.’
쨍쨍하게 부딪치는 칼날 소리가 신경질적으로 더욱 빛났다. 그런 와중에도 뒤주 속의 사내와 미복 차림의 사내는 바람이 전해주는 무언의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어리석었느니라. 오지 말았어야 했느니라. 어찌하여 목숨을 그다지도 쉽게 내어놓는단 말이더냐. 그러지 말았어야 했느니라. 너는 살아, 너는 살아 그 사람을 지켰어야 했느니라. 이루지 못할 약조를 기다리는 그 미련한 사람을…… 너는 나를 대신하여 지켰어야 했느니라. 서우야! 어서 담을 넘거라. 도로 담을 넘으란 말이다.’
‘저하도 지키고 그분도 지킬 것이옵니다. 하오니 저하! 지금은 책망하지 마옵소서. 소인의 본분을 벌써 잊었나이까. 아무것도 모르나이다. 오직 이 몸의 주인만을 위해 살겠나이다. 그 주인은 오직 이선李煊 저하뿐이옵나이다.’
쩌렁쩌렁한 칼날의 부딪침 속에 또다시 뒤주에서 선의 목소리가 나풀거리며 미복을 한 서우에게 날아들었다.
‘지키지도 못할 약조를 기다리는 그 사람을 어찌하여 홀로 두고 왔단 말이더냐. 잊었더냐? 그 사람도 너의 주인이니라. 내가 담았으니, 그 사람만을 담았으니 그 사람도 너의 주인이니라. 어서 가서 그 사람을 지키어라. 어서! 그리하지 않으면 성을 낼 것이니라.’
선이 말라버린 침액을 겨우 삼키며 눈을 떴다. 자꾸만 감기려는 실눈이 따가워 쓰려왔다. 그러나 더 이상 서우의 대답은 날아들지 않았다.
서우가 선혈이 낭자하는 팔을 움켜잡으며 잠시 숨을 몰아쉬었다. 이리 보낼 줄은 몰랐었다. 이리 자신의 소생을 극악하게 보낼 줄은 서우도 몰랐었다. 그리하여 늦은 걸음이 후회스럽고 참담할 뿐이었다. 서우가 베어진 자신의 팔을 붙잡고 사방을 조심스레 살폈다. 그의 주위로 금군 몇이 벌써 쓰러져 있었다. 서우의 눈빛은 결코 죽지 않을 불사조의 그것과 흡사하였다. 온통 벌겋고 뜨거운 몸의 기운들이 눈빛으로만 스며들고 있었다.
그때, 서우를 에워싸고 있던 금군 하나가 그의 등으로 칼을 들이밀었다. 스윽! 기분 나쁜 소리와 함께 칼의 끝 날이 둔하게, 그리고 서서히 안으로 깊숙이 파고들었다. 서우의 고개가 비스듬히 뒤를 돌아보며 입가에 서늘한 미소를 담기 시작하였다. 그러더니 숨소리가 간헐적으로 크게 울려 퍼졌다. 그제야 뒤주 속에 갇힌 선에게 서우의 말이 날아들었다.
‘저하! 심려치 마옵소서. 저하, 저하…… 이 몸이 꼭 지키겠나이다. 그러니 저하…… 저하!’
선이 파르르 떨리는 실눈을 감아버렸다. 차마 떨어지지 않는, 말라버린 눈물이 야속하고 야속하여 쓴웃음만을 흐느끼며 고개를 돌렸다.
서우가 쓰러지려는 몸을 지탱하기 위해 검을 짚고선 서서히 아래로 한쪽 무릎을 꿇으며 주저앉았다. 그의 눈빛은 여전히 매섭게 살아 있었다. 서우의 몸속에서 검을 빼낸 금군이 주춤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이번엔 또 다른 금군이 서우의 앞쪽 가슴을 사선으로 그려놓았다. 뜨거운 피가 바닥으로 내려앉으며 푸석한 땅을 적시었다. 검을 잡고 지탱하던 서우의 손이 미끄러져 내리며 손바닥이 검의 날을 세게 움켜잡았다. 더 이상 서우의 손은 검에서 미끄러지지 않고 고정되었다. 그러자 간헐적으로 헐떡이던 서우의 숨소리가 잔잔히 잦아들었다.
‘저하! 저하…… 용서하소서. 먼저 가야만 하는 이 못난 소인을 부디……. 다음 생에서도 소인은 저하를 위해 태어날 것이옵니다. 그러니 저하…… 부디, 부디 그분과 저하를 끝내 지켜드리지 못한 소인의 죄를, 이 죄를 그때 단죄하소서. 그때는 꼭, 꼭…….’
그나마 움직임을 보였던 서우의 작은 몸짓이 멈췄다. 뒤주 안에서 선의 목소리가 침착하게 서우를 위로하였다. 보지 않아도 미리 예견이라도 한 듯 아프지 않고 고요하였다.
‘서우야, 서우야! 가더냐? 미련하다 그리 이르지 않았더냐. 하면 편히 가도록 하여라. 비록 만신창이가 되었다 할지라도 후세에선 고운 모습으로만 보자꾸나. 미안하구나. 미안하구나. 못난 나를 부디 용서해다오. 어찌 너를 용서하란 말이더냐. 그러나 그 사람은 어찌한다 말이냐. 속절없이 기다리는 그 사람은 이제 어찌한단 말이더냐. 서우야! 정녕 가더냐? 이젠 가더냐? 하면, 그 사람에게 전해다오. 사모하였다, 은애하였다 그리 전해다오. 구중궁궐 무거운 것들만 내려놓았던 이 몹쓸 나를, 그리하여 무거웠을 그 사람에게도 용서를 구해야 하지 않겠더냐? 그리 훨훨 날아 전해다오. 그리 훨훨 날아가거라. 너는 실로 좋은 동무였느니라. 참으로 좋은 벗이었느니라…….’
금군 두어 명이 혼백이 날아간 서우의 육신을 끌고 창덕궁 마당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이 더욱 검어지며 때 아닌 비가 떨어졌다. 그것은 춘우가 아니었다. 차가운 겨울의 문턱에서 내리던, 차마 떠나지 못하고 울던 추우秋雨였다. 그것은 지나온 세월을 말끔히 씻기에 충분하였다. 그럴 것 같았다.
떨어지는 가을비와 함께 저 멀리서 지켜보던 금박의 비단 치맛자락이 흙탕물을 쓸며 사라졌다. 비단 치맛자락은 뒤주와 멀어지며 애꿎은 원망과 한을 내리는 빗방울로 곳곳을 적셔놓았다. 치맛자락에서 떨어진 빗방울은 흙과 나뒹굴며 추하게 젖어들었다. 그러고는 무언가에 홀린 듯, 무언가의 책망으로 괴로운 듯 예를 중요시하는 궐 안에서 거의 뛰다시피 사라져 갔다.
‘나는 미치지 않았습니다. 나는 미치지 않았단 말씀입니다. 그대는 기억하세요. 내 차마 그대를…… 그대를 예법을 표하여 그리 부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리 부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대는 잊지 마세요. 지금의 나를, 이 모습을 잊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끝내 기억하셔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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