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히 살려면 남의 눈에 띄지 말아야 한다.”는 제 좌우명대로 지금껏 조용히 지내왔습니다. 원컨대 앞으로도 조용히 살기를 바랍니다.”
그다지 멋있어 보이지 않는 이 문장은 유럽의 위대한 철학자가 1634년 누군가에게 쓴 편지에 들어 있던 것이다. 나는 이 말을 어느 날 밤 아주 훌륭한 어떤 서적에서 만났다.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지동설을 펼치다 교회의 엄청난 핍박을 받는 걸 목격한 데카르트는 겁을 먹고 위의 편지를 썼다. 이 편지에서 드러난 그의 좌우명은 소심하고 비루한 나 같은 인물에게 썩 잘 어울리는 것이었기에, 그날부터 나는 이 철학자를 따라 비겁하고 조용하게 세상 뒤에 숨어 살기로 마음먹었다. 그로부터 많은 시간이 흐른 어느 날, 나는 거리에서 이재명을 만났다. 그리고 그날부터 많은 게 바뀌었다. --- p. 5
항쟁 전에 ‘들불야학'을 했다는 것으로, [전민노련]에 가입했다는 사실로 그를 민주주의 혁명의 최전선에서 싸운 사회주의 노동운동 혁명가로 영웅시하는, 초점이 조금 다른 해석이 있었어. 박노해라는 사람이 윤상원을 그렇게 해석했고, 그 해석이 내 머리에 박혀 있었던 거지.
나와 달리 이재명에게는 윤상원이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열사요 의사였던 거야. 그렇기에 그는 확실한 믿음과 자부심으로 이러저러한 정치적 유불리를 따지지 않고, 스스로의 공화적 신념에 따라 “윤상원의 결기를 이어서" 민주공화국을 수호하자고, 민주공화국 수호를 위한 시민혁명에 나서자고 외친 거라고 봐. 이재명이 내 생각을 바꿔줬어. --- p. 35
80년대에 학생운동을 먼저 시작한 사람들은 대중을 ‘지도'해 본 적이 있기 때문에, 그 경험이 그들의 뇌리 깊숙한 곳에 똬리 틀고 있기 때문에, 30년이 지난 오늘날, 자신들보다 더 똑똑해진 주권자 대중이 내리는 지시를 지독하게 안 듣는다.
이재명은 80년대 초에 학생운동은커녕 광주 민주화운동이 “빨갱이와 간첩이 개입한 폭동"이라고 이해한 사람이었다. 한참 나중에 진실을 알게 되었으므로 ‘나중 된 자"였다. 그러나, 그는 책으로 현실을 공부한 게 아니라 길거리에서 현장에서 대중과 호흡하며 커왔기 때문에 80년대 학생운동권 출신들과 달랐다. 그래서 어느덧 ‘먼저 된 자'가 되었다. --- p. 55
애덤 스미스는 이러한 법률들이 개인의 자유와 재산권의 정의를 위반하며 “공공의 이익을 침해하는 불법 행위"라고 준엄하게 비판하였다. 즉, 사회 정의를 침해하는 검은 손이라고 보았던 것이며, “그 검은 손을 치우라"는 뜻에서 “보이지 않는 손"을 말한 것이다. 검은 손이 없는 사회, 자본의 만행이 규제되는 사회,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하는 공정 사회를 만들어야 국부가 증가하고 국민이 행복해진다고 본 것이다. 그게 그가 쓴 [국부론], 원제 [국부의 본성과 원인에 관한 연구]의 결론이다.
그러므로 이재명이 틈만 나면 말했던 “노동을 존중하는 정의롭고 공정한 사회"는 바로 애덤 스미스가 요구한 그 사회였고, 그가 말한 “초보적 정의의 회복"은 애덤 스미스의 도덕 철학과 사회 철학을 그대로 압축한 것이라 할 수 있다. --- p. 75~77
2016년 전까지 대한민국 정치는 말 잘하는 사람이 손해 보는 정치였다. 과묵하고 어눌할수록 대중의 신뢰를 얻는, 참으로 기이한 풍경이 자주 벌어졌다. 그리고 그렇게 이상한 이유로 누군가를 신뢰한 대가를 혹독히 치르고 있는 대한민국이다.
이 나라가 이제 말 잘하는 대통령을 얼마만큼 원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말 잘하는 대통령을 간절히 원한다.
대통령이 추진하는 정치 경제 사회 정책들이 마음에 안 들 때 느끼는 스트레스도 크지만, 더듬거리는 대통령의 목소리가 주는 스트레스도 그에 못지 않다. 대통령의 ‘말'은 그런 점에서도 중요하다. 그리고 앞서도 말했듯이, 말은 곧 사람이다. --- p. 90
정치든 사회든 경제든 경영이든 리더가 취하는 행동 중에 정말 위험한 게 정석보다 묘수를 찾고, 자기가 찾은 수가 묘수라고 굳게 믿고 경솔하게 착수를 하는 거야.
인공지능 알파고(AlphaGo)의 정책망/가치망과 비교해보면 되겠다. 정책망은 새로운 수를 찾는 시스템이고, 가치망은 그 수가 실제로 얼마나 유효할지 정밀하게 계산하는 시스템인데, 만약에 가치망이 없었다면 알파고는 ‘덜컥수’ 남발로 이세돌 9단에게 완패했을 거야. 이 가치망에 해당하는 게 “법치주의”라는 거지.
“법치가 실현되는 책임 공정 사회”가 밑받침되지 않으면 그 어떤 섹시한 개혁 정책을 묘수로 동원해도 아무 소용이 없을 수 있다는 거야. 법치라는 기본적 보수적 가치를 지켜내지 않으면, 진보적 가치 지향의 입법도 사상누각에 그칠 수 있다, 이거지. --- p. 137
나는 우리나라 정치에 가장 나쁜 영향을 준 책 중의 하나가 [삼국지]라고 생각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방통이니 제갈량이니 사마의 등의 ‘책사’가 조조나 유비 같은 ‘영웅’들과 이런저런 전략을 도모하는 게 정치라고 생각하는 봉건적 경향이 있어. 그래서 국민들의 매우 높은 정치적 관심이 이런 정략, 책략, 책사, 정치공학 쪽으로 쏠리고 말지. 각 당의 경제 정책과 그 차이점, 그 실천 여부에 대해서는 거의 하나도 관심이 없고, 각 당의 계파, 유력 정치인 이름, 그들간의 관계와 비하인드 스토리는 줄줄 꿰고 있는 사람들, 난 그 사람들이 정말 부끄러워. --- p. 152
기본소득은 ‘진보/좌파’만의 이슈가 아니다. 소득 불평등은 더욱 심화되고 민중의 고통은 커지는데 이들을 위한 혁명의 길은 막혀 버리고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한 방법은 마땅히 떠오르지 않던 ‘진보/좌파’가 소득 양극화 문제를 눈에 띄게 해결해줄 것으로 기대하면서 주장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기존에 시행되던 고비용 저효율의 복지 제도로 인해 골머리를 앓는 ‘보수/우파’(극우파에 비하면 물론 좌파다)가 쉽고 편하게 이러한 고비용/저효율 문제를 눈에 띄게 해결해줄 것으로 기대하는 제도이기도 하다. --- p. 186
이재명의 말대로, 핵무장론은 미친 소리고 사기다. 그런데 문제는 이게 아직 일정 정도 먹힌다는 거다. 트럼프가 미국-멕시코 국경에 장벽을 설치하자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였는데도 그게 미국민에게 먹힌 것처럼 말이다. 왜 그럴까?
--- p. 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