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도 죽은 사람들이 꿈에 보이세요?"
"으응."
할머니는 아주 조용하게 대답을 했다. 순간 잠이 들었다가 깨어난 것인지 잠시 생각을 한 것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누가 보이세요?"
"어무니도 보이고 할무이도 보이고 그러더라. 생전 모습 그대로 마당 한가운데서 어무니는 보리 꺼럭 까불고 있고 할무이는 맷돌 돌리고 있고...... 곰방대 물고 있는 할아부지도 뵈고 말이다. 어찌나 진짜 같든지 꼭 엊그제맨치드라."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몰랐다. 갯것 다녀온 할머니의 하루만치 더 죽음과 가까워간다는 것만 막연히 생각할 뿐이었다.
"일찍 세상 베린(버린) 동무들도 뵈고......"
나는 자꾸 할머니의 손을 만졌다.
"어저께는 여름에, 언지냐, 니가 상여 메고 나갔었던 할매들 안 있냐, 그 성님들도 보이드라."
목이버섯 따러 갔던 두 할매를 이르는 말이었다.
"한복을 곱게 입고 들어가 앉어 있드라."
그러고는 흐음, 한숨 같은 신음소리를 냈다.
"어디에서요? 돌아가신 장소이던가요?"
"글쎄, 그걸 모르겄더라. 짚은개 바위 같기도 하고 어디 좋은 디 같기도 하고."
"할머니를 부르던가요?"
"그냥 앉아만 있드라. 영 곱게도 한복을 입고 말이다. 그걸 쳐다보고 있는디 마음이 괴롭지는 않더라."
--- p. 238
나는 자꾸 바다속으로 들어갔고 종내는 성기를 바다의 질에 꽂고 낮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성기는 더 커지지도 않고 줄어들지도 않은, 적당히 발기된 상태로 바닷물 따라 천천히 흔들렸다. 그것은 마치 수초 속을 파고드는 물고기 같기도 했고 항해의 방향을 조절하는 키 같기도 했으며 그러면서 그것은, 발기는, 나에게 신열을 일으켜 끝내 바다와의 합일을 만들어낸 원인 같기도 했고 그럼과 동시에 그것은 내가 어찌해볼 수 없는 어떤 통로이며 그동안 어떻게 살았느냐를 증명해내는 표시이자 기억의 저장소인 듯도 싶어졌다.
단 한번도 놓아본 적이 없는 그것은 그래서 나와 늘 맞물려 살았는데, 그럼으로써 진부한데도, 신선함이라는 각도에서 본다면 새롭게 자라는 머리카락만도 못한데도, 물 주지 않아도 자라는 뒤란의 잡초처럼, 소음이 끝난 부분에서 적막이 새롭게 탄생하듯, 새롭게 돋아나서 새로운 형태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성기란 극도로 축약시켜놓은 삶이고, 삶의 집약이며, 형식이었다.
이제 저 수십억의 나이를 가진 자궁과 비로소 만났고 그리고 몸을 떨어댔는데 맞아, 나는 바다와 연애를 걸어버린 것이다. 비로소 저 멀고먼 아득한, 예전의 할머니 할아버지를 잉태한 곳으로 긴 방랑을 마친 순례자처럼 아득하게 돌아온 것이다.
바다여, 내 몸살은 이런 것인가. 내 흔들림의 장소는 탄생의 자리인가. 사성장군이 돌아갈 곳은 풀 한포기 없는 연병장의 훈련소. 은막계를 주름잡은 최고 배우가 은퇴한 다음에 찾는 곳은 상기된 볼로 맨 처음 문을 두드렸던 유랑극단의 여관. 과업을 완수한 혁명가가 늙어 지친 몸을 누이는 곳은 맨 처음 울음을 터뜨리며 어미젖을 빨았던 누옥(陋屋)의 작은방. 죽음을 앞둔 마라토너가 유언을 마치고 찾는 곳은 맨 처음 초시계를 누르고 뜀박질을 했던 시골 초등학교의 메마른 운동장. 그럼 소멸은 생성의 고장에서 마무리지어지는 것인가.
--- pp. 88∼89
낭떠러지 너머를 궁리한다는 것은 그렇게 추운 짓이었다. 그 궁리가 왜 찾아왔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어쨌든 서른 가까워져가는 나이에는, 아마도 젊음의 껍질을 벗어내야만 하는 시기라, 누구나 한번은 그렇게 독하게 궁리하지 않으면 안되는 듯했다. 그리고 그 궁리는 결국 혼자서 해내갈 수밖에 없는 성질의 과정이었고 혼자란 시린 거였다.
사람들은 제각기 돌아가고 나는 길을 되짚어 걸어왔다. 따뜻하게 녹았던 몸은 다시 얼어붙었다. 행복은 여전히, 잠깐인 것이다. 누군가 팔을 붙들었다.
"아저씨, 놀다 가요."
왼쪽 관자놀이에 종기 자국이 있는 여자였다.
"놀다 가요, 응? 싸게 잘해줄게. 너무 추워서 그래."
놀다 갈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따뜻한 방에 누워, 이 종기 자국 있는 여자와 놀 수만 있다면, 싸게 잘해줄 수 있도록 내가 돈만 낼 수 있다면. 나는 몸을 비틀어 피했다.
"아저씨, 이리 와봐요, 응?"
"......"
나를 누르고 있는 것은 무엇이었나. 겨울인가 시간인가 아니면 나 자신의 무게인가. 그러다가 겨울바람을 둘로 쪼개고 있는 방이 나타났다. 어쨌든 나는 돌아갈 곳이 있었던 것이다. 문을 열면 내가 빠져나온, 동그랗게 동굴이 만들어진 담요가 혼자 울고 있었다. 그래, 이 담요는 창녀와 인연을 맺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몸을 집어넣자 연탄불과 소주의 냄새를 맡고 담요가 바짝 내 몸을 죄어들어왔다. 적막을 일깨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삼 나에 이천공십칠 오천구백."
나는 거듭 허공 너머를 골몰하는 거미를 생각했다.
--- pp. 76∼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