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가 “화 있을진저”라고 한탄하는 목록을 검토하다 보면, 그가 오늘날 우리에게는 무슨 말을 해줄지 궁금해진다. 이기적인 특권을 강화하기 위해 자기의 부를 사용하는 자는 화 있을진저, 술과 다른 쾌락을 남용하는 자는 화 있을진저, 자기의 이미지를 좋게 하려고 진리를 왜곡하는 자는 화 있을진저, 자기의 죄악된 욕망을 정당화하려고 성경의 윤리적 가르침을 축소시키는 자는 화 있을진저,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말씀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이사야 5장이 주로 다른 이(그 말씀을 꼭 들어야 할 것 같은 내가 아닌 누군가)에게 해당하는 말씀이라고 생각하는 자는 화 있을진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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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게 되면 자기의 모든 고난이 끝날 거라고 생각한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더 좋은 일자리를 구해주시고, 딱 맞는 배우자를 찾아주시고, 죄의 유혹을 제거해주실 거라고 말이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은 인생의 고난에 종말을 고하지 않는다. 오히려 본격적으로 고난이 시작되는 경우도 있다. 즉 그리스도인들도 상한다. 낙심하고 우울해한다. 어떤 때는 너무나 두려운 나머지 자신의 소명을 버리고 살기 위해 도망치거나 자살의 유혹에 직면하기도 한다. 영적 리더들조차 겁먹고 그만두고 도망하고 모든 것을 끝낼 생각을 한다. 그래서 엘리야가 그 나무 아래 누운 것을 볼 때, 우리도 자신의 연약함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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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스스로에게 하는 말은 매우 중요하다. 우울증에 빠졌을 때 “난 이보다 더 나은 대접을 받아야 해.”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아무도 날 도와줄 수 없어.” “아무도 내 문제를 해결해줄 수 없어.” “아무도 날 사랑하지 않아.” “아무도 내 문제에 신경 쓰지 않아.” “나만 겪는 일이야.” 등을 말하고 싶은 유혹이 찾아온다. 그리고 실제로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한다면, 낙심하게 되는 게 당연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말 대신 스스로에게 복음을 설교해야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께 용납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떠나거나 버리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자신에게 계속 상기시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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룻과 나오미는 리보의 아일레드가 『영적인 우정에 관하여』라는 그의 고전에서 기술한 관계를 유지했다. 아일레드는 12세기 잉글랜드 요크셔에 있는 수도사 공동체의 지도자였다. 그는 미혼의 그리스도인들이 사랑으로 삶을 변화시키는 공동체를 경험하도록 돕고자 했다. 그래서 즐거움을 추구하는 ‘육체적 우정’과 상호 이익에 근거한 ‘세속적 우정’을 제자도에 기초한 ‘영적 우정’과 대비시켰다. 쉽게 말해 육체적 친구는 “파티하자!” 말한다. 세속적 친구는 “네가 내 등에 상처를 내면, 나도 네 등에 상처를 낼 거야.”라고 말한다. 하지만 참된 영적 친구는 “서로 도와 예수님을 따르자”고 말한다(이것이 가장 진정한 기쁨을 주고 가장 거짓 없는 이익을 낳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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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프게도 다윗 왕은 하나님의 피할 길을 찾고 더욱 솔직하게 살아가는 대신, 어렴풋이 죄를 떠올리기 시작했다. 그게 바로 정욕이다. 한 남자, 혹은 한 여자를 보고 성행위의 가능성을 상상하는 것이다. 이 경우에는 “한 여인이… 심히 아름다워 보이는지라 다윗이 사람을 보내 그 여인을 알아보게 하였더니 그가 아뢰되 그는 엘리암의 딸이요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아니니이까 하니”(삼하 11:2--- p.3). 분명히 말하지만, 사건은 여기서 끝나야 했다. 데이비드 울프는 “이중의 신원확인은 그녀가 결코 다윗에게 속할 수 없음을 강조한다. 그녀는 남편도 있고 아버지도 있는 여인이다. 타인의 사랑과 보호 아래 있다. 손 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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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에서는 성공이 성공처럼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한 사람의 회심을 위해 수년간 사역하기도 한다. 복음으로 돌이키는 사람보다 복음에 등을 돌리는 사람이 더 많은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가 시험에 들어 절망하려 할 때, 예레미야의 이야기는 우리의 믿음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있음을 생각나게 한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다. 이 세상을 사는 우리의 제한된 시야로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 할 때, 하나님께서는 도우심을 구하는 우리의 간구, 찬양의 노래, 약속에 대한 믿음(아무리 흔들리는 믿음이라도)을 기뻐하신다.
--- p. 128
동정녀의 출산에 “예.”라고 답한다는 것은 베들레헴 마구간에 대해서도, 애굽으로 도피하는 것에 대해서도,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을 잃어버리는 것에 대해서도, 사람들이 자기 아들을 싫어하고 미쳤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도, 심지어 십자가와 장례와 무덤에 대해서도 “예.” 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렇게 의심, 낙심, 낙담, 환멸이 찾아올 때마다 마리아는 하나님의 목적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내렸던 헌신으로 되돌아갈 수 있었다.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 p. 144
사도 바울에게 가장 큰 위로는 자기가 겪는 고통이 영원의 관점에서 볼 때 단지 일시적이고, 매우 미미한 결과에 불과함을 아는 것이었다. 그의 고난 목록을 보면 그가 그리스도라는 명분을 끝까지 신실하게 지킨 것은 고사하고 살아남은 것 자체가 믿기 어려울 정도다. 일찍이 바울은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졌다”(고후 1:8 참조). 하지만 고린도후서 4장 17절에서는 그것을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라고 부르며 모든 고난에 작별을 고했다.
--- p. 182
예수님이 세상을 이기셨다면 사망이 패배한 것이고, 죄의 빚이 취소된 것이고, 영생으로 가는 문이 열린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환난은 그저 일시적일 뿐이다. 우리가 겪는 고통이 무엇이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우리를 결코 떼어낼 수 없다.
--- p. 195
당신에게 이제 모든 고난이 끝났다고 말해주고 싶다. 하지만 나는 진리를 말해야 하고,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당신이 고난을 당하게 될 거라는 사실이 진리다. 이 진리를 간과하지 말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으라. 문제는 ‘고난이 찾아올 때 당신이 어떻게 행동하고, 고난을 지나게 하시는 하나님을 어떻게 신뢰할 것인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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