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왜 이 모양이냐면서 모두가 두 손 놓고 있을 때, 나라가 왜 이렇게 어지럽냐면서 볼멘소리를 하고 있을 때 목사님은 “나라를 위해 한 알의 밀알처럼 죽을 수 있느냐”고 우리에게 묻고 계셨다. 그리고 그 물음은 훗날 내가 기아대책 사역을 하는 내내 나 자신에게, 그리고 ‘복의 통로’가 되려는 이들을 향해 던지는 나의 질문이 되었다.
“당신은 복의 통로가 되길 원합니까? 그렇다면 그 일을 위해 당신 자신을 산제물로 드릴 수 있습니까? 당신의 생명을 걸 수 있습니까?”
내가 다니는 세계 곳곳에서 이런 질문이 자주 나왔던 데는 이유가 있다. 세계 어디서든 한 알의 밀알이 떨어져 죽는 그 자리에는 숱한 열매가 눈부시게 맺히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사람,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붙잡고 일하고 계셨기 때문이다.
p. 36
하루는 다섯 자녀를 둔 어머니가 케냐에 있는 우리 사무실로 찾아와 돈을 빌리고 싶어 했다. 그간 빵 행상을 하며 겨우겨우 굶주림을 면했는데, 이제는 조그맣게 빵가게를 시작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장사에 대한 의지가 확고한 그녀의 태도에 우리는 돈을 빌려 주었다. 과연 그 아주머니는 돈을 빌린 지 3개월 만에 그전 소득의 다섯 배에 해당하는 수입을 올렸고, 우리에게 빌린 돈도 갚았다.
그런데 문제는 가족의 생활 수준이었다. 분명 소득은 다섯 배가 늘어났는데, 아주머니의 다섯 자녀는 여전히 영양실조에 걸려 있었고, 넝마를 걸쳤으며, 학교에도 못 가고 있었다. 기아대책에서 알아
보니 아주머니는 다섯 배 늘어난 소득으로 가족들의 식탁을 풍요롭게 하는 게 아니라 담배와 술과 도박을 하는 데 쓰고 있었다. 늘어난 소득과 아이들의 복지는 아무 관계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 스태프들은 아주머니를 찾아가 복음을 전했다. 예수그리스도를 전하고, 지역 교회와 연결해 성경공부 프로그램에 참여시켰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아주머니에게 차츰 하나님 말씀이 들어가면서 다섯 자녀에게 영양실조 상태가 사라지고, 맨발에는 신발이 신겨졌으며, 아이들 모두 학교에 다니게 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 가면서 아주머니가 담배와 도박을 끊으면서 생긴 변화였다.
이 가정의 변화를 보며 우리 스태프들은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의 개발 사역은 세속적인 의미에서의 소득 증가로 끝내는 게 아니라 마음이 변화되고 태도가 변화되는 데까지 나아가게 할 때 완성되는 것이라고….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떡을 주되 복음을, 복음을 주되 떡을 나눠 줘야 하는 사람들이었다.
p. 42-43
오직 자신의 육체적인 욕망과 무절제한 폭식을 하나님으로 삼을 정도로 우리는 자기 자신을 위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러고서도 그 사실을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자랑거리로 여긴다. 주님은 이와 반대인 사람에 대해서도 말씀하신다. 우리의 참된 이웃의 모델인 한 사람, 바로 선한 사마리아인이다. 그는 자기 자신이나 자기 자녀, 또 이웃집 사람을 도운 게 아니었다. 평소 이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던 유대인을 도왔던 것이다. 유대인들로부터 온갖 멸시를 받았던 사마리아인이 강도를 만나 다 죽어 가던 유대인을 살린 것이다.
이는 언어나 민족, 조상, 종교가 달라서 평소 이질감이 들 수밖에 없는 이들을 도울 수 있을 때 참사랑의 실천자요, 주님께서 인정하시는 참된 이웃이 된다는 뜻일 것이다.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누가 과연 강도를 만나 거반 죽게 된 이 유대인의 참 이웃이냐?”라고 물으셨다.
그가 대답하였다.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너도 그와 같이 하여라”(눅 10:37).
가서 너도 그와 같이 하여라.
p. 117-118
“ ‘이제 사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 2:20)라는 말씀을 꼭 기억하세요. 그리스도인은 내가 주님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요, 주님이 나를 통해서 사시도록 자신을 겸손히 드리는 사람입니다.”
그때 우리는 깨달았다. 오늘 우리의 문제는 내가 주님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기를 원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는 데 있다는 것을…. 하지만 주님께서 진짜 원하시는 사람은 주님이 일하실 수 있도록 겸손히 자신을 바치는 사람이라는 것을…. 헌터 박사님의 마지막 강의가 아직도 귓가에 쟁쟁하다
나는 그동안 내가 왜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도 기쁨이 없었는지 알게 되었다. 헌신에 대한 올바른 개념을 정립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 후 이러한 헌신의 개념은 기아대책에서 사역하는 이십 년 내내 나를 지켜 주었다. 만약 내가 주님을 위해 일한다는 명목으로 자기 열심에 빠져서 일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주님을 위한다고 하면서 자기 열심에 겨워 하는 헌신은 반드시 보상을 바라게 되는 법이다.
알아주길 원하고 내세우길 원한다. 말은 ‘종의 자세’로 헌신한다고 하면서도 실제로슴 주님을 종 다루듯 바라보며 “왜 이렇게 나를 알아주지 않느냐?”고 소리를 높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을 통해 주님께서 일하시도록 나를 겸손히 도구로 내어드리면 보상을 바라지 않게 된다. 내가 한 게 아니라 주님께서 일하신다는 것을 아는데 어떻게 보상을 바라겠는가!
p. 189-190
할렐루야 교회의 세미나를 마치고 인천공항으로 떠나던 날 아침, 기아대책에 들른 목사님을 그냥 보내기가 아쉬워 기아대책 전 스태프들을 내 방에 모이게 하고는 격려의 말씀을 부탁드렸다.
“나는 목회자이므로 감히 이 얘기를 할 수 있습니다. 현대 기독교회는 사탄의 전략에 속아 넘어가고 있습니다. 사탄은 교회가 떡을 전해서는 안 되고 복음만 전하는 곳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교회는 빛을 잃었고 향내를 잃었고 짠맛을 잃어버린 소금이 되었습니다. 세상을 향한 교회의 영향력이 상실되었다는 뜻입니다. 교회가 이 일을 하지 않자 기독 NGO들이 나타나서 교회의 빈 틈새를 메워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엔 사탄이 다시 기독 NGO들을 속이고 있습니다. 기독 NGO가 복음을 전해선 안 되고 떡만 전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기독 NGO가 빛을 잃고 향내를 잃고 맛을 잃고 세상을 향한 영향력도 상실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교회도, 기독 NGO도 떡과 함께 복음을 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성경적이며, 우리 주 예수님이 참으로 바라시는 일이라고 확신합니다.”
떡과 함께 복음을 전하는 것, 복음과 함께 떡을 전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길이요, 세상을 밝히는 일이다. 복의 근원이 되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
하는 길인 것이다.
p. 262-263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