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궤변인듯 하지만 현실이고 현실인듯 하지만 궤변이지요. 궤변 반, 현실 반인데요. 어쩌면 이런 말 자체가 궤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살아남은 가장 큰 이유는 자본주의의 사망을 선고한 『자본』의 출간이라는 풀이가 전혀 설득력 없는 것은 아닙니다. 어쨌든 선생님께서 『자본』을 발표한 뒤 자본주의가 엄청난 변신을 한 것은 사실이니까요. 선생님은 『자본』을 세상에 내놓았을 때 자본가들은 물론 대다수 먹물들이 무시했다고 말했지요? 아닙니다. 표면상 그랬던 것뿐이지요. 적어도 자본가들은 겉으론 무시했지만 『자본』이 내린 자본주의 사망 선언에 경악했어요. 당연히 생존하려는 본능이 무섭게 타올랐지요. 내부적으로 그 책을 분석해 철저히 대책을 마련했습니다. 자본가들은 무궁무진 지니고 있는 돈을 무기로 자본주의를 살려나갈 대책을 마련하기 시작했어요. 자본가들이 대책을 세우는 데 돈을 뿌릴 때마다 그 둘레에 먹물들이 들꾀며 경쟁적으로 자본주의를 옹호하고 나섰습니다. 그 결과입니다. 간단히 말씀드리면 공황을 피하려고 자본의 논리에 정책적으로 개입해 들어갔어요. 상품 판매시장을 인위적으로 늘렸지요. 노동자들의 임금도 적절하게 올렸고요. 더 많이 소비할수록 행복하다는 이념 아닌 이념이 대중의 일상생활을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무어보다 노동자들의 단결을 가로막으려고 일부를 중산층으로 포섭해갔습니다. 노동자들의 정치참여도 혁명을 예방하는 데 필요한 정도만큼 보장해주었어요."
마르크스가 눈을 가늘게 감으며 얼추 빈정거리는 미소를 띠었다.
"무슨 말인지 이해할 것 같소. 솔직히 내가 가장 우려했던 것도 바로 그 점이었다오. 배고픈 가난뱅이들은 부자들이 빵 부스러기를 눈곱만큼 나눠주더라도 인생의 은인으로 여기게 마련이라오. 자신이 가난한 근본적인 이유가 부자들에게 있다는 사실을, 그들이 나눠주는 빵 부스러기는 본디 자신이 마땅히 가졌으야 할 몫의 극히 일부라는 사실을 깨닫기는 쉬운 일이 아니오."
"그렇군요. 생전에 예견하셨군요."
"뭐, 예견이랄 것까지는 없소. 다만 내가 『자본』을 집필하던 시절 이미 그런 조짐은 엿보이기 시작했소. 아니, 불길함은 예전에도 있었다오 노동자들이 잃을 것은 쇠사슬뿐이라는 글을 쓸 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오. 아, 어쩌면 이 문장을 읽은 저들이 노동자들에게 '잃을 것'을 준다면? 그때는 어떻게 될까... 삶은 누구에게나 하나일 터인데, 삶을 조금이라도 즐길 가능성이 있을 때 혁명의 전선으로 선뜻 나서기란 어려운 일이 아닐까... 개개인에게 삶의 일회성은 당연한 말이지만 대단히 중요한 문제라오. 그때 난 창 밖의 어둠을 응시하며 생각했소.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인류의 새로운 세대가 그 난제와 씨름하겠지, 그리고 장애를 넘어서겠지... 그렇게 믿었다오."
--- pp. 290∼291
칼은 누구에게도 쉽사리 하지 않은 속마음까지 진지하고 엄숙하게 털어놓았다.
"감히 자부하지만 나는, 이 세상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이어 칼이 한 말은 지금도 그날의 부드러운 음성 그대로 떠오른다. 가슴에 계율처럼 새겼기 때문이다. 아마 청년도 그러지 않았을까.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있어요. 사사로운 이해관계에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쉽지 않아요. 단호한 결심이 필요하지요. 모든 편견이나 집착을 떠나 공정하게 사물을 바라보는 눈을 지니도록 노력하세요. 그러면 누구나 똑같은 결론에 이르리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혹 그게 무엇일지 짐작이 가나요?"
웅숭깊은 눈으로 청년을 바라보았다.
"선생님, 혹시 사회주의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칼의 눈빛 가득 물기가 번져갔다.
"그래요. 바로 그겁니다."
--- pp. 158∼159
"한 가지만 말해줄게. 내가 너에게 마르크스주의자인지 아닌지 밝힐 이유가 하나도 없어. 그건 사상검증을 하겠다고 나서는 냉전세력이나 공안검사의 질문이야. 기자의 질문은 아니지. 너, 류선일. 아무리 네가 평생 밥 먹고 살아온 신문사가 그렇다고 너까지 이렇게 철저히 뒤틀렸을지 난 상상도 못했다. 나를 그렇게 해서라도 몰아쳐서 너의 응어리가 풀린다면 그렇게 해. 하지만 그렇지 못할걸. 네 평생 그냥 호의호식하며 지금까지 지내왔듯이 앞으로도 그러고 싶거든 조용히 그저 그렇게 지내. 내가 네게 개인적으로 시비 걸지 않듯이, 너도 내게 시비 걸지 말고, 알았니?"
--- pp. 32∼33
"선배, 그런데 말야.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는 것! 그건 솔직히 축하할 일은 못 돼. 아니, 애도할 일이지. 선배의 사고가 대학 시절 이래로, 그래 1970년대 초에서, 더 이상 커가기를 중단했다는 뜻이거든. 화석처럼 굳어진 생각, 그걸 미화한 것 따름이야. 이제 은유법을 벗어나 분명하게 말해줄까? 좋아. 선배의 컬럼은 지금 위기야. 그것은 그저 좌파를 상업주의에 이용해 적당하게 인기관리를 해나가는 포퓰리즘에 지나지 않아. 그러니 제발 그만 쓰쇼. 절필하란 말이오!"
선일은 '절필하라'는 대목에서 탁자를 주먹으로 두들겼다. 쾅! 쾅! 쾅! 판결을 내린다는 '시위'였다.
어쩌면, 아니 명백히, 치밀하게 준비한 공격이었다.
"많이 취했군."
어색하게 미소를 그리며 말했다.
"천만에! 취하지 않았어. 선배. 그렇게 우아하게, 그렇게 슬픈 척 미소짓지 말아! 그 모습은 스무 살 순수한 젊은이들에나 어울려. 역시 하나도 변하지 않았군!"
말을 끊더니 나를 노려보았다. 술판이 수상함을 감지해서일까. 어느새 그의 옆자리에 와 앉은 현이 나를 보며 한쪽 눈을 찡긋 감았다. 참으라는 걸까. 슬픈 미소에 동의한다는 걸까.
"선배, 제발 어줍잖은 미소일랑 거두쇼. 얼버무리지 말고! 똑바로 날 봐. 형이 칼럼에서 결국 하고 싶은 이야기가 대체 뭐요? 선배는 결국 의자에 앉은 마르크스주의자 아니오? 그건 마르크스주의자도 진보주의자도 아니야. 형이야말로 수구세력이지. 형이 믿는 세력이 누구야? 도대체! 대한민국 노동자? 형! 진정으로 노동계급을 믿어? 아니야. 암, 아니고 말고. 그들도 더 이상 마르크스에 귀기울이진 않아! 왜 그런지 알아? 그들은 삶 자체에서 타고난 리얼리스트, 냉철한 현실주의자들이기 때문이지. 형처럼 배부른 관념주의자가 아니야. 게다가 형이 마르크스주의자임을 감추며 써나가는 칼럼은 정말 싸구려 희극이야. 더 이상 보기 싫소. 왜냐면? 지나치게 단순해! 구역질이 난다니까!"
--- pp. 26∼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