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안에서 만난 고급 말리화차
복건성의 복안(福安)은 고급 말리화차(茉莉花茶)를 생산하는 곳이다. 남경(南京)에서 복안으로 갈 때 복주(福州)까지는 비행기로, 복주에서 복안까지는 택시로 이동하는 것이 가장 빠른 방법이다. 그런데 남경에서 가려고 알아보니 복주행 비행기가 매일 운항되지 않았다. 지난번에도 상해에서 출발하기 하루 전날 불어 닥친 폭풍우 때문에 복안에 가지 못하고 돌아와야 했기에 이번에는 당일 티켓을 구입하지 못했다고 포기할 수가 없었다.
다음날 비행기로 간다면 복안 공장과 잡은 약속이 틀어지고 전체적으로 여행 일정에 차질이 생기게 되므로 무리인 줄 알면서도 무조건 당일에 출발하는 방법을 택했다. 원래 택시 기사가 6시간이면 도착할 수 있다고 했는데 그도 초행길이라 몇 차례 길을 물어가면서 해안고속도로를 타고 12시간을 달린 뒤에야 겨우 목적지에 도착하게 되었다.
어렵게 말리화차를 만드는 현장에 찾아가니 “이곳에 온 한국인은 당신들이 처음”이라는 말을 했다. 이에 으쓱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부끄럽기도 했다. 우리가 차를 마시며 한 번쯤은 접했을 화차(花茶)의 현장에 찾아온 한국 사람이 아무도 없다니.
녹차 위에 꽃을 음화시키는 과정을 통해 완성되는 말리화차는 마니아들이 말하는 믹싱(mixing)의 의미를 지닌 차요, 차꾼들끼리 마시는 섞은 차와 같은 엄격한 고급차이자 기호차다. 그러나 말리화차는 그냥 기호품으로 마시는 차가 아닌, 차에 익숙한 이들이 그 본질에 향과 색까지 더해 만든 차다. 그렇기에 말리화차를 맛보는 것은 일반적으로 본질적인 차를 마실 때 느끼는 것보다 훨씬 더 경험적이고 역사적일 수 있다. 널리 퍼져 있는 녹차 위로 하얀 이불처럼 덮여 있는 말리화들은 그 모습 하나하나가 서로의 향을 섞느라 매우 분주해 보였다. 마침 음화하는 공정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주변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아찔한 향에 사로잡혔다.
--- p.69~70
세월을 품은 육보차
차를 만난다는 것, 좋은 차를 만난다는 것은 어디에서나 쉬운 일이 아니다. 북경 마련도 차성(茶城) 시장 방원지록(方圓之錄)에서 육보차(六堡茶)를 만나 기억에 오래토록 남을 묘미를 느끼고, 다음 장소로 이동하던 때였다. 마침 찾아간 상점에서 이런저런 수인사를 나누다 보니 바로 전에 마셨던 육보차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나왔다. 주인 진촉평(陳蜀平)은 우리 집에도 육보차가 있다고 말했다. 이에 그의 부인이 장식장에서 커다란 보자기를 꺼내와 우리 앞에서 풀었다. 매번 규격이 정확한 육보차나 대나무에 포장된 50킬로그램짜리 전시용 차만 보다가 세월을 품은 거대한 덩어리 차를 보는 순간, 차에 대한 고정관념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차가 너무 좋아 당시 차를 모두 샀다”는 주인의 말이 거짓은 아니었다. 언제 이런 광경을 눈앞에서 볼 수 있을까! 다시 접하지 못할 풍경이기에 이렇게 한 컷의 사진으로 남겼다.
--- p.151
마르코 폴로는 중국의 문화와 현실을 직접 체험하고 고향에 돌아와서 기행문 『동방견문록(東方見聞錄)』을 남겼다. 견문, 즉 ‘보고 들은’ 경험은 곧 지식인 사회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동방견문록』의 발간은 동 · 서양 문화 교류를 앞당긴 세계 문화사의 일대 사건이었다. 중국은 한국과 가까이 위치하지만 사실상 접근이 매우 힘들었기에 근대화 이후 문화 교류가 거의 끊겼었다. 때문에 베일에 싸인 나라이자 차(茶)의 종주국인 중국과 한국 차 문화 사이의 큰 격차는 여타 문화에서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나는 이 시대의 차꾼으로서 차에 대한 열정적이고도 순수한 시각으로 중국 대륙을 견문했다. 마르코 폴로와는 달리 교통과 과학의 발전 덕분에 현지의 풍광을 생생한 사진으로 찍어서 책에 담아낼 수 있었다. 2004년부터 2009년까지 6년 동안, 차를 생산하는 중국 12개 성(省)을 중심으로 내가 발을 내디딘 땅과 호흡한 공기, 그리고 그 속에서 자라는 차의 기운을 느끼며 기록한 내용을 이 책에 담았다. 그리고 그 결과를 감히 ‘견문록’이란 말을 붙여 세상에 내놓는다.
이 책에 실은 사진은 모두 본인이 직접 촬영한 것이다. 예술성이나 작품성을 우선으로 할 수는 없었고, 다만 차의 세계를 담으려고 노력했다. 일부러 연출을 하거나 의도를 담은 사진, 혹은 이치에 맞지 않는 사진은 애초에 찍지도 않았다. 살아 있는 현장의 진솔한 모습을 담으면서 차의 순수함에 다가갈 때만 차가 보였고, 차를 만드는 사람이 보였고, 만드는 이의 눈빛이 차에 스며드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단순히 기록에만 치우치지 않고 한국인의 시각으로 세계의 차를 바라보려고 노력했다. 또 한국인의 정서로 ‘이 시대의 중국차를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문제에 대해 고심했다.
중국 곳곳의 차 현장을 돌아보며 작성한 지난 6년간의 기록이 현재의 중국차 산업 모습을 정확하게 알려주고, 미래의 중국차 산업이 나아갈 방향을 예견하는 참다운 보고서가 되기를 바란다.
--- ‘들어가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