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쇼핑에 대한 새삼스러운 사실들을 배운다. 쇼핑은 1퍼센트의 영감과 99퍼센트의 합리화라는 것부터, 내가 산 것들은 늘 분별과 후회 사이에서 갈등하게 만든다는 것, 때로 연애나 스포츠, 비즈니스보다 더 큰 힘으로 동기를 부여하거나 빼앗고, 자극하거나 낙담시키며, 정체성을 지탱하거나 제한한다는 것, 결국 시간처럼 차라리 삶 자체를 판단한다는 것까지. 하지만 나는 어떤 자기 성찰도 쇼핑 경험보다 못하다고 믿는 속물이라서 지갑을 열 수밖에 없다. 사고 싶은 걸 안 사면 내 돈이 외로워할까봐.
--- p.6, '머리글' 중에서
사람들은 스스로 아주 자유로우면서 이성적인 소비자라고 생각한다. 일상의 모든 것을 자발적으로 선택하는. 그러나 세일 때만은 아니다. 세일은, 한 발 비켜서서 보면, 필요하거나 사고 싶었던 게 아닌 ‘싼’ 물건을 사는 행위지만, 다른 사람들이 원하지 않았던 것들을 거두는 일일 뿐이다. 한바탕 유행했던 팬츠를 눈 돌아가도록 싸게 산다고 해도 그건 이미 한물간 것이다. 결국 세일 매장을 배회하는 이들은 백화점도 어쩌지 못했던 재고를 치워주는 호의적인 소비자에 불과하다.
물론 우린 다들 미적지근한 일상을 확 뒤집을 횡재수를 그리워하는 가련한 존재들이다. 그토록 원하던 캐시미어 재킷이, 그것도 딱 맞는 사이즈가, 4만 원짜리 가격표를 붙인 채 눈앞에 있을 확률, 즉 잭팟을 터뜨릴 확률은 극히 드물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도박꾼들은 잔뜩 취할 수밖에 없다.
--- p.28, '세일, 현대의 마법' 중에서
우주의 질서가 불길하게 삐꺽대는 토요일, 마음속의 반란을 확장시키는 3시였다. 이대 서브웨이 앞에서, 마리 앙투아네트가 입으려다 만 것 같은 울퉁불퉁 패딩 코트를 입고 그녀가 나타났다. 대학 졸업식 날 레이스 달린 투피스를 입었던 그녀도 벌써 아이가 둘이었다. 겨울 내내 이 코트만 입었어,라고 그녀가 말했다. 나는 패딩의 실용성을 따지지 않기로 했다. 우리가 원하는 건 가벼운 커피 한 잔과 트레인 스포팅이었다. 우린 오늘 관광객이야. 아무 데서나 방심한 듯 막 사버리는 거야.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는 말은 하지 말기.
--- pp.71~72, '새벽에서 황혼까지' 중에서
중독이란 게 무엇이든 한 가지만 줄곧 생각하는 어떤 열정적인 상태라면, 아주 멋진 거라는 생각도 든다. 그렇다면, 쇼핑중독자들은 열심히 번 돈을 소비함으로써 자신을 개선하는 동시에 사회 경제가 굴러가게 만드는 사람들이며, 쇼핑백에 희망찬 내일을 담는 사람들이며, 영원히 정열을 불태우는 사람들이며, 쇼핑만이 시든 욕망에 다시 불을 당길 수 있다는 걸 너무 잘 아는 순수한 사람들이 아닐까? 굳이 그들과 나를 위로하는 말이긴 하지만…….
--- p.98, '쇼핑중독자들의 비밀' 중에서
사실 쇼핑이 너무나 고통스럽다면 두 가지 옵션과 맞닥뜨려야 한다(방법을 찾기만 한다면 정책 입안자들이나 정치 사색가들을 매료시킬 것이다). 율리시스가 사이렌의 노래에 굴복하지 않기 위해 배를 돌린 것처럼 아예 쇼핑하지 않거나, 하더라도 아주 조금만 하는 것.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괴로운 건 매장에서 지갑이 다 털렸는데도 다음 날 또 쇼핑하며 살아가리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가끔 우긴다. 돈은 쓰라고 있는 거고, 헛된 소비의 기쁨도 없이 어떻게 살아가느냐고, 그게 오히려 현명한 소비라고.
--- p.109, '쇼핑 게임에서 이기는 방법' 중에서
옛날 어른들은 말했다. 볕이 잘 드는 앞뜰이라면 오동나무보다 대추나무를 심으라고. 어울리는 것들이 제자리를 찾을 때 신성한 융합이 이루어진다. 물론, 베라 왕 드레스를 입지 않아도 지구는 잘만 돌아간다. 엉뚱한 부분의 솔기가 핼무트 랭의 장기란 걸 몰라도, 밴드나 줄무늬 간격에 민감하지 않아도 삶은 달라지지 않는다. 제대로 고른 화이트 셔츠가 인생을 바꿔놓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차디찬 부엌 타일 벽에 비스듬히 기대 서 있을 때조차 어느 순간 주의를 끌게 만드는 것이 패션인 것이다. 여전히 잔혹한 변덕 위에 매달려 있다고 해도…….
--- p.149, '패션은 왜 피곤한가' 중에서
‘아내’ 말고 ‘여자’에게 예산 내에서만 쇼핑하라는 것은 부모가 허락한 남자하고만 사귀라는 말과 똑같다. 그래서 현자(賢者)들은 여자에게 신용카드를 맡기지 말라고 충고한다. 1년의 어느 때가 되면 여자들은 쇼핑에 더 노골적이 된다. 중요한 모임은 좋은 옷을 원한다. 그건 해가 바뀌기 전에 남자를 만나리라는 희망 쇼핑이자, 초라한 나를 위해 지갑을 여는 거부할 수 없는 이유이다. 점원들에겐 무릎을 꿇고서라도 더 팔아야 하는 고객이지만, 남편에게는 기회만 있으면 돈 쓸 궁리부터 하는 여편네들은 세일 때 쇼핑한 것 가지고도 핀잔하는 남자에게 역습한다. “오늘, 내가 오히려 얼마나 돈을 많이 벌었는지 알기나 해?”
--- pp.188~189, '그 여자 그 남자가 ‘사는’ 법' 중에서
워낙 난이도가 높은 패션과 화장품을 소비하는 도시의 스트레이트 남자들은 교양과 취향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갖추고 있었다. 중요한 건, 섬세한 남자들의 제한된 ‘남성적 뷰티’가 아니라, 보통 남자들의 평균적 약진이다. 구찌 쇼 모델처럼, 배까지 풀린 단추 사이로 보이는 희미한 복근과 매끈한 뺨, 부드러운 몸통을 가진 남자들의 메시지는 단순하다. 꾸며라, 더 꾸며라. 그들은 원시 남자 조상만큼 단단한 남성적 확고함을 이미 지녔으니 더 이상 그것을 증명하는 데 인생을 낭비할 필요도 없다.
--- pp.191~192, '새 나라의 남자는' 중에서
아무튼 나는 로고 전쟁에서 빠지고 싶다. 퀵 아저씨 오토바이에 부딪혀 쓰러졌을 때 사람들이 내 셔츠를 보고, 세상에 파코 라반 씨가 다쳤어,라고 할까봐(그 회사가 나에게 자사 광고 모델이 되길 원한다면 비싼 모델료를 감당해야 할 거다). 그래서, 눈에 확 띄는 원산지 표기나 고집스러운 메시지도 안 보이고, 성적으로 소구하지 않으면서도 신중해 뵈는 로고 없는 제품을 보면, 가격도 합리적이란 믿음까지 덩달아 생긴다. 가끔, 스스로 일용할 생활 일습들을 만들었던 옛날 가내 수공업 시대가 그립다. 동력을 이용한 산업혁명이 광범위한 완제품 공급의 사슬을 갖추게 했지만, 옛날 사람들이야말로 산업에 예속되지 않은 순결한 디자이너들이었다. 그렇다고 나더러 동대문에 가서, 가는 면사와 지퍼, 단추, 리본과 핑킹 가위, 핀 박스를 사서 내 취미에 맞는 옷을 직접 지어 입으라고 하진 않으시겠지.
--- p.220, '이미테이션, 진짜 가짜'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