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괴상한 생각이 떠오르기도 한다. 이를테면, 전 독일 수상인 헬무트 콜도 나처럼 밤에 놀라 잠에서 깨어나 침대에 누운 채 땀을 흘리는 모습, 혹은 그가 매트리스에 서서 내 아들 녀석처럼 '통치!' 하고 소리를 질러대는 모습 같은 것 말이다. 그러면 그의 아내는 지금은 한밤중이고 '통치'를 할 수 없는 시간이라고 또박또박 말해 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계속해서 울부짖는다. '통치!' 결국 그의 아내도 체념을 하고 그를 집무실에 데려다 준다. 그러면 그는 책상 앞에 앉아 15분 정도 '통치'를 하는 것이다. 아내는 다시 그를 침대에 데려다 눕히고, '통치'를 하고 온 수상은 베개에 푹 파묻혀 만족한 얼굴로 잠이 든다. 1
--- p.17
내가 이처럼 멋진 진보라색 스웨터를 입은 연유에 대해 궁금하실 것이다. 지금부터 나의 저간의 사정을 얘기하겠다.(...)
그날따라 내 아내 파올라는 입을 옷이 도대체 하나도 없었다. 그런 날이면 그녀는 옷장 거울 앞에 서서 이옷저옷 꺼내어 입어 본다. 입을 것이 마땅치 않아 옷장에서 스커트며 스웨터들을 하나씩 꺼내 대보고 입어보다 보니, 정말로 입을 옷이 하나도 없게 되었다. 그녀의 옷장에 즐비한 옷들은 하나같이 도저히 봐줄 수가 없는 것들이었다. 그녀는 이제 거울 앞에 서서 물끄러미 얼굴을 바라보더니 자기가 못 생겼다고 한다. 이렇게 못생긴 자기를 나는 어떻게 봐주며 살아가느냐고도 했다.
그 말을 듣자 덜컥 어떤 가책 같은 감정이 밀려왔다. 나는 그녀에게 모처럼 멋진 옷을 사주겠다고 했다. 우리는 아주 유명한 의상 디자이너가 하는 부티크로 찾아갔다. 매장 안은 어쩐지 텅 빈 느낌을 주었다. 나는 유명 디자이너가 최근에는 별로 아이디어가 없나 보군, 굉장히 근사한 것을 찾다가 다른 것들도 제대로 만들지 못한 모양이로군, 하고 생각하다가 언젠가 로리옷(1923~, 독일에서 사랑받는 유명한 만화가, 작가이자 배우-역주)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유명한 요리사가 있는 식당에는 가짓수가 얼마 안 되더라는 경험담이었다.
유명한 옷가게 점원은 대뜸 커피부터 내왔다. 그리고 저 뒤편 어딘가에서 스커트며 블라우스, 허리띠와 코트, 구두 따위가 점원들 손에 들려 등장하기 시작했다. 파올라는 이것저것 입어보고 신어 보았다. 그녀는 폭이 좁은 옷, 풍성한 옷, 긴 옷, 짧은 옷들을 입고 벗고 하더니 푸른 옷을 입고 나와 내게 물었다. "당신이 보기엔 어때?"
"마술같군. 멋진대!" 나는 대답했다.
"괜히 그러지 마. 파란 옷을 입으면 난 창백해 보이는 걸."
그녀가 말했다. 이번에는 보라색 옷을 입은 그녀가 다시 내게 물었다. 나는 "굉장히 예쁜데!"하고 감탄했고, 그녀는 "으으음... 아냐"라고만 했다. 그러더니 그녀는 베이지색 옷을 입고 내게 또 물었다. "그럼 이건?"
"야아, 그게 좋네. 아주 멋있어."
"당신은 뭐든 다 좋다고 하지?"
"아냐, 정말 예뻐."
"아휴."
이번에는 노란색을 물었고, 나는 다르게 대답해 보였다. "그건 별로야."
"그래? 난 마음에 드는데. 하지만 당신이 별로라면 나도.."
그 유명한 옷가게 점원이 다시 커피를 내왔다. 내가 축구를 생각하기 시작한 건 아마 이때쯤이었을 것이다. 파올라를 기쁘게 해주려고 나왔지만, 막상 지루하고 무심해진 자신을 질책했다. 그러다가 나는 세금 제도에 대한 생각을 했고, 다시 자신을 꾸짖었다. 지금 네 눈앞에는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여자가 옷을 고르고 있다. 그런데도 너는 세금 제도나 떠올리고 있니? 그러다가 다시 악랄한 프로쉰스키에 생각이 미쳤을 때 파올라가 빨간 옷을 입고 내 앞에 섰다.
"귀여워 보이는데." 내가 말했다.
이번에는 파올라가 냉소했다. "그런데 값이 얼만지 알아?"
"어, 얼마면 어때. 우리 그걸로 사자." 나는 절망적인 심정으로 속삭였다.
"안돼. 이렇게 비싼 건 사기나 다름 없어."
나라면 점원이 그렇게 여러 번 커피를 내오고 어딘가 나를 주눅들게 한다는 이유만으로도 충분히 아무 옷이나 사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파올라는 옷을 갈아입고 나오더니 나를 출구로 이끌었다. 입어 본 산더미 같은 옷들을 점원에게 남겨 둔 채로 말이다.
"이러면 안 되잖아. 저 많은 걸 다 입어 보고 하나도 안 사는 건..." 나는 말끝을 흐리며 점원에게 겁을 집어먹은 자신을 다시 비웃었다. 하지만 파올라는 기분 전환이 되었으니 그걸로 충분하다며 앞장 서 걸었다.
걷다가 남성복을 파는 가게가 나오자 파올라는 내 등을 떠밀었다. 나는 노란색, 초록색, 빨가색의 갖가지 옷들을 품평하느라고, 또 자신을 이래저래 질책하느라고 이미 녹초가 되어 있었기에 아무 생각없이 집히는대로 진보라색 스웨터를 입어 보았고, 그게 바로 여러분이 보고 있는 이 옷이다.
"그거 아주 좋은데, 여보."
"뭐야.. 우린 당신 옷 사려고 나온 거잖아."
"아, 뭐" 아내가 말했다. "난 옷 필요 없어."
--- pp 19~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