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승호 - 20년 넘게 명함을 모아 기록해둔 ‘박변 주소록’도 엄청난 분량일 텐데요.
박원순 - 제가 며칠 사이만 해도 이렇게 많은 명함을 받았거든요.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데요. 사람을 만나면 그때그때 정리를 했어요. 요즘은 하도 많이 만나서 정리를 못하고 쌓이기도 하는데요. 너무 많아서 완전히 체계적으로 정리하지는 못해요. 주제별, 지역별로 데이터를 올려놓고, 이 파일에서 키워드, 인명 검색해서 찾습니다. 우리 연구원들도 다 볼 수 있는데요. 무슨 일을 해야겠는데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면 들어가서 찾아볼 수 있게 하는 거죠. 제가 그동안 만난 사람들을 정리해보니까 대한민국에 안 걸리는 데가 없어요. 거대한 네트워크가 됩니다. --- '대한민국 안 걸리는 데가 없는 ‘박변 주소록’' 중에서
“당신의 삶에서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아름다운재단과 아름다운가게를 스쳐 지나간 많은 사람들을 통해 나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얻었다. 나 자신 역시 이곳을 통해 인생이 더욱 행복해졌다.” --- '나눔과 봉사만큼 행복한 일이 또 있을까' 중에서
농사일을 해서 보내주는 돈으로 공부만 했으니까 부모님과 누이들의 노고를 모르면 사람이 아니죠. 사실은 그래서 미안함이 많은데요. 공개유언장을 통해 유언에도 그런 내용을 썼지만, 변호사 해서 돈 좀 많이 벌었으면 누님이나 동생한테 집이라도 한 채 사주고, 그럴 만하잖아요. 다만 제가 그러지 않아도 지금 그런 대로 살고 있고, 집은 못 사줬지만 저를 조금은 자랑스러워하지 않겠어요. 그렇게 생각해야 제 마음이 편할 거고요.(웃음) 제 유언장에 저 때문에 공부도 못하고 농사만 뼈 빠지게 지은 동생에게 이렇게 썼습니다. 신라 향가, 제망매가祭亡妹歌에 가을 단풍이 낙엽이 되어 서로 흩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같은 가지에 태어나 가는 곳 모르겠구나”라고 했는데, 우리 남매도 저 세상에서 다시 만나면 오빠 노릇을 제대로 해보겠다는 것입니다. 그 약속을 제대로 지킬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 생에서 제대로 못한 것에 대해 용서를 빌었어요. --- '미안합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중에서
“1년 재수를 했는데요. 그때 서울 올라와서 작은 누님 댁에 있었는데, 도림동 쪽에 살았습니다. 종로 2가 YMCA 뒤에 있는 학원을 다녔는데요. 새벽에 나오면 저녁 늦게까지 거기서 공부하는데, 거의 굶다시피 했어요. 단팥빵 하나 겨우 사먹든지 그랬죠. 나중에는 독서실 같은 데서 마지막 3개월을 지냈어요. 3개월 동안 거의 못 먹었죠. 애들은 보니까 라면도 끓여 먹고 잘도 지내던데, 그런 친구들은 거의 3수, 4수 하더라고요.(웃음) 얘들은 의자 몇 개 놓고서 반듯하게 잠도 잘 자요. 저는 3개월 동안 양말을 한 번도 안 벗었어요. 그랬더니 땀이 차서 발바닥이 하얗게 뜨더라고요. 나중에는 감각이 없어질 정도가 됐죠. 영어와 국어 교과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다 외웠습니다. 문제집도 다 외웠어요. 그래서 무슨 문제가 나올지 다 아는 경지가 됐죠. 그렇게 열심히 했습니다.” --- '석 달 동안 양말 한 번 안 벗었어요' 중에서
“부장검사가 ‘그런 사건을 왜 구속 안 하느냐?’고 저를 혼내시는 거예요. 그때 이창구 판사님이 계셨는데, 제가 법원에 가니까 “영감, 또 관선 변론을 하러 왔냐?”고 했던 기억이 나요.(웃음) ‘제가 조사를 해보니까 이 사람이 안 됐더라, 하도 위에서 구형을 하라니까 하겠지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참고를 좀 해주시라’ 하는 얘기를 좀 했거든요.(웃음) 제가 변호사 아닌 변호사를 하니까, 그게 말이 되겠어요? 그다음 고등법원 관할 검찰청에서는 사형집형을 하는데요. 검사가 사형집행을 참관하게 되어 있어요. 여덟 명인가 사형집행을 하는데, 저는 도저히 못 가겠더라고요. 그래서 다른 분이 가게 했죠. 뭐, 그분들이라고 가고 싶겠어요. 이런 일들이 계속 힘들었죠.” --- '1년 만에 검사를 그만두다' 중에서
박원순은 조영래 변호사와 함께 활동하면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는 두 가지를 꼽는다. “사회적 통찰력을 가지고 법률을 통해서 사회적 어젠다agenda를 만들어가는 것”과 “그것을 혼자의 힘으로가 아니라 다양한 사회적 세력을 연대시키면서 풀어가는 것”이라 한다. 조영래 변호사를 통해 익히고 강화한 두 가지 능력은 그가 시민운동을 하는 과정에 큰 도움이 되었다. 특히 참여연대 활동이 그랬을 것이다. 나중에 그가 담당했던 서울대우조교성희롱사건 같은 경우, 한국 사회의 직장 문화라든지 남녀간의 권력 관계를 규정짓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7년을 끈 소송에서 판결이 나자 한국 사회 남성들은 ‘성희롱을 하려면 3천만 원은 있어야 해’라는 자조적인 농담을 했지만, 남성과 여성의 사회적 관계와 그 안에서의 권력 관계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 '인권변호사 박원순, 성희롱을 법정에 세우다 '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