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를 부르는 이름은 여러 가지였다. 함축성 있는 많은 말들을 쏟아 낸 지성인, 방랑하는 원조 히피 무리를 이끈 지중해의 견유학파 철학자, 양성 균형적 페미니스트이자 지혜의 여신‘소피아(Sophia)’의 대사, 메시아를 가장한 영리한 사기꾼, 게이 마술사, 농민 혁명가, 유대교 선사(禪師).
한 철학자는 이렇게 물었다. 그러면 예수는 누구였을까? 게자 베르메스와 A. N. 윌슨이 제안하는 것처럼 방랑하는 하시드(hasid), 즉 성인(聖人)이었을까? 존 도미니크 크로산의 주장처럼‘유대의 농민 견유학파 철학자’였을까? 탈무드의 주장처럼 이스라엘을 그릇된 길로 이끌려 했던 마술사였을까? 알베르트 슈바이처가 주장한 것처럼 환멸 가운데 죽어 간 자칭 예언자였을까? 아니면 다비트 F. 슈트라우스, 루돌프 불트만, 존 힉이 말하는 것처럼 1세기 유명인사였는데 그가 기적을 행했고 신이었다는 신화를 초대교회가 받아들였거나 날조한 것일까? 아니면 사복음서의 주장대로 그는‘그리스도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었을까?
이제껏 예수를 찾아 나섰던 사람들 대부분은 자신들이 처음에 발견하고 싶었던 모습의 예수를 발견하는 경우가 많았다. 샬럿 앨런은「인간 그리스도(The Human Christ)」에서 이렇게 말했다.“ 자유주의자들은 자유주의자 예수를 …… 이신론(.神.)자들은 이신론자 예수를, 낭만주의자들은 낭만주의자 예수를, 실존주의자들은 실존주의자 예수를, 해방신학자들은 계급투쟁의 선봉에 선 예수를 발견했다.”
진짜 예수를 찾는 것이 가능할까? 이 질문에 어떤 답을 하느냐는, 보다 근본적이라고 할 수 있는 다음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달려 있다. ‘자신의 선입관을 버리고 증거가 이끄는 대로 따라갈 의향이 있는가?’--- 도입. 진짜 예수를 찾아서 중에서
여섯 가지 반론들은 말끔히 해결되었다. 그뿐 아니라, 나의 여행은 사복음서의 전반적인 신뢰성과 예수께서 메시아 예언을 성취하심, 그분의 부활을 지지하는 새롭고 강력한 논거를 내게 남겨 주었다. 내게 그것은 전통적인 그리스도관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확고한 토대 위에 든든히 서 있다는 추가적인 확증이었다.
하지만 그 논증이 설득력이 있다면, 왜 그토록 많은 비판자들이 빈약한 증거와 취약한 논리들에 의지하여 날조된 예수를 지지하는 논거를 세우려 할까? 그들은 왜 목격자들의 증언에 근거해 기록된 1세기 사복음서를 무시하거나 모욕하고, 역사적 신빙성이 부족한 2세기나 그 이후 문서들을 가지고 다른 예수를 만들어 내는 걸까?
사람들의 동기를 분별하기란 때론 매우 어렵다. 하지만 나는 또 다른 예수를 찾아내려는 그 많은 시도들 아래 흐르는 한 가지 공통점을 간과할 수 없었다. 바로 예수를 인간과 같은 수준에 놓으려고 하는 것이었다.
일부 비판자들은 예수를 축소시켜 그 목적을 이루려고 한다. 그들은 예수의 유일성, 그가 행한 기적들, 그의 신성을 거부하여 그를 또 다른 인간으로 끌어 내린다. 예수 세미나와 모방 이론가 그리고 부활을 부인하는 회의론자들이 이와 같은 방식으로 예수를 저울질한다. 또 이것은 ‘예수가 스스로 하나님이라 주장한 적이 없고 누구나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성령을 구현했을 뿐이다’라고 말하는 예수 문서들 배후에 놓인 메시지이기도 하다.
다른 접근법을 취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예수를 중상하기보다는 자신들을 높인다. 다시 말해 예수의 신성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그들 안에도 동일한 신성의 빛이 거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많은 뉴에이저들과 영지주의자들, 그리고 에드와 조운처럼‘내 맘대로 종교’를 창조하겠다고 나서서 결국 자신들이 신이라는 것을 발견하는 사람들의 전략이다.
예수를 낮추든 자신을 높이든, 결과는 같다. 예수를 인간과 같이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예수에게는 순종하거나 경배를 드릴 필요가 없다. 그 예수는 우리를 심판할 수도, 우리에게 책임을 물을 수도 없다. 그의 가르침 역시 우리의 기분에 따라서 따를 수도 있고 무시할 수도 있는 제안 정도밖에 안 된다. 그런 예수가 어떻게 우리의 구원자가 될 수 있겠는가? 그는 기껏해야 친절한 안내자일 뿐이다.
그러나 회의론자들은 유일한 신적 존재, 기적을 행하고 예언을 성취하며 부활한 예수만은 용인하지 않는다. 역사적 증거가 설득력 있게 그 방향을 가리키고 있지만, 그들은 그것을 애써 무시한다. 예수가 실제로 그런 존재라면 그들은 그에게 은혜를 입어야 할 것이다. 그들의 개인적 주권과 도덕적 독립이 위험해질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바로 진짜 예수라는 데 있다.
우리는 예수와 동등한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그분과 동일한 자리를 차지하거나 동일한 신분이 될 수 없다. 그분은 하나님이고 우리는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바로 이 부분을 곤혹스러워한다. 예수께서 성육하신 하나님이라면, 그분은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닌 게 아니라, 그분은 정말 전부를 요구하신다. C. S. 루이스는 이렇게 말했다. “기독교의 방식은 다릅니다. 더 어려우면서도 더 쉽지요. 그리스도는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전부를 다오. 나는 너의 시간이나 돈이나 일을 원하지 않는다. 나는 너를 원한다. 나는 너의 자연적 자아를 괴롭히러 온 것이 아니라 죽이러 왔다. 미봉책은 필요 없다. …… 너의 자연적 자아 전부를, 네가 악하다고 생각하는 욕망이나 죄 없는 욕망을 가리지 말고 전부 내게 넘겨다오. 그러면 내가 새 자아를 주마. 내 자아를 주마. 그러면 내 뜻이 곧 네 뜻이 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런 항복을 무서워한다. 그러나 예수께서 정말 하나님이라면, 그가 정말 우리가 용서받고 자유를 얻어 그의 사랑을 영원히 체험하게 하고자 자신을 희생했다면, 우리 전부를 그분에게 드리기를 주저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다른 사람들을 살리고자 자기 목숨을 내어 준 사람보다 더 믿을 만한 존재가 있을 수 있겠는가?
이것이 예수께서 하신 일이다. 교회는 이와 똑같은 이야기를 2천 년 동안 반복해 왔다. 사무실에 앉아 있으니 에반스의 말이 귓가에 쟁쟁하게 들려왔다. “저는 교회와 같은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그들은 진실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여러 오류와 함정들을 피했습니다. 저는 교회가 올바른 결정을 내렸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에게 그저 고마울 따름입니다.”
교회는 우리를 위해 예수에 대한 가장 믿을 만한 기록들인 사복음서를 보존해 주었다. 교회는 예수의 생애와 사역이 함축하는 바를 효과적으로 요약한 고대 신경들을 작성했다. 그 내용은 예수께서 온전한 하나님이자 온전한 사람이며, 죄 용서와 소망, 영생을 받기 원하는 모든 사람에게 그것을 값없는 선물로 주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교회가 처음부터 증언한 것처럼 예수는 한 분밖에 없다. “예수는 완전히 다르고 새롭고 충격적이었다.”
작가 돈 에버츠는 이렇게 말했다. “예수에게는 너무나 분명하고 아름답고 참되고 독특하고 강력한 무엇인가가 있었기에, 늙은 랍비들이 그의 가르침에 놀랐고, 어린아이들은 달려와 그의 무릎에 앉았고, 부끄러운 창녀들은 그의 발아래에서 울음을 터뜨렸고, 마을 사람들 전체가 그의 말씀을 들었고, 율법 전문가들이 그 앞에서 할 말을 잃었고, 가난한 사람들과 거친 일을 하는 노동계층뿐 아니라 믿을 수 없을 만큼 부유한 사람들도 모든 것을 버리고 …… 그를 따라갔다.”
이분이 진짜 예수다. 예수는 줄곧 건재하셨고 지금도 그분의 백성의 삶 속에 거하신다. 그분을 따르는 공동체의 문은 언제나 열려 있다.
--- 결론. 이분이 진짜 예수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