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덕누덕 기운 듯한 피부의 소녀’의 언니들과 다른 귀여운 소녀들은 ‘보이지 않는 사람’을 보기 위해 아름답게 치장을 합니다. 이것은 ‘보이지 않는 사람’을 보기 위한 최악의 방법입니다. 아름답게 치장함으로써 소녀들은 자신의 겉모습을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 봐 달라고 하고 있는 셈이지만, 이 사람은 공교롭게도 모든 것의 겉모습을 ‘보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 점이 유럽의 신데렐라 이야기에 나오는 왕자님과 매우 다른 부분입니다. 인디언은 아마도 유럽의 왕자님에 대해 참으로 정신적인 수준이 낮은 바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왕자님은 겉모양으로만 이루어진 세계를 욕망의 눈을 통해 보려 하고 있습니다. 다행히 신데렐라의 성격이 좋았기 때문에 실패는 하지 않았지만, 이런 왕자님은 절대로 세계의 진실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사람’이 손에 넣으려고 하고 있는 것은 아름다운 영혼입니다. 인디언의 사고 안에서 아름다운 영혼은 고도의 초능력을 갖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이 가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름다운 영혼은 겉모양에 현혹되는 걸 피할 수가 있습니다. 아무리 겉모양이 아름다운 것을 봐도 그 속에 어떤 영혼이 숨어 있는지를 아는 겁니다. ‘보이지 않는 사람’은 그것을 ‘누덕누덕 기운 듯한 피부의 소녀’ 안에서 발견합니다. ‘누덕누덕 기운 듯한 피부의 소녀’는 확실한 후원자도 없으며 작고 병약하며 더럽고, 재와 검댕과 먼지를 뒤집어쓴 상태이지만, 그녀는 아무런 어려움 없이 ‘보이지 않는 사람’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영혼의 소유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녀가 ‘보이지 않는 사람’을 만나러 갈 때 한껏 치장을 했습니다. 이 치장이 또한 매우 귀엽습니다. 인디언의 뛰어난 유머 감각을 느낄 수 있습니다. 결코 아름다운 모습은 아닙니다. 헐떡거리는 아버지의 신발을 신고 나갑니다. 헐떡여서 신발을 질질 끌어 헐떡거리는 소리를 내며 걸어가는 겁니다. 게다가 방금 잘라온 자작나무를 벗겨서 그걸로 옷을 만들어 걸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기묘한 차림을 하고 ‘보이지 않는 사람’의 집을 향해 간 셈인데, 여기에서도 세밀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주도면밀하게 신데렐라 이야기를 반전시키고자 하는 섬세한 배려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누덕누덕 기운 듯한 피부의 소녀’는 아버지한테서 헐떡거리는 모카신(moccasin: 구두의 시초로 여겨지는 것으로, 북아메리카 인디언이 털가죽으로 만들어 신던 신발―옮긴이)을 받습니다. 이것은 신데렐라가 받은 요정의 구두를 반전시킨 것입니다. 요정의 구두는 신데렐라의 발에(신데렐라의 발에만) 딱 맞습니다. ‘딱 맞는다’는 것에는 어쩐지 에로틱한 느낌이 따라다니는데, 여기에는 중국의 전족纏足과 같은 성적인 의미가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게다가 작은 신발입니다. 유리구두, 은으로 수가 놓인 신발, 금으로 된 신발. 어쨌든 전부 화려한 신발들입니다.
그런데 ‘누덕누덕 기운 듯한 피부의 소녀’가 신은 신발은 아버지가 신던 신발입니다. 너무 커서 헐떡거렸기 때문에 물에 적셔서 작게 만들었는데, 물에 적셔서 작게 만드는 이런 행위도 구두가 딱 맞는 상대를 찾아서 임금님 일행이 전국을 헤매는 장면과 관계가 있습니다. 요컨대 모든 것이 패러디인 셈입니다.
이렇게 헐떡거리는 신발을 신고 처음으로 그녀는 ‘보이지 않는 사람’의 집을 향해 떠납니다. 여기서도 ‘신발’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신데렐라는 작고 아름다운 신발을 신고 무도회에 갑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그녀와 왕자를 맺어주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도 이 신발이었습니다. 미크마크판 신데렐라에서도 신발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형태도 기능도 전부 반전된 형태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요정한테 받았으며 새것이고 딱 맞으며 다른 누구에게도 맞지 않는 신발’이 ‘아버지한테 받았으며 헌 것이고 헐떡거려서 자신에게 맞지 않는 신발’로 반전되어 있습니다.
요컨대 이 미크마크판 신데렐라 이야기는 세부 사항에 이르기까지 주도면밀하게 페로판 신데렐라를 반전시켜서 만들었습니다. 이런 반전이 이루어질 때는 이따금 메시지의 반전이 일어납니다. 여기에는 인디언의 결혼 철학이 나타나 있는데 그런 철학은 유럽판 신데렐라에 나타나 있는 사고방식과는 매우 이질적인 것입니다. 전세계에 분포되어 있는 신데렐라 신화는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수많은 층의 모든 레벨 사이에 존재하는 중개기능을 온 힘을 다해서 발견하고자 하는 것으로, 결말에 해당하는 결혼에 의한 해피 엔드도 그런 중개의 한 형태에 불과한 것이었을 겁니다. 그것이 유럽의 민화로 변형되자 다른 중개기능을 이용해서 오로지 사회적 중개기능인 결혼이라는 해피 엔드로 몰아가려는 경향이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화의 내용 전체가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것에 대한 욕망’에 의해 오염되어 버렸다고 인디언은 생각했던 게 아닐까요?
이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에서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 발견된 이 소녀가 초능력을 지닌 여동생의 손에 의해 화상의 흉터가 지워지고, 불에 그을어서 오그라든 머리카락도 그녀의 빗질에 의해 곱게 변해, 세상에 둘도 없는 아름다운 여성이 된 것을 보고, “뭐야? ‘보이지 않는 사람’ 역시 예쁜 여자를 좋아하잖아?”라고 비꼬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한마디 덧붙이겠는데, 여기서 거론되고 있는 ‘아름다움’은 별이나 들꽃이나 동물과 같은 아름다움을 의미하는 것으로, 인간의 화장이나 치장에 의해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또한 이런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은 누구에게나 숨어있는 것이므로 여러분 부디 안심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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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신화에는 각각 나름대로 지향하는 바가 있습니다. 그것은 공간과 시간 속으로 퍼져서(흩어져서라는 표현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본래의 연관성을 잃어버린 듯이 보이는 것에 대해 상실된 연관성을 회복시키는 것이고, 상호관계의 균형이 심하게 깨진 것에 대해 대칭성을 회복시키고자 노력하는 것이며, 현실 세계에서는 양립이 불가능해진 것에 대해 공생의 가능성을 논리적으로 찾아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신화는 의례나 신비주의에 근접하게 되는데, 신화는 이 세계의 현실 속에서 그런 원시 상태의 실현이 가능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열광적이기를 요구하는 종교와는 커다란 차이가 있습니다. 신화는 모든 것의 구별이 사라지는 세계의 실현 같은 건 바라지도 않습니다. 다만 그것에 대해 사고하고, “이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결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며, 앞으로도 아마도 영원히 존재하지 않으리라고 생각되지만, 그것에 대해 정확한 관념을 갖는 것은 우리의 현재 상태를 올바로 판단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어떤 상태를 제대로 알 수 있기”(레비 스트로스가 즐겨 인용하는 장 자크 루소의 말)를 바라며, 신화의 꿈은 완성되어 왔을지 모릅니다.
신화는 종교의 열광과는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듯합니다.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신화는 비합리적인 논리를 매우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내부로 깊숙이 들어가 보면 비합리의 경계선 바로 앞까지 접근하면서도 그 선을 넘어버리는 일은 없습니다. 사고의 힘이 철저하게 작용해서 신화를 이성(이성이라는 말을 확대해서 사용하기로 하겠습니다)의 영역에 묶어두고 있습니다. 이런 특징은 국가라는 형태가 갖추어지지 않았던 사회에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국가의 탄생은 인간의 삶에 일종의 해결 불능의 비합리 내지는 부조리를 초래하게 되었지만, 그것이 출현하기 이전, 즉 사람들이 아직 자신들이 만들고 있는 사회가 안고 있는 부조리를 사고의 힘에 의해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시대에는, 인간은 신화를 통해서 부조리의 본질을 생각하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이런 의미에서도 신화는 최초의 상태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신화는 철학과 마찬가지로 절대로 타산적이 되거나 여론을 의식하거나 하지 않고 인간에게 나아가야 할 올바른 길을 가르쳐 주기 위해 노력해왔습니다. 신화에서는 철학과 윤리가 일체가 되어 있습니다. 나는 그것을 ‘야생의 에티카’라고 부르고 싶은 유혹에 사로잡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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