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친구 중에는 나쁜 날이라고는 단 하루도 없는 것처럼 말하고 다니는 영성파가 있다. 그는 경우에 맞든 안맞든 말끝마다 경건한 어구들을 갖다 붙인다. 그를 보고 있노라면 영적인 열등감과 더불어 두통이 생긴다. 한번은 그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활달하게 걸어가며 이렇게 말했다. "안녕, 베키. 할렐루야! 어떻게 지내? 주여! 내 차가 어제 박살이 났답니다. 아멘!"
"응, 응." 나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잘 지내지 뭐... 그런데 뭐라고 했어?"
"주님의 은혜라고." 그가 대답했다.
"아니, 그 얘기말고, 차가 어떻게 됐다면서?"
"어젯밤, 휴지처럼 찌부러졌지. 할렐루야!" 그에게는 슬픈 기색이 조금도 없었다.
나는 놀랐다. "아니, 그런 끔직한 일이 있었단 말이야?" 거의 소스라칠 정도였다.
"끔찍하긴. 주님을 믿는 사람이 무슨 말을 그렇게 해!" 그는 나무라듯이 말했다. 그리고 빛나는 구름을 타고 날아가듯 자리를 떴다.
나는 멍하니 서서 불경한 질문들을 머리에 떠올렸다. 하나님을 신뢰하면 꼭 저 사람처럼 해야 하나? 믿음은 두려움, 의심, 분노나 좌절감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 것인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영적인 세게에 살기에 일상적인 문제에는 아예 눈을 감아버리고, 차가 박살난 것과 같은 코앞에 닥친 일들로 씨름하는 사람들과는 상종을 안해야 하는 걸까? 크리스천에게는 삶의 모호함이 요술을 건 듯 사라져 버리는 걸까? 근심이나 걱정을 하면 곧 영적 허약함을 인정하는 것이란 말인가? 영적으로 산다는 것은 고통도 없고 긴장도 하지 않는 존재라는 뜻인가?
불가지론자로 지내던 시절, 나는 이런 거룩 경건한 모습 때문에 기독교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다. 신앙으로 가까이 가면서도 이런 '거룩 거룩한' 모습이 내게도 요구될까봐 결신을 하기 전에 적이 걱정을 한 게 아니다. 만약 이게 거룩이라면, 나는 큰 곤경에 빠질 게 틀림없었다. 내가 아무리 경건하게 된다 하더라도, 그런 모습은 내 체질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 가지 더, 거룩 거룩한 사람들과 영원을 함께 보낸다는 것은 도무지 내키지 않았다.
--- pp 26~27
인간이 가진 역설은, 선과 악, 관용과 자기중심성, 정직과 사악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역설은 우리가 자신의 결함을 인정하는 것을 아주 어렵게, 그러면서도 중요하게 만든다. 우리는 주위에서 얼마나 순수한 친절이 베풀어지고 있는지 본다. 많은 부모들이 자식을 끔찍하게 사랑하고 있다. 그들은 아무 조건 없이 자발적으로 베푼다. 지역 사회에서는 영웅적 희생이 일어나곤 한다. 우리 대부분은 집에서 좀더 정다운 관계가 형성되도록, 그래서 좀더 생산적이고 책임감 있는 시민과 근로자가 되기 위해 애쓴다. (...) 하지만 이게 전부가 아니라는 게 불행의 씨앗이다.
우리는 '우리의' 진실한 모습이 가장 좋은 순간, 즉 모든 게 뜻한대로 풀리고 있을 때, 우리를 졸아들게 하는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을 때의 모습이길 바란다. 우리는 세상에 드러난 우리의 겉모습, 다시 말해서 친절하고 존경할 만하며 이 모든 것 위에다 능력까지 갖춘 사람이 바로 우리 자신이라고 믿기 원한다. 그러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지만, 이런 허상이 오래 지속될 만큼 삶은 만만하지 않다. 조만간 우리는 자신의 어두운 면과 맞닥뜨리게 된다. 그게 내게 비판적인 상사, 성격이 괴팍한 배우자나 키우기 어려운 아이, 혹은 견디기 힘들거나 분노가 치밀어 오르게 하는 환경을 통한 것일 수 있음은 크게 문제가 안된다.
어떤 궤변을 늘어놓을지라도, 우리가 인간 본성에 관해 어이없을 정도로 천진난만한 이해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 당황스럽지 않은가? 역사상 가장 피 흘리기 좋아하는 한 세기를 살아왔으면서도, 인간은 자신들이 기본적으로 선하지만 가끔씩 악한 행동을 저지른다는 식의 자기 위한을 하고 있다.
--- pp 32~33
이렇게 우리는 한평생 불가능한 일(신인 척 하는 일)과 부적절한 일(신이 아닌데 신이라 믿고 의지하는 일) 사이를 왔다 갔다 한다.
--- pp 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