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서부터 조숙한 편이었는지, 불과 다섯 살밖에 안 된 아이일 때부터 나는 또래의 아이들에게 주어지는 한정된 공간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구에 시달렸다. 미지의 세계를 찾아서 담을 기어 넘어가 길을 따라 내려가곤 했는데, 이상하게도 내가 꿈꾸던 '미지의 세계'는 항상 주위에 아무도 없이 혼자 앉아 있을 수 있는 외딴 곳이었다. --- p.29, '서문' 중에서
그때의 감동이란! 그 독특한 자연 경관은 내 기억 속에 영원히 각인되어 결코 잊혀지지 않을 것 같았다. 마치 어렸을 때부터 꿈꾸어 왔던 조용한 황야 지대를 그제야 비로소 찾아낸 것 같았으며, 험난한 순례를 마치고 오랜만에 그리던 고향으로 돌아온 듯한 심정이었다. --- p.32, '서문' 중에서
그리하여 우리가 짐이나 수행원은 물론 운송 수단도 없이 가려는 곳이 도대체 어디일까 궁금해했을 테지만 그곳이 바로 티베트이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 부디 그의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금단의 땅 '눈의 나라'를 향해 길 떠나는 나의 다섯번째 여정이 영광의 빛으로 충만하도록 기도해 준 그의 따뜻한 마음에도 축복이 함께 하기를! … 바야흐로 모험은 시작된 것이다.
이번 여행은 폐쇄적인 '눈의 나라' 티베트로의 입국을 시도하는 나의 다섯번째의 출발이었다.
--- p.44, 제1장 '티베트 국경을 넘다' 중에서
나는 그 노인에게 어렸을 때부터 믿어온 신앙을 떠올려보라고 말했다. 또 이번 생에서의 남은 삶에 연연해하기보다는 순례 길에서 죽은 사람들이 갈 수 있는 첸레지의 땅(눕 데와 첸, 즉 인간 세계에서 서쪽으로 10만억 국토를 지난 곳에 있다는 극락-지은이에서 누리게 될 행복한 재생을 생각해 보라고 조언했다. 거기서는 몇천 년 동안이나 평안하고 행복한 윤회를 거듭할 것이며, 정신이 깨달음의 최고 경지에 도달하면 더 이상은 삶도 죽음도 없는 자유를 얻게 될 것이라고.
--- p.101, 제2장 '카 칼포 산을 떠나 순례단과 만나다' 중에서
여담을 덧붙이자면, 티베트에서는 나그네에게 길을 가르쳐주거나 길을 잃고 헤매는 사람을 바른 길로 안내해 주는 행위를 종교적 관점에서 칭찬받아 마땅한 일로 간주한다. 그러나 순례자나 라마승에게 고의로 길을 잘못 가르쳐주거나 그들이 길을 잃고 헤매는 것을 보고도 방관하는 죄악을 저지르면 죽은 다음에 비참하고도 어두컴컴한 바르도(죽음과 환생 사이-옮긴이에서 방황하게 되며, 어떠한 세계에서도 다시 태어날 수 없다고 여긴다.
--- p.164, 제3장 '아름다운 누 계곡을 여행하다' 중에서
화가라면 이 티베트 농가의 멋진 경치를 소재로 한 폭의 아름다운 풍경화를 그려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회색빛이 나는 커다란 바위를 배경으로 황금빛 이파리를 달고 있는 나무들과 농가가 어우러져 조화를 이룬 모습은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집 앞에는 맑고 투명한 살윈 강이 평화롭게 흐르고 있었는데, 가장자리에 살짝 얼어붙은 살얼음이 마치 강을 장식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제껏 이곳까지 들어와서 지금 내 발 밑을 흐르고 있는 이 강물을 본 서양인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황량한 불모 지대와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높이 솟아 있는 거대한 절벽 사이를 구불구불 흐르고 있는 이 살윈 강의 모습을 말이다.
--- pp.181-182, 제4장 '살윈 강을 따라 이어진 마을들' 중에서
아! 그 순간의 내 심정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그것은 감동과 실망이 뒤섞인,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강렬한 느낌이었다. 우리는 찬탄과 놀라움과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골짜기로 둘러싸인 길을 걷는 동안에는 전혀 볼 수 없었던 엄청난 광경이 순식간에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왼쪽으로는 광막한 설원이 펼쳐져 있었으며, 아득한 그 고원의 끝에는 청록색 빙하와 순백의 만년설로 뒤덮인 봉우리들이 보였다. 오른쪽으로는 완만한 언덕길로 이어진 넓은 계곡이 지평선 끝에 솟아 있는 봉우리들을 향해 일직선으로 뻗어 있었다. 정면으로도 서서히 솟아오르는 광대한 고원이 아득히 먼 곳까지 이어져 있었는데, 그 끝이 고개의 정상인지 아니면 끝도 없는 다른 고원으로 연결되고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 p.222, 제5장 '대빙하와 데오 고개를 넘다' 중에서
고요한 순백의 대설원 속에 파묻힌 채 아득히 먼 곳에서 보일 듯 말 듯한 작은 흑점 하나가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작은 곤충 한 마리가 거대한 널빤지 위를 온 힘을 다해 기어오르고 있는 것 같았다. 지금까지 '눈의 나라' 티베트에서 장엄하고 위압적인 광경에 눈을 빼앗긴 적이 한두 번만은 아니었다. 그러나 높은 봉우리들과 빙하로 둘러싸인 이 광막한 공간에 비해, 신기루와도 같은 이 환상적인 공간을 탐험해 보겠노라고 단둘이 이곳을 찾은 여행자의 모습은 너무나 작고 나약해 보였다.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깊은 비애감이 가슴속 저 밑바닥에서부터 솟구쳐 올라왔다.
--- p.224, 제5장 '대빙하와 데오 고개를 넘다' 중에서
나는 눈을 녹여서 끓였다. 이번에도 점심을 대신해 그것을 마실 수밖에 없었다. 만일 약간의 버터와 두세 줌의 짬파만 있었어도 그것들을 물과 함께 끓여 먹고 기운을 차릴 수 있겠지만, 아무런 풍미도 없고 그저 뜨겁기만 한 맹물은 위를 자극하기만 할 뿐이었다.
나는 머릿속의 생각을 입 밖에 내어 "산에 사는 신들이여!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호두알만큼의 버터나 베이컨을 내려주십시오!"라고 농담 섞인 기도를 했다. 용덴은 그가 곧잘 짓곤 하는 독특한 시선으로 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왜? 왜 그런 눈으로 보지?" …
내가 그에게 물었다.
"베이컨이 그렇게 소원이시라면 제가 '산신령'이 되어 드릴 수도 있는데요."
용덴이 주저하듯 말했다.
"무슨 말이지?"
용덴이 웃기 시작했다.
"제츤마, 어머님은 어느 모로 보나 이젠 틀림없는 티베트 여인으로 보이지만, 역시 이런 경우에 티베트 여인들이 어떻게 하는지는 모르시는군요."
"얘기해 봐. 보따리에 먹을 거라도 남아 있다는 말인가?"
"그럼요. 방수를 위해 신바닥을 문질러대던 베이컨 한 쪽과 어제 신발 밑창에 대고 남은 가죽 조각이 있죠."
그가 장난처럼 말했다.
"그럼 그걸 모두 냄비 속에 집어넣고, 소금이 남았으면 그것도 조금 넣고 끓이도록 하지."
내가 명랑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내 안에서 진짜 티베트인의 정신이 살아난 것이다.
반시간 정도 뒤, 우리는 맛으로 따지면 별 볼일 없지만 적어도 텅 빈 위장은 다소나마 만족시켜 줄 탁한 국물을 음미하고 있었다. 크리스마스 축제는 그렇게 계속되었다.
--- pp.281-282, 제6장 '폴롱 창포의 수원지를 탐험하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