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세 일본에 있어서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성장은 학문의 일반적 보급을 가져왔다. 17세기 중반 무렵 출판혁명이라고도 불리는 상업출판의 성립과 급성장에 따라 주자학적 구도의 수용 및 변용을 비롯하여 ‘공(公)’적인 것을 둘러싼 사상운동이 전개된다. 상층의 공적의식의 고양과 하층으로부터의 주체 형성 및 사회참가의식이 어우러져 생활세계 및 각 세계의 현장에 뿌리를 두면서도 공공적 세계로 바꾸어가려는 다양한 공공론적 탐구가 시도된다.
이토 진사이(伊藤仁齋, 1627~1705)는 ‘천하공공의 도’라는 명제를 제기한다. 진사이의 ‘리’는 자타관계에 있어 협동적 실천을 매개로 하는 주체를 구상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천하공공의 도’는 생활세계 속에서 개인의 성실과 타자에 대한 관용의 실천으로 이루어지는 주체형성론이며, 타자에 대한 열린 보편성을 추구하는 대화적, 협동적 공공탐구의 동시대적 제안이었다. 생활세계에서 나아가 공공적 ‘생(生)’이 가능한 사회를 구축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오규 소라이(荻生?徠, 1666~1725)는 과거제도 및 예치시스템이 부재한 일본사회의 구조적 한계와 경제사회화로 인한 도시와 농촌의 양극화, 그리고 이어지는 공동체 의식의 해체 속에서 주자학은 대안이 될 수 없다고 보았다. 소라이에게 ‘정치의 발견’은 사회의 구조 변동과 체제의 위기를 초래하는 ‘경제사회화’의 흐름에 대한 대응책이라는 측면이 강하다. 그는 정치국가론을 정리하면서 경제사회화에 기반한 대책은 배제하고 ‘유학으로의 복귀’를 제시한다. 경제사회화 대책은 결국 경제, 상인들의 강력한 움직임에 의해 오히려 무력해질 것이기에, 이를 배제하고 유학적 구도에 의한 ‘천’과 ‘생’을 재편하여 공공적 정치 실현을 지향한 것이었다. 아울러 주자학의 도덕낙관주의적인 자연성을 넘어 정치의 목적의식을 기반으로 하는 인위성이 회복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토 진사이와 오규 소라이의 공공성 탐구는 유학적 도에 대한 재편을 통해 이루어졌다. 즉 진사이는 주자학의 사서(四書)중심주의에서 논어 ?맹자중심주의로, 소라이는 육경(六經)중심주의로의 이동이라는 ‘텍스트의 교체’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텍스트 중심의 변화는 결국 텍스트 자체의 가치에 대한 동요를 초래하여, 결국 가치판단이 상대화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했다. 저마다의 존재기반이나 체험적 확신에 근거한 사상적 모색을 추진하게 되고, 특히 동아시아 국제사회의 정치적 변동은 이러한 가치상대주의화를 가져온다. 따라서 18세기 중반 이후부터 유학의 독점성은 약화되고 새로운 가치들이 제기된다. 특히 학문이 대중화되면서 ‘민’ 스스로 주체 ? 사회 형성의 사상적 모색에 의욕적으로 나서기 시작한다.
이시다 바이간(石田梅岩, 1685~1744)은 경제사회를 사회적으로 위치지우고 공공적 윤리를 세워 서민의 생활세계를 되찾을 대안을 모색한다. 그 근거로 현세 내부에서의 초월자 ‘천’을 상정하는데, 이러한 ‘천’과 ‘인’의 자연성에 근거하여 그는 이윤 추구를 ‘천’의 윤리적 명령으로 합리화한다. 이는 무사 중심의 신분질서에서 경제사회 및 새로운 사회질서를 구상하고, 그에 맞는 윤리의식과 사회의식을 찾으려는 것이었다. 새로운 체제를 인정하고 그 내부에서 자신의 위치와 관념성을 확보하여 새로운 원칙을 제시함으로서 사회 참가를 유도한 것이었다.
안도 쇼에키(安藤昌益, 1703~1762)는 ‘자연’의 생활양식을 제시한다. 기근과 경제적 고통이 지식의 대중화와 맞물려 몽민 봉기로 이어지자, 그는 ‘지’적 관심과 거리를 두더야 한다고 보고, 서적과 문자의 배제와 반권력성을 주장한다. ‘직경(直耕)’ 이외에는 철저히 제한하여 토지에 근거한 자연적 삶을 꿈꾼 것이다. 그러나 ‘직경’ 중심의 사회를 형성하기 위한 반권력성에 대한 구상은, 결국 절대주의적인 권력을 필요로 하게 되는 역설을 낳는다. ‘직경’의 주체에 대해 자각은 결국 감성적 토착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고, 이것이 독단화로 이어지게 되면서, 결국 보편적인 ‘지(知)’가 요구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과 동떨어진 시각이었기에 현실에 대한 더욱 날카로운 긴장을 갖게 하여, 그의 유토피아적 의식은 비현실적이나 오히려 현실적인 힘을 갖게 한다고 이 책은 말한다.
근세 후기에 이르면 경제와 생활세계와의 갈등이 보다 위기적인 양상을 띠면서 새로운 경학 및 경세론적 전망의 차원이 구축될 것이 요구되었다.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 1730~1801)의 공공성 탐구는 공동세계의 재구축, 즉 국학(國學)의 정비였다. 그의 국학은 생(生)의 실존적 그리고 미학적 감정에서 비롯된 문학적인 것을 구성하여 ‘황국(皇國)’의 세계를 기초짓는 것이다. 기근 및 봉기가 부각됨에 따라 한층 더 세상 질서의 ?구축 문제가 전면화되는 상황 속에서, 노리나가의 국학은 생활세계를 재구축하는 것이자, ‘지(知)’와 그 지평을 은폐하면서 신도(神道)적 ‘자연’질서로서의 ‘신위(神爲)’ 세계를 절대화하여 그것을 황통 중심의 국가로 수렴시키는 일본중심주의의 면모를 띠는 것이었다.
니노미야 손토쿠(二宮尊德, 1787~1856)는 경제사회의 심화에 의한 위기에 대하여 농촌 및 각 번(藩) 등을 자치적인 세계로 바꾸기 위한 주체 및 사회의 형성을 제시하였다. 즉, 조합 등의 계획을 세워 구체화, 제도화, 습관화에 의한 재구축을 논하였다. 이는 강한 자립정신이 강조되면서도 연대성과 함께 순환성을 내포한 지속가능한 개발로서, 자연과는 다른 차원인 인위로써 구축하려고 한 것이었다.
일본 근세 사상에 있어서 공공론적 탐구는 ‘생(生)의 충실에 대한 욕구와 그 실조, 그리고 그 회복에 대한 희망’이라는 인간학적 문제의식이 일관되어 있다. 그 ‘생’에 경제 및 정치가 얽히게 되고, 삶의 보람과 미의 문화적 측면도 관련된다.
이러한 공공론적 탐구의 양상은 기존의 공사 관계 및 공공론을 둘러싼 여러 유착 및 기만을 반성하기 위해, 그리고 자타 협동적인 주체 및 사회를 형성하기 위해서도 긍정성과 부정성을 포함하는 다면적인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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