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라디오에서 소설 낭독이나 시 낭송을 듣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런데 나는 단 한 번도 그 낭독이나 낭송에 만족해본 적이 없다! 늘 저렇게 읽으면 안 되는데, 나라면 훨씬 더 잘할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든다. 결코 내 솜씨가 세상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하기 때문은 아니다. 그것은 완전히 다른 어떤 것을 뜻한다. 그것은 텍스트 해석이 온전히 독자 혹은 텍스트 낭독자인 나의 몫이라는 걸 의미한다. 그가 무엇을 하든 간에, 그의 재능이 어떤 것이든 간에, 나에게 책을 읽어주는 그 독자는 나에게만 속하는 뭔가에 대한 욕구를 완전히 해소시켜주지 못한다! 책은 나에 의해 읽히기 위해 쓰인 것이고, 시는 나에 의해 암송되기 위해 지어진 것이다. 그것들이 요청하는 것은 나의 목소리, 나의 해석이다.
--- p.16, ‘1장 이야기 하나 해주세요’ 중에서
프랑스 문학에서 가장 위대한 작가 겸 지리학자는 분명 쥘 베른이다. 그는 발자크의 작품과 양적으로 버금가는 64편의 소설을 썼다. 이 두 거장을 비교해보면 분명 아주 흥미로운 결과들이 나올 것이다. 역사는 전쟁, 폭력, 그리고 잔혹함으로 점철되어 있다. 셰익스피어의 연극이 극도로 어두운 것은 거기서는 모든 것이 역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거기서 어느 정도의 명성을 덤으로 얻는다. 왜냐하면 검은색은 깊이의 심연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흔히 “검은색은 언제나 화려하다”고 말하지 않는가). 반면, 작가 겸 지리학자는 모험을 통해 놀라운 것을 발견하는 아이의 열정에 사로잡혀 있다. 그가 만나는 풍경의 아름다움은 그와 그의 독자가 얻는 보상이다. 쥘 베른의 소설을 읽는 것보다 더 신나는 일은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그 점을 비난한다. 사람들은 오로지 외부로만 향해 있는 그의 관심을 못마땅하게 여긴다. 그의 소설을 읽을 때 우리는 말라르메의 섬세함, 프루스트의 분석과 대척점에 서게 된다.
--- p.36, ‘2. 위대한 작가이자 뛰어난 지리학자, 쥘 베른’ 중에서
셀마 라게를뢰프가 쓴『닐스의 모험』. 그 책이 가죽 장정의 눈부신 모습으로 내 무릎 위에 놓여 있다. 나는 일터에서 돌아오는 길에 생 제르맹 앙 레에 있던 내 방으로 그것을 가져다주셨던 내 아버지를 떠올린다. 1932년, 그러니까 내가 아홉 살 되던 해였다. (…) 나에겐 마스코트나 다름없는 그 책은 단 한 번도 내 곁을 떠나본 적이 없다. 그것은 전시의 이사, 약탈, 폭격, 평시의 강도와 화재를 무사히 견뎌냈다. 그것은 내가 소장하고 있는 책 목록 가운데 넘버원이다. 사실 난 그 책을 통해 문학에 입문했다. 나는 그 책을 통해 처음으로 위대한 텍스트가 어떤 것인지 발견했고,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뭔가 훌륭한 일을 한다면, 그것은 그 책과 비슷한 것이 되리라는 것을 예감했다.
--- p.83, '6. 닐스의 모험을 창조한 작가,셀마 라게를뢰프’ 중에서
우리가 로스톱친을 거론하는 것은 그가 아이들을 위해 많은 소설을 쓴 세귀르 백작부인의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그의 동포들, 하물며 로스톱친 백작 자신은 거기서 받아들일 수 없는 패러독스를 보았을 것이다. 작가들의 특권이란 그런 것이다. 현재는 분명 정치가들에게 속할 수 있다. 하지만 미래는 작가들의 것이다. 폴 발레리는 이렇게 쓴다. “오늘날 사람들은 스탕달과 나폴레옹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어느 누가 감히 나폴레옹에게 언젠가 사람들이 스탕달과 나폴레옹이라 말할 거라고 말할 수 있었겠는가?”
--- pp.134~135, ‘11. 러시아에서 온 동화작가, 세귀르 백작부인’ 중에서
교사였던 마르셀 파뇰의 아버지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아나톨 프랑스는 정말 위대한 작가야! 그의 작품은 어느 구절이든 아이들에게 받아쓰기를 시킬 수 있다니까.” 한 작가의 영광이 학교에서 활짝 개화된다는 점에 대해서는 나 역시 전적으로 동의한다.『방드르디』는 - 교실에서 읽히기 때문에 - 나를 ‘고전적인’ 작가로 만들어놓았다. 그것이 바로 ‘고전’에 대한 최고의 정의가 아닐까? 물론 외국어 번역본의 수를 인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 참가하는 출판사와 계약도 저작권도 없이 책을 찍어내는 출판사, 즉 해적들을 구별해야 한다. 그런데 ‘해적’은 물질적으로는 작가에게 해를 입히지만 정신적으로는 그에게 가장 아름다운 왕관을 씌워준다.
--- p.169, ‘12.나의 로빈슨 이야기, 미셸 투르니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