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에서 만든 유료공연장
1902년 여름, 또 하나의 실내공연장이 지금의 신문로 새문안교회 자리인 야주현에 생겨 큰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이 실내공연장은 무엇보다 광대들이 세운 게 아니라 국가에서 세운 것이어서 반향이 더욱 컸다. 그 뒤 이 건물은 1908년부터 이인직, 김상천, 박정동 등 민간인들이 임대해 원각사로 이름을 바꾸고 운영하다가 1914년 화재로 소실되고 말았다. 지금도 통칭 원각사라고 불리는 이 공연장은 흔히 유사 이래 최초의 제대로 된 극장으로 중요시되고 있다. 그만큼 공연장다운 공연장으로서 한국 연예의 요람기를 장식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 본문 중에서
관아에서 풀려나온 기생들
기생은 조선왕조의 붕괴와 함께 발생한 새로운 여성계층을 말한다. 즉, 궁궐에 속해 있던 기생을 비롯해 유흥가, 소리패, 색주가 등에서 소리와 춤, 연주를 생업으로 한 기생들 또는 개인적으로 불려 다니면서 소리와 춤을 전문으로 한 기생들을 말한다. 이러한 기생들의 주요 활동무대라 할 수 있는 요정들이 속속 등장하면서 기생사회는 한국사회 전반에 명암이 교차하는 영향을 끼쳤다. 그중에서도 전통연희, 특히 서울소리와 춤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고리로 연결되었다. 그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그것이 그들의 주요 생활수단이었기 때문이다. --- 본문 중에서
사설극장 시대가 열리다
광무대, 단성사, 연흥사, 장안사는 문을 열면서부터 구극만 공연했다. 한국 극장의 발자취에서 선구적인 역할을 한 이 공연장들은 그것만으로도 획기적이었다는 평을 듣기에 족했다. 국권을 상실한 상태에서 대중을 대상으로 한 공연장으로 등장했고, 전통예인들을 무대에 올림으로써 실의에 빠진 관중과 호흡을 같이했던 것이다. --- 본문 중에서
인기 있는 유행가 가사집, 소리책
가사집歌詞集은 1910년대와 1920년대에 걸쳐 많은 종류가 발간되었으며, 대부분 중판을 거듭한 베스트셀러였다. 만약 당시에 악보까지 쉽게 출판할 수 있는 기능이 있었다면 잡가집에는 당연히 악보도 첨부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결같이 가사만 싣고 있으며, 또한 가사에 어려운 한문구가 많이 등장하는 노래도 모두 한글로만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대중이 쉽게 읽고 외울 수 있게 하기 위한 배려였던 것으로 보인다. --- 본문 중에서
대중스타의 탄생 명창 재담꾼 박춘재
박춘재와 고종은 농담을 주고받을 만큼 친숙했다고 한다. 어느 날 한 화가가 임금 앞에서 대나무를 그리고 있었는데, 마침 옆에 있던 박춘재가 “저쪽 가지는 장구채로 좋겠다”는 말을 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고종과 박춘재가 바로 소리로 맺어진 관계였다는 점이 강조된 이야기라 할 것이다. --- 본문 중에서
직업적인 놀이패인 사당패
전통연희가 연예로 변해가는 과정에서 별로 눈에 띄지 않으면서도 다른 어떤 계층, 이를테면 기생집단이나 광대패들보다 더 절실하게 시대의 변화에 적응해나가려 한 계층이 바로 사당패이다. 흔히 사당패 하면 남사당을 연상하지만, 여기에서 말하는 사당은 여자들로 구성된 떠돌이 놀이패를 말한다. 그들은 소리나 춤을 주무기로 해서 이 마을 저 장터를 떠돌아다니며 의식주를 해결했다. 전통사회에서 밑바닥 유흥에 종사하는 여성들이 흔히 그랬듯이 그들의 행적 중에는 매춘도 있었다. --- 본문 중에서
권번기생과 명월관 시대
기생들이 예능인으로 인정받고 사회진출의 폭이 넓어지게 된 것은 그들의 주 활동무대인 요릿집이 성업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생들이 요릿집을 무대로 삼아 재능을 발휘하게 된 것은 이즈음이었다. 여기에는 권번의 설립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권번은 기존의 기생조합을 일본식으로 표기한 것이지만 조합보다 훨씬 상업성을 띠는 사업체였다. 기생과 요릿집과 권번은 새로운 사회에 등장한 신종영업이었지만 마치 삼위일체처럼 적시에 앞뒤가 맞아떨어진 시대의 산물이었다. --- 본문 중에서
또 다른 연예무대 라디오
방송이 막 시작된 초창기의 이야기다. 라디오가 차츰 시민들에게 보급되고 듣는 이가 늘어갈수록 방송국에 불리어나오는 예술가의 인기가 높아가자 제일 먼저 일어난 문제는 기생들의 방송이었다. 이때의 연예방송은 주로 기생들이 불리어나와 남도소리, 서도소리, 경기소리 등을 흥겹게 불렀었다. 그런데 처음에는 마이크에 대고 방송을 하면 혼이 빠져서 명줄이 짧아진다며 잘 안 나오던 기생들도 차차 얼굴을 내밀게 되니 나중에 가서는 자연 경쟁이 붙기 시작했다. --- 본문 중에서
스타들의 경연장이 된 유성기판
유성기판이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온 것은 1890년대인데, 해방 전까지 판매된 종류는 약 5,000종에 이른다. 유성기판에 녹음하여 판매했던 것룀로는 전통소리를 비롯한 서양음악, 연극대사, 만담, 변사의 영화해설, 시낭송, 찬송가, 동요, 창가, 그리고 유행가까지 다양했다. --- 본문 중에서
재담의 아들 만담, 만담의 아들 코미디
만담은 연극의 막간무대에서 출발했다. 막간은 장면이 바뀌는 시간을 말한다. 짧은 시간이지만 지루할 수도 있는 관객을 배려하여 막이 오를 때까지 희극에 능한 배우가 나와 짧은 우스갯소리를 했는데, 그것이 의외로 큰 호응을 얻자 별개 분야가 된 것이다. 만담의 주도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연출가이자 극작가이며, 배우이기도 했던 신불출申不出이었다. 1930년대에 신불출은 만담 하나를 잘해서 조선팔도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 되었다. 그가 가는 곳마다 청중은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그의 만담은 신기할 정도로 대중을 하나로 아우르는 마력을 발휘했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