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과 마음을 닦는 수행을 말하는 이는 아직 성품의 문 안에 들어오지 못한 것입니다. 성품의 문 안에 들어오게 되면 몸이니 마음이니 하는 것은 더 이상 닦을 대상이 아닙니다. 단지 쉬어줄 대상입니다.
무엇을 쉬어주는가? 몸과 마음이 고정된 실체가 있다는 생각을 쉬어주어야 합니다. 무언가 실체가 있어서 닦는 것이 아니라, 애당초 고정된 실체가 없음을 직시해야 합니다. 설혹 닦는다 하더라도 이러한 점을 밑바탕에 깔고 닦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닦을 것이 없되 닦는 것입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성품을 보는 것입니다. 성품은 공(空)한 것입니다. 텅 비어있으므로 무엇으로든 채울 수가 있습니다. 선인도 될 수 있고 악인도 될 수 있습니다. 부자도 될 수 있고, 가난뱅이도 될 수 있습니다. 내가 선택합니다. 내 작품입니다.--- p.44
6조 스님은 잡념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진정한 좌(坐)이고, 마음이 안으로 산란하지 않는 것이 진정한 선(禪)이라고 좌선의 의미를 새롭게 설정해주셨습니다. 항상 우리의 본마음은 앉아 있습니다. 본성 자리에 잡념만 일으키지 않으면 그대로 좌이고 다시 안으로 본성을 보아서 산란하지 않으면 그대로 선인 것입니다. 좌선의 의미를 새롭게 일깨워준 6조 혜능 스님이야말로 인류를 몸뚱이 좌선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시고, 참선의 문을 활짝 대중에게 열어젖히신 분이십니다.
만약에 꼭 몸뚱이를 가지고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어야만 좌선이라 하면, 이 세상에 좌선하기 어려운 사람이 많습니다. 시장에서 장사하는 상인들, 직장 생활하는 사람들, 다리가 불편한 장애인들 등등은 다 좌선을 못하는 겁니다. 특수한 사람이 특수한 장소에서 특수한 시간에만 할 수 있는 참선을 앞에서 ‘닫힌 참선’이라 이름 붙였듯이 ‘열린 참선’은 언제 어디서나 누구나 할 수 있는 참선입니다.--- pp.81~82
우리도 부처님, 대자유인, 주인공이 되어서 다른 사람도 대자유인이 될 수 있도록 법륜을 굴리라는 것이 법화경과 육조단경의 가르침이자 우리의 목표입니다. 불교는 철저하게 주인 되는 가르침입니다. 윈도 브러시에 눈의 초점을 맞추지 말고 전방을 주시하고 운전해야 된다는 겁니다. 우리의 몸뚱이와 마음은 윈도 브러시와 같이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비록 내 몸과 마음은 윈도브러시처럼 계속 움직이고 있지만 거기에다 초점을 맞추지 말고 성품자리에다 초점을 맞춰서 공부해야 된다는 것이 바로 일불승으로 가는 가르침입니다.--- p.249
법달이 부처의 행을 수행하겠다고 하자 6조 스님께서 “맞다. 부처의 행이 곧 부처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정하여진 부처가 따로 있어서 부처의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고, 부처의 행위를 하는 자가 부처라는 겁니다. 육조단경의 핵심사상, 불교의 핵심인 행불(行佛)사상이 드러나는 아주 중요한 대목입니다.
불교의 핵심은 ‘고정된 실체로서의 나는 없다’라는 겁니다. 고정된 실체로서의 나는 없지만 시시각각 찰나 생멸하는 나는 있습니다. 현존하는 모습조차 부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허무주의에 떨어지고, 공에 빠지는 겁니다. 불교는 중도설입니다. ‘없다’에 떨어져서도 안 되고 ‘있다’에 떨어져서도 안 됩니다. 고정된 실체는 없지만 변화하는 나는 있고, 바로 지금 여기에서 나의 행위가 나라는 것입니다. 강의를 하면 강사가 되는 것이고 도둑질을 하면 도둑놈이 되는 겁니다. 어떤 행위를 하느냐가 나를 규정해 나간다는 것입니다.--- pp.252~253
삿된 꽃이란 내 행복, 내 마음의 주인공을 돈, 술, 마약, 담배, 신(神) 등 밖에 있는 존재에서 찾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함께 무명의 업을 짓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무명은 밝음이 없다, 지혜롭지 못하다는 뜻입니다. 나의 행복과 불행의 원인을 밖에서 찾으니까 해결도 밖에서 찾으려 합니다. 요즘 사회적으로 사이코패스가 상당히 문제가 되고 있는데, 그게 바로 밖에서 주인을 찾는 대표적인 행태입니다.
어떤 마음의 괴로움이 있다든가, 불이익을 당한다 하면 그 원인을 밖에서 찾는 겁니다. ‘사회 때문에, 대통령 때문에, 국가 때문에, 내지는 다른 사람들 때문에, 너 때문에’라고 하니까 밖에다 분풀이를 하게 됩니다. 자기의 마음가짐을 다스리고 탐 진 치를 쉴 생각을 하지 않고 모든 원인을 밖에다 부여하니까 분풀이를 해야 직성이 풀립니다. 그런다고 직성이 풀리나요? 하면 할수록 점점 더 갈증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업생을 계속해서 살게 되는 겁니다. 인생이 점점 업그레이드되어야 하는데 자꾸 밖에다 해코지를 하니까 점점 다운그레이드가 됩니다. 인간의 몸에서 축생의 몸으로, 축생의 몸에서 지옥으로 점점 내려가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지요.--- pp.312~313
불성은 부처가 될 가능성, 자성은 무한한 가능성입니다. 백지 수표와 같은 것이 자성이고, 백지수표에다 부처라고 쓰면 불성입니다. 부처의 몸가짐과 마음가짐을 연습해서 부처로 살면 백지수표를 큰 가치로 쓰는 것이고, 백지수표에 축생이라고 써넣으면 무한한 가능성을 축소해서 사는 것입니다. 무한한 가능성이 있고, 인생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데 스스로 종노릇을 자처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종노릇이 너무 편하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까지 그 세계로 끌어 들이려는 사람도 많지요. 그것 또한 그 사람의 가치관과 덕성과 불연(佛緣)이 작용하는 것입니다.
--- pp.333~3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