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왕께 이르되, “우리들도 사리를 덜어 주소서. 주시지 않으면 힘으로 가히 하겠습니다(싸우겠습니다).” 하더니, 그 때에 우바길이 또 이르되, “다투면 모름지기 이기지 못할 이가 있으니, 그러면 여래의 사리가 무엇이 이익되시겠소.” 하고 즉시 세 몫에 나누어 한 몫일랑 제천께 주고, 한 몫일랑 용왕께 주고 한 몫일랑 여덟 왕께 고루 나누니까, 모두 기뻐하여 각각의 금담에 담았다(담아 돌아갔다). 아사세왕이 사리를 모아 세니, 각각 8만 4천이시었다.
제천은 하늘에 모셔다가 칠보탑을 세우고, 용왕은 용궁에 모셔다가 칠보탑을 세우고, 여덟 왕은 각각 (제) 나라에 모셔다가 칠보탑을 세우니, 우바길은 사리를 되던 독 안에 가만히 꿀을 바르니(발랐더니), 거기에 달라붙은 사리를 모셔다가 독채로 칠보탑을 세웠다.……
……예전에 부처님이 아난을 데리시고 사위성에 드시어 탁발하시더니, 길 가에 작은(어린) 아이들이 흙을 모아 집을 만들어 두고서 둘러앉아 놀다가 한 어린이 야사라 하는 애가 부처님 오시거늘 보고 찬양하여 자기의 광에 쌀이라 하여 두었던 흙을 움켜서 부처님께 바치려 하니, 키가 작으므로 친구인 비사야가 부처님 앞에 구부리거늘, 야사가 비사야의 어깨에 올라 부처님께 바치니, 부처님이 굽으시어 바리로 받으시거늘 비사야가 합장하여 따라서 기뻐했다. 그 때에 야사가 발원하여 여쭈되, “오늘 보시한 선근 공덕으로 후생에는 한 천하(나라)를 얻어 산개를 받치는 왕이 되어 모든 부처님을 공양하고 싶습니다.”세존께서 그 말을 들으시고 미소 지으시거늘 아난이 합장하여 여쭈되, “세존이시여 어떤 인연으로 미소하시는 것입니까?” (하니,) 세존께서 이르시되, “ 내가 멸도한 1백 년 후에 이 동자가 파련불읍에 태어나서 한 나라를 (맡아) 가지고 전륜왕이 되어, 성은 공작이고 이름은 아육이라 하고, 이 다음가는 동자는 그 나라의 대신이 되어 둘이 염부제를 가지고 삼보를 공양하며 정법으로 다스리며, 내 사리로 8만 4천의 탑을 세우리라.……
……『석보상절』은, 중국 남제(南齊)의 승우(僧祐, 444 ∼ 518)와 당(唐)의 도선(道宣, 596 ∼ 667) 두 스님이 각각 지은 『석가보(釋迦譜)』와 『석가씨보(釋迦氏譜)』에서 가려 뽑고, 여기에 『법화경(法華經)』을 비롯한 여러 경전을 더하여 우리나라 나름대로 엮은 『증수석가보(增修釋迦譜)』(?)를 당시 새로 만든 훈민정음(訓民正音)으로 번역해 낸 최초의 산문체 문학작품이다. 수양대군이 주재(主宰)하고 안평대군과 신미(信眉) 스님, 승문원(承文院) 교리(校理) 김수온(金守溫) 등의 도움을 받아 편찬하였다.
이 ‘제23·24’(이하 이렇게 칭하기로 함)가 나타남에 따라서 『석보상절』의 총 권수(卷數)가 24권이라는 것을 입증하게 되었다. 곧, 종래에는 국립도서관 소장의 ‘권6’과 ‘권13’의 아랫마구리?정확하게는 서뇌(書腦) 아랫부분 셋째 칸에 쓰여 있던 ‘공 이십사[共卄四]’에 의해서 권수를 추정했던 것인데‘, 제24’로 해서 제대로 인증하게 되었다.……
……『석보상절』 ‘제23, 24’가 학계에 공개되기 전까지는 『석보상절』이 동시대의 다른 어느 문헌보다도 『훈민정음』 ‘해례’의 8종성 규정에 충실하다고 보았다. 곧 『용비어천가』나 『월인천강지곡』처럼 ‘ㅈ, ㅊ, ㅍ, ㅌ’ 종성이나 ‘ㄴ, ㅁ, ㄹ, ㅿ’ 등 어간말자음의 특이한 표기법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인식하게 된 것은 그 전에 전래된 나머지 권차(卷次)를 바탕으로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23, 24’에는 ‘ㅿ’ 종성도 쓰이고 ‘ ?ㅇ’식 표기도 쓰였다.……
……김영배(1974)는 권차(卷次)와 내용이 같은 『석보상절』제9와 『월인석보』 제9를 대비하여, 번역 경향, 한자어의 사용, 상당한 양의 협주 추가 등을 통해 두 문헌은 전연 별개의 문헌으로 다루어야 한다고 보았다. 위와 같은 결과는 『석보상절』 제19와 같은 내용이 실려 있는 『월인석보』 제17, 18과 『법화경언해』 권6의 비교에 있어도 대체로 마찬가지였다(김영배 : 1975). 김영배(2004 : 10)에서는 석보상절의 중간 부분이 중단된 채(월석 20 : 29a2) 다음에 『월인천강지곡』 기347, 기348(쌍행 협주)이 동 기349, 기350(쌍행 협주)과 동 기406 ∼ 기411이 끝난(월석 20 : 93b6) 다음에, 장차로는 63장 정도를 건너뛰어서 중단됐던 상절 부분이 시작됨을 보였는데, 현전하는 『월인석보』 중에 이렇게 문장 중간을 끊고 새로운 부분을 삽입한 것은 달리 보이지 않음을 지적했다.……
……『월인석보 제25』의 『석보상절』 부분은 전체적으로 『석보상절 제24』를 바탕으로 상당 부분 고쳐 쓰면서 새로 추가하기도(약 181면) 하고 일부분은 삭제하기도(약 10면) 하는 등 대폭 증보되었다.
새로 추가된 것 가운데서, 율장에 관련된 ‘삼의육물(三衣六物)’은 그 주석과 법복의 공덕, 등을 자세하게 설명했는데, 그 분량이 43장이나 되며, 아육왕의 8만 4천 탑에 관한 내용은 『석보상절 제24』에서도 상당한 분량이었지만, 『월인석보 제25』에서는 약 80장을 차지한 것 등이 특기할 만한 점이다.……
……『월인천강지곡』과 『석보상절』은 애초에 따로 간행은 되었으나, 그 내용의 성질상 조만간 합편될 운명(?)을 타고 제작되었다고 하겠다. 수양대군이 등극하기 전후의 엄청난 비극적인 사건은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계유정난(癸酉靖難)(1453, 단종 1년 10월)으로 반대 세력을 제거하여 왕권 접수의 발판을 삼고, 단종 3년 윤6월(1455)에 즉위하며, 이듬해(1456) 6월에 사육신(死六臣)의 처결 및 단종의 영월 유배, 동 10월 금성대군(錦城大君)의 사사(賜死)와 급기야 단종[노산군]이 자액(自縊)함으로써 일단락되었으나, 이 와중에 왕세자 도원군(桃源君)이 요절하는 역리지통(逆理之痛)을 겪기도 하였다. 이런 일련의 비극으로 세조의 인간적인 번민과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을 것이고, 그 자신 독실한 불교 신자였으므로 참회와 속죄의 감정 또한 말할 수 없이 더 했을 것이다. ‘위로 부모 선가(仙駕)를 위하고 아울러 망아(亡兒)를 위하는 일’(월인석보서)에 자신의 심경을 투사(投射)할 방도를 고려하지 않았을까. 그리하여 이 『월인석보』의 편찬을 아육왕이 8만 4천 탑을 조성하는 일에 견주면서 그 나름대로의 위안을 삼으려 했다고 보는 것은 필자의 지나친 생각일까? 나아가 세조 11년(1465) 4월, 원각사와 그 10층탑의 건립도 맥락을 같이할 것이라는 것이 필자의 소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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