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엽이 지는 가을 산을 바라보면서 언뜻언뜻 떠오르는 말, ‘한생生, 안 난 요량해라’ 하시던 말씀, 경봉 스님의 법담法談이 생각난다.
이십사오 년 전 통도사 극락암에서 동안거를 보낼 때, 어느 하루 볕이 따사롭던 오후에 스님께서 거처하시던 삼소굴三笑屈 방문을 두드렸다.
“누고!”
“선방 수좝니다.”
“들어온나.”
미닫이문을 열고 방 안에 들어서니, 마치 시장 바닥에 전을 벌려놓고 앉은 사람처럼 스님께서는 지필묵과 일용에 쓰시는 물건, 그리고 신도들이 공양한 수건, 양말, 내의 등등의 것들을 편한 대로 놓아두고 그렇게 앉아 계셨다.
가까스로 설 자리를 잡아 삼배를 올리고 앉으니,
“그래 무슨 일이고?”
“어떻게 하면 중노릇을 잘할 수 있는지, 스님 법문 좀 들으려고 왔습니다.”
스님께서는 그 말에는 대답을 안 하시고 대뜸,
“니 이름이 뭐꼬?”
“길 도道 자, 검을 현玄 자 도현입니다.”
“그 뜻이 뭐꼬?”
“이름의 뜻을 몰라서가 아니라 스님께서 물으시는 의도를 모르겠습니다.”
“그래?”
스님께서는 잠깐 말이 없으시더니,
“중노릇 잘할라믄 한생, 안 난 요량해뿌라!”
달리 사족을 달아 설명도 안 해주시고 그뿐이었다.
앉아 있어봤자 더 말씀하실 것 같지도 않아 삼배를 하고 되돌아 문을 열고 나오는데, 익살스러운 목소리로 “지 이름도 모르는 기이……” 하시기에 스님을 되돌아보며 웃고 나왔었다.
지금도 그때의 기억이 선명한 것은, 스님께서 일러주신 법문이 나의 정곡을, 마음의 핵심을 찔러주셨기 때문일 것이다.
“한생生, 안 난 요량해라.”
말인즉 쉽지만 정말 한 세상 안 난 셈치고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살아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해야만 하고, 무엇인가 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 「한생, 안 난 요량해라!」 중에서 13-14쪽
사실 사람들이 자기 의지와 관계없이 얼마나 많은 주변의 인연에 끌려 다니며 살고 있는가. 체면 때문에, 돈 때문에, 명예 때문에, 마누라 때문에, 남편 때문에, 자식 때문에, 친척 때문에, 집 때문에, 자가용 때문에…… 이 숱한 ‘때문에’ 때문에 자기답게 못사는 것이 아닌가. 이 ‘때문에’에서 자유로워지려면 우리는 주변의 눈치 볼 것 없이 저마다 진실한 자기에 의지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 「무엇을 위해서 사는가?」 중에서 42쪽
오래전에 내가 모시고 살던 노스님 한 분이 말씀하시기를, “중노릇은 나중에 나이가 많아 의지가지없는 처지가 되어서, 어느 봄날 걸망을 지고 시골 길을 가다가 힘이 들어 따뜻한 논두렁에 기대어 죽어진다 하더라도, 언제나 진실해지려고 하는 구도심 하나를 꼭 챙기고 죽는다면, 비록 남이 그대를 보고 객사를 했다 할지라도 중노릇은 참 잘한 것이네. 중은 그럴 각오가 되어야 하네” 하시던 말씀이 생각난다.
내가 번잡한 도시보다도 시골의 호젓한 정취를 즐기며 살아야겠다고 꿈꾼 것도, 이 노스님의 이야기와 전혀 무관하지는 않는 것 같다. 이왕에 중이 될 팔자였다면, 훤칠한 인물에 만인의 우러름을 받으면서 법좌에 앉아 사자후를 해보는 것도 좋았으련만 하고 생각도 해보지만…… 역시 중은 바지저고리에 걸맞게 좀은 예스럽고 촌스럽게 사는 게 좋겠다.
- 「소박한 꿈」 중에서 49쪽
일주일 전에는, 오래도록 불이 들지 않아 불을 지필 때마다 매캐한 연기에 눈물깨나 흘리던 방을 손수 고쳤다. 아궁이에 솥을 떼어내고 굴뚝을 해체해놓고, 대나무를 가져다가 구들 밑을 여기저기 쑤셔대며 그을음이 엉겨 붙은 것을 뚫어내었다. 흙을 퍼다가 진흙을 만들어 다시 굴뚝을 쌓고 솥을 걸어 말끔히 해놓고 불을 지피니, 불길이 구들 밑으로 빨려들고 굴뚝에는 검은 연기가 펑펑 솟아났다. 두어 시간 불을 때고 방바닥을 점검해보니 방이 고루 따시다.
토굴살이 안 해본 사람이 이 행복감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하면서, 혼자 신이 나서 부엌으로 굴뚝으로 들락거렸다. 살다 보니 내 날이야 하는 날도 있고 행복감에 겨운 순간들도 있어서, 있는 그대로 적어보고 맺는다. 지금 이 순간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다시 돌이킬 수 없다. 이 이치를 아는 사람은 현재의 순간을 기쁘게 누릴 것이다.
- 「한가로운 날에」 중에서, 198-199쪽
건조한 날씨로 메마른 마당에 웅덩이 물을 흠씬 뿌려놓고 마당가 의자에 앉아 호흡을 고르다 보면, 뜰에 찾아드는 햇살이 풀 끝에 매달린 이슬을 영롱한 보석처럼 반짝이게 한다. 뜰 가득 보석을 뿌려놓고 부엌으로 내려서서 군불을 지펴놓고 바깥을 내다보니, 늘 짹짹거리며 돌아다니던 다람쥐가 저만치 다가와서 돌 위에 오도카니 서서는 알밤을 두 손으로 돌리면서 나를 쳐다본다. 연신 이리저리 몸놀림을 하다가 꼬리를 쳐 보이며 “스님! 알밤은 이렇게 까먹는 거예요” 하고는 밤 껍질을 벗겨궼 퉤퉤 뱉고는 밤 살을 옴약옴약 갉아 먹는다. 속으로 ‘아이고, 조 귀여운 놈’하다 보면, 먹던 밤은 놓아버리고 쫄랑거리며 나무 위로 올라간다.
- 「가을 반나절」 중에서 248-249쪽
나는 비록 회신에 지나지 않는 글이지만 오래전부터 글을 써왔고 말을 해왔다. 그러나 쓰고 말하면서도 늘 미진한 것이 있었다. 과연 내가 쓰고 말하는 대로 살고 있는가 스스로 자문해보는 것이다. 그러면 칠십 퍼센트는 사는 것이고 삼십 퍼센트는 동경하는 것이라 실제 내 사는 것보다 글과 말이 늘 앞서 나간다. 이것이 항상 마음의 숙제였는데, 이번에 바다 내음 그리워 길을 나섰다가 참 좋은 스승을 만났다. 말없이 은근히 웃어주던 동백꽃 스승을…….
그래서 그동안 내가 배우고 익히고 말하고 행동한 모든 것을 한자루에 집어넣어 입을 꼭 묶어서 한쪽에 두고, 포도주를 담아서 어둡고 서늘한 굴속에서 숙성시키듯 해야겠다.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는다고 하니까 평소 지내듯 하지만, 마음속에 빗장을 걸어둔 창고를 하나 마련해두고 없는 듯이 그러다 보면, 언젠가 내 얼굴에도 속 깊은 곳에서 스며나오는 엔도르핀이 얼굴빛을 좀 부드럽게 해주지 않을까 싶다.
- 「묵연안미소」 중에서, 257-258쪽
현재의 상황에서 즐겁게 머물 수 있는 사람만이 성공한 인생이라 할 수 있고 지금 이 순간 깨어 있는 그 자체가 행복이라 생각한다. 진실을 마음의 중심에다 세우고 저마다의 자리에서 긍정적이며 적극적인 생활을 꾸려나간다면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자기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고 자신의 모습에 무한한 애정을 지닐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은거해 살면서 본분을 성실히 하는 것과 환경친화적인 삶을 살면서 요즈음 사람들에게 이게 얼마나 필요한지 느낌표 하나 주는 것으로 맡은 바 소임을 다하고 있다.
아침에 그칠 것 같은 비가 다시 내린다. 코펠에 올려놓은 누룽지가 끓으며 고소한 향기를 낸다. 다시 무엇을 바라랴.
- 「현법낙주」 중에서, 327-3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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