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키메데스는 근무 시간 중에 목욕을 했던 것일까?”
생각하는 일은 정해진 시간의 틀 안에 맞추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주어진 근무 시간 동안 정신 노동을 하라고 하는 것은 짜낸 치약을 다시 용기 안에 집어넣으라는 것과 같다. 시울라는 어제의 시간 관리 방식을 오늘에 적용하려는 시도에 대단한 무리가 따른다고 지적한다. “현대 일터에서 가장 불만스러운 것은, 결과가 아니라 들인 시간에 따라 보상을 받는다는 점이다. 시간 지향보다는 과제 지향이 보다 자연스럽다.”
정보 통신 기술은 산업 사회의 모델과 보다 쉽게 결별할 수 있는 토대를 닦았다. 노트북 컴퓨터, 인터넷, 휴대 전화는 사람들이 어디서든 원하는 때 일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정보 통신 기술 때문에 노동자들은 보다 더 혹사당하고 언제나 일에 매이게 될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시울라 역시 “첨단 기술 때문에 우리는 365일 24시간 일하게 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글쎄,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정보 통신 기술 덕분에 365일 24시간 일하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는 원할 때 일할 수 있게 되었다. 천천히 하루 종일 일할 수도 있고, 공원에서 실컷 산책한 뒤 미친 듯이 해치울 수도 있다. 9시에서 5시까지 일할 수도, 밤 12시에서 새벽 5시까지 일할 수도 있다. 오전 6시 12분부터 오전 9시 37분까지, 오전 11시 5분부터 오후 1시 24분까지, 오후 2시 2분부터 오후 2시 17분까지, 오후 4시 15분부터 오후 7시 58분까지 언제든 가능하다. 그건 전혀 중요하지 않다. 미국의 작곡가 이라 거슈윈Ira Gershwin은 “하루치 일감을 받았다. 우선 타자기의 리본부터 갈아야겠다”고 농담한 적이 있다. 작곡가의 하루치 일이 얼마만큼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의 오페라 「포기와 베스Porgy and Bess」는 단 하루 사이에 완성되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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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일에 마음이 끌린다. 그리고 일을 하고 싶다. 하지만 그렇다고 노예처럼 끌려 다녀도 좋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자율적인 노동자로서 일에 가슴과 영혼을 담으려 한다. 그 대가로 시간에 대한 통제권을 원한다. 이미 수 세기 동안이나 빼앗겨 온 시간을 되돌려 받고 싶은 것이다.노동 시간을 줄이기 위한 길고 지루한 캠페인에 합세하자는 말은 아니다. 그런 캠페인의 기본적 사고방식은 일터에서 보내는 시간 동안에는 당연히 다른 사람의 지시대로 움직여야 하고, 따라서 통제할 수 있는 시간을 늘리려면 가능한 한 노동 시간을 줄여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훨씬 더 중요한 것을 원한다. 일터 바깥에서 보내는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는 관심 밖이다. 실상 일터에서 보내는 시간처럼 재미있는 시간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침 9시부터 저녁 5시까지 일하고 싶지 않다. 이제 우리는 각자 자기 시간을 통제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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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은 현대인의 삶에서 중심적인 지위를 차지한다.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일은 이전 어느 때보다도 중요해졌다. 드라이 클리닝에서 기저귀 갈기, 섹스에서 스트레스 상담, 소풍에서 기도 모임에 이르기까지 일은 모든 것을 포괄하는 새로운 공동체이다.
앞으로 일은 우리에게 점점 더 중요해질 것이다. 일은 자신을 규정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우리가 배우고 성장하게 하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또 동료와 친구, 연인에게 둘러싸여 만족스러운 시간을 보내도록 하는 원천이다. 물론 이런 경향에 대해 눈살을 찌푸리는 사람도 있다. 일이 중요해지는 것을 위험하게 여기는 이들이다.
일이 이토록 중요하게 되었다면 “개인이나 가족, 혹은 공동체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까?” 혹은 “우리는 일의 진격에 맞서 싸워야 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생겨날지 모른다. 물론 답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이러한 공포는 일에 대한 낡고 잘못된 시각을 반영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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