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나는 깨어지기 시작했다..
53 )
부흥을 향한 갈망이 나를 사로잡았다
59)
무엇 때문일까
왜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을까?
우선은 내 생각 깊은 곳에 드리워져 있는 종의 의식 때문일 것이다.
어차피 종이 아니던가?
어차피 그분이 주인이 아니신가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믿는 구석이 있다.
나의 기도가 부분적이고 연약해서 응답받지 못했을지라도 그 기도를 시키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면, 그 기도는 분명히 하나님 나라를 위해 어떤 용도로든 쓰임 받을 것이다.
성도들의 기도에 더해지는 또 다른 향연을 통해서.
62)
교회에서 받은 퇴직금으로
가족들의 비행기 표를 끊고, 이삿짐은 배로 부쳤다.
세 식구가 12월말에 한국에 도착했을 때
우리 수중에 남은 것은 40 달러가 전부였다.
집은커녕 방 한 칸도 없는 가운데,
하나님이 주신 비전만 붙잡고
한국으로 돌아온 것이다.
64)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주신 본질적인 갈망 중 하나는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과 목적, 내 삶의 데스티니(destiny·운명)를 찾고자 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는 그것을 찾고자하는 본능적인 갈망이 있다. 왜냐하면 사람은 그것을 찾을 때에만 진정한 만족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65)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비전은 우리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의미와는 사뭇 다르다. 성경은 비전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성경적인 의미의 비전.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다. 자신으로부터 생겨난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을 이끌어 하늘을 가리키며 비전을 보여주신 분은 하나님이셨다. 아브라함 스스로 자신의 비전을 만든 것이 아니다. 비전은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이지, 자신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86)
모든 것은 거룩하다.
거룩하지 않은 것은 없다.
거룩한 사람에게는.
93)
소명의 첫 번째 징조는 ‘그 일에 완전히 빨려 들어가는’ 욕망이다.
105)
비전과 소명의 차이는 무엇일까
일반적인 성도에게는 하나님께로부터 바로 비전이 임할 수도 있다. 뮤지컬 배우에 대한 비전이 직접적으로 주어질 수 있다. 교수에 대한 비전이 바로 주어질 수도 있다. 축구 선수에 대한 비전이 직접적으로 부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전임사역자들은 비전을 받기 전에 먼저 소명을 받는 단계를 거친다. 하늘로부터 내가 모든 삶과 시간을 드려 주님을 섬기는 전임사역자로 부르심 받았다는 소명이 필요하다. 이것이 우선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 자신의 비전을 찾아 나아가야 한다.
소명이 다른 직업이 아닌 전임사역자로 주님을 섬길 것에 대한 확증이라면, 비전은 그 소명의 바탕과 범주 안에서 구체적으로 내가 섬길 영역이 무엇인지를 계시적으로 확증 받는 것이다. 나의 비전이 지역교회인지, 선교 단체인지, 가정사역인지, 기독교 저술가인지 등에 대한 구체적인 확증이 필요한 것이다.
전임사역자는 소명을 확인한 후 반드시 비전을 찾아야 한다.
106)
바울이 주님께서 자신을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셨다는 것을 확인한 것은, 회심과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고 난 후 약 12년이 지난 후였다.
집중된 기도가 필요하다. 금식을 하든 철야를 하든 하나님을 향해 갈망하는 마음으로 집중하여 기도해야 한다. 돋보기처럼 기도해 보라. 돋보기는 아무 것도 아니다. 특별하게 귀한 것도, 비싼 것도 아니다. 그러나 돋보기가 한 곳에 초점을 맞추고 움직이지 않고 집중하면 돋보기를 통해 태양빛이 모여 결국은 불이 붙게 된다. 이 불은 어떤 때 거대한 산불로 번질 수도 있다. 이러한 집중된 기도가 필요하다.
147)
지난 25년 동안의 여정.
결코 평범치 않은 여정이었다.
기질 자체가 평범한 것을 싫어하는데다, 모험심도 많아 항상 새로운 것을 추구하면서 비저너리(visionary)로서 살아 온 삶이었다. 한 시즌이 끝나고 다른 시즌이 시작될 때마다 내 삶은 극심한 성장통을 겪으면서 허물벗기를 해나갔다. 비전을 보고서는(혹은 비전을 봤다고 생각될 때는) 기존의 삶에서 약간 궤도를 수정하는 정도로는 결코 만족 할 수 없었다. 과거의 모든 것을 던져 버리고 전혀 새로운 미지의 영역으로 뛰어들었다. 때로는 무모하리만큼.
165-166)
우리가 때때로 주님의 음성을 들을 때, 거기에는 그 상황에 대한 주님의 정보만 담겨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마음도 함께 담겨있는 경우가 있다. 그때가 그랬다.
“아무 메시지도 나누지 않는 것이 너의 메시지다”라는 음성을 들었을 때, 내 마음에는 흥분이 일기 시작했다. 주님의 마음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다음 세대를 일으키려는 주님의 마음.
아비 세대의 희생과 깨어짐을 발판으로 다음 세대를 일으키려는 주님의 마음.
...
그날 밤, 나는 집에서 아내와 함께 이 감동을 나누었다.
“여보, 이것이 주님의 전략이야. 수많은 청년들에게, 다음 세대에게 이와 같은 방법으로 주님께서 그들을 세우기 원하신단 말이야. 이것이 주님의 전략이라고
아비 세대의 자발적인 헌신과 깨뜨림. 그것을 바탕으로 다음 세대가 일어나는 거야! 그들은 아비 세대가 자신들을 세우기 위해 어떠한 희생을 했는지 지켜보면서, 그 유업을 가지고 일어나는 거야! 이것이 주님의 전략이라고!”
나는 흥분하여 아내와 이 얘기를 나누었다.
행복했다.
눈물이 나왔다.
그날 밤 나는 아내와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면서 주님께서 주시는 행복과 설렘으로 쉽게 잠을 이룰 수 없었다.
231)
긍휼.
그것이 모든 것을 말해 준다.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 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 9:16)
지난 10년간 이 말씀은 나의 좌우명이었다.
젊었을 때는 하나님의 긍휼이 무엇인지 잘 몰랐다. 그저 내 열심과 노력으로 매달리면 되는 줄 알았다. 그게 아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긍휼로 말미암는다. 그것이 모든 것을 이루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기도한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