훌륭한 가르침의 사례 몇 가지
#1. 나는 맥크론이라는 선생님에게 불어를 배웠다. 나이가 지긋한 맥크론은 매력적인 선생님이었다. 그녀는 빅토르 위고라면 사족을 못 썼다. …… 우리에게 그의 작품을 읽어줄 때면 그녀의 목소리는 감동에 젖었다. 그녀는 그의 소설도 잘 알았다. 나는 그녀 덕분에 『바다의 일꾼들』을 알게 되었고, 바다 속 동굴의 세계를 볼 수 있었다. 그 속으로 깊이 다이빙 해 들어가 여전히 숨을 헐떡이던 나는 차가운 촉수가 손목을 감싸는 것을 느꼈다. …… 빅토르 위고를 떠올릴 때면 그녀의 얼굴은 일순 밝아졌고 목소리는 조용히 떨렸다. 그녀의 수업을 들으면 누구라도 빅토르 위고가 위대한 문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 pp.42-43
#2. 로버트 브라우닝이 다섯 살 때 그가 책을 읽는 아버지에게 무엇에 관한 책을 읽고 계시는 거냐고 물었다. 호메로스의 서사시를 읽고 있던 아버지가 대꾸했다.
“트로이의 함락에 대한 거야.”
“함락이 뭐예요? 트로이는 또 뭐고요?”
이럴 때 대개 아버지들은 아마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트로이란 아시아에 있는 도시 이름이란다. 어서 가서 기차 가지고 놀렴.”
하지만 브라우닝의 아버지는 달랐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바로 그 거실에 트로이를 세우기 시작했다. 테이블과 의자로 도시를 건설했다. 그리고 그 위에 왕이 앉을 안락의자를 올려놓더니 어린 브라우닝을 앉히면서 말했다.
“이게 트로이야. 너는 트로이의 왕 프리아모스야.”
그가 발판 밑에 앉아 있는 고양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 보자. 여기 트로이의 헬레나가 있어. 아름답고 세련된 여성이지.”
그가 말을 이었다.
“밖에 보면 마당에 두 마리 개가 있잖아. 늘 안에 들어와서 헬레나를 잡으려고 기를 쓰지. 그들이 바로 서로 으르렁거리면서 싸우는 아가멤논과 메넬라오스야. 그들이 헬레나를 잡으려고 트로이를 함락시키지.” 아버지는 이런 식으로 가능한 한 아들의 관심을 끌 수 있도록 그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 브라우닝이 일고여덟 살쯤 되었을 때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일리아드』의 번역서를 읽으라고 주면서 될수록 빨리 그 책을 그리스어로 읽기 시작해보라고 격려했다. 브라우닝은 아버지가 나날의 즐거움만이 아니라 평생 써먹을 수 있는 자산을 주었으며, 나이에 알맞게 자극을 부여했다는 점에서 슬기로운 교사라고 평가했다. --- pp.287-288
#3. 예수는 어떤 의미인가를 담고 있는 수많은 행동을 해보임으로써 가르쳤다. 그 행동이란 상징일 수도 의례일 수도 있었다. 예를 들어 그는 결혼이나 음주에 대해서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요한복음에 나오는, 그가 행한 첫 번째 기적은 결혼식의 피로연을 거들려고 포도주를 만들어낸 것이었다. 결혼과 음주를 인정한다는 사실을 이보다 더 극명하게 말해줄 수는 없다. 그리고 그가 체포되기 전에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가르친 교훈은 빵과 포도주를 나눠먹는 의식이었다. 그는 거기에 영원불멸의 심오한 의미를 담았다. --- p.231
#4.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의 저자 부르크하르트(1818~1897)가 르네상스 시대의 문화와 예술에 대한 강의를 할 때면 회화, 시, 이탈리아, 그리고 젊고 희망에 차 있는 온화한 시절에 대한 넘쳐나는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강의가 너무 좋아 학생들이 이따금 앙코르를 요청하면 그는 그날 저녁에 그 강의를 고스란히 되풀이했다. --- p.274
#5. 19세기의 유명한 생물학자 토머스 헉슬리(1825~1895)의 강의는 논리적인 조직화의 결정판이었다. 지난번에 다룬 내용을 개괄하는 것으로 시작된 강의는 거의 관련성이 없어 보이는 두세 가지 자연현상을 날카롭게 분석해나가다가 마지막 10분을 남겨놓고 그 모두를 한데 결합시켜 그들 간의 유사성을 보여줌으로써 자연은 ‘아무 계획 없이 이뤄진 게 아니다’라는 인식을 학생들에게 자연스럽게 심어주었다. 또 빠르고 빼어난 솜씨로 칠판에 조직을 그려 귀와 눈으로 배울 수 있게 하였다. --- p.265
#6. 빙하설의 창시자인 루이스 아가시(1807~1873)는 강의도 잘 했을 뿐 아니라 전문 과학자를 양성하는 데 뛰어났다. 그는 실험실의 학생들에게 난이도를 높여가며 과제를 내주어 과학자들에게 필수적인 관찰 능력을 길러주었다. …… 고달픈 숙제를 끝냈는데도 아가시는 학생을 칭찬하지 않았다. 몇 마디 격려하는 말조차 삼갔다. 대신 그는 학생에게 뼈조각을 한 무더기 쏟아주면서 그것으로 뭘 할 수 있을지 알아보라고 했다. 학생은 그 뼈를 살펴본 뒤 (턱뼈를 통해) 수많은 다른 종의 물고기 뼈임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것을 조합해 골격을 제구성하기 시작했다. 두어 달이 지났을 때 그는 마침내 그 일에 성공했다. 아가시는 이번에도 그를 칭찬하지 않았지만 그에게 한층 더 까다로운 과제를 내주면서 관찰하고 비교해보라고 시켰다. 하지만 이거야말로 학생이 기대할 수 있는 최고의 칭찬이었다. ‘너는 차츰 유능한 과학자가 되어가고 있다’고 말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 pp.266-268
나쁜 가르침의 사레 몇 가지
#1. 내 동료 하나는 그렇게까지 별난 괴짜는 아니었지만, 새로 책을 쓰거나 강의를 시작할 때면 번번이 고통과 회의에 시달렸다. 자신이 권위자로 인정받고 우상으로 여겨지는 분야에서조차 그랬다. 학창시절의 기억 때문이었다. 그는 대차게도 한 선생님에게 ‘내가 어떤지 말해달라’고 요구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그 선생님이 대뜸 이렇게 대꾸했다.
“넌 기초가 약해!”
내 동료는 누구라도 어떤 부분에서는 기초가 약할 수 있고, 그리고 실제로 비평가들은 그에게서 그보다 훨씬 더 심각한 결점을 발견하기도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어렸을 적에 선생님한테 들은 그 말은 기세 좋게 그의 기를 꺾어버렸고, 좀처럼 회복되기 어려운 상처를 남겼다. 그는 한동안 그 말의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그는 지금까지도 선생님이 과연 그 말을 심각하게 한 것인지 그냥 무심코 던진 것인지 궁금해 한다. --- pp.65-66
#2. 런던 대학의 교수 A. E. 하우스먼이 저지른 가장 터무니없는 실수는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을 잘 못 알아본다는 것을 무슨 자랑이나 되는 양 떠벌인 것이다. 학생들은 특히나 그 점을 싫어했다. 전날 수업시간에 몹시 친한 체를 해놓고 이튿날 길거리에서 만나면 언제 보았냐는 식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케임브리지로 떠나기 전에 한 고별연설에서 학생들에게 변명조로 말했다.
“만일 내가 여러분 얼굴을 모두 기억했다면,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을 기억하긴 어려웠을 겁니다.”
그러니까 존스 양과 스미스 양을 구분하는 데 기억력을 소모했다면, 2격변화와 4격변화를 구분하지 못했을 거라는 말이다. 학생들이 그 같은 어이없는 겸손과 학자연하는 거만함을 과연 어떻게 받아들였겠는가? 물론 그의 말은 일리가 있다. 하지만 학생들 이름을 외우는 것은 가외의 시간과 에너지가 드는 일이며, 그런 노력은 필요 없고 자신이 꼭 해야 할 일도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음을 은연중에 드러내는 말이기도 하다. 그가 딴 게 아니라 바로 가르치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는 까닭에 그의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 pp.56-57
#3. 그리스어 교수 드리슬러는 시시콜콜한 문법에 심하다 싶게 얽매였다. 우리는 그저 강의실 바닥을 멍하니 바라보았을 뿐, 우리가 다루고 있는 그 위대하다는 문학의 아름다움이나 의미를 어렴풋하게도 깨닫지 못했다. 2학년 1학기에 그와 함께 에우리피데스의 『메데아』를 함께 읽은 기억이 난다. 학기가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는데도 우리는 고작 246행까지밖에 나가지 못했다. 그러니까 우리는 『메데아』가 어떤 의미가 있는 작품인지, 어떤 문학적인 특성이 있는지는 고사하고 그것이 대체 무엇에 관해 쓴 책인지도 알지 못했다. --- p.98
#4. 교수님은 단조롭기 짝이 없는 교수법을 일 년 내내 고집스럽게 고수했다. 결코 말하는 법이 없었으며, 오로지 학생을 호명해서 암송하거나 운율에 맞게 읽도록 시키고, “그만하면 됐어”라고 소리친 다음 점수를 기입할 따름이었다. 좀이 쑤시던 1년의 수업을 모두 마친 6월 어느 날 나는 그가 역시나 아무런 음조의 변화 없이 이렇게 선언하는 것을 듣고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호메로스의 서사시는 우리 인간의 손으로 쓰인 작품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걸작이다. 이것으로 수업을 모두 마친다.”
우리는 멍하니 햇볕 속으로 걸어나왔다. --- pp.104-105
#5. 옥스퍼드에서 내가 처음으로 철학 강의를 들은 교수는 마르고 신경이 날카로운 젊은 교수였다. 그는 면도날처럼 예리한 정신의 소유자이고 빼어난 개인교수이기도 했다. 하지만 강의실에서 학생들에게 강의하는 일에 관한 한 도통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는 정성껏 타자치거나 손으로 적은 두툼한 강의록을 들고 강의실에 나타났다. 그 공책은 그가 발표하려고 준비중인 논문들이었다. 우리는 그가 그것을 출판사에 넘기기 전에 들어주는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독서대에 강의록을 놓고 선 그는 50명의 대학생이 앉아 있는 강의실을 힐끗 바라보았고, 대놓고 싫은 내색을 하면서 강의록을 마냥 읽어내려갔다. 마치 덜 잠긴 수도꼭지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처럼 낮고 일정한 톤으로 말이다. …… 그의 강의는 여전히 귀에 들리긴 했지만 더 이상 조리에 닿지 않고 종잡을 수 없었다. 그 자신 말고는 아무도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 pp.140-1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