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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우셰스쿠

차우셰스쿠

: 악마의 손에 키스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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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0년 04월 15일
쪽수, 무게, 크기 368쪽 | 600g | 153*224*30mm
ISBN13 9788994054063
ISBN10 89940540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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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저자 소개 관련자료 보이기/감추기

역자: 유경찬
고려대학교 정경대학을 졸업하고 한불종합금융에 근무하면서 기획이사, 투자금융본부장을 지냈다. 싱가포르에 있는 프랑스 소시에테제너럴은행의 아시아/대양주지역본부에서 일한 경험과 실무 체험을 토대로 『금융은 신음한다』와 『제로시대』라는 경제평론집을 냈다. IMF 환란 전후 과정을 현장에서 지켜본 뒤 한국 금융의 문제점을 분석한 『금융은 신음한다』는 서울대학교 경영대학원 교재로 채택되기도 했다. 20세기 세계사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히로히토: 신화의 뒤편』,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석유 황제 야마니』, 『티토』, 『기업의 역사』등의 역서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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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도자이며, 전지전능한 지도자이기도 한 태양 같은 존재였던 차우셰스쿠는 마지막 순간을 장식하기 위해 부쿠레슈티에 있는 공산당 중앙위원회 건물의 발코니에 그 모습을 나타낸다. 전 같으면 온갖 찬사와 환호를 외쳐댔을 군중들은 적개심으로 가득 찬 야유를 보내면서 불끈 쥔 주먹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로부터 3일 후 차우셰스쿠는 ‘천사’라고 부르던 아내 엘레나와 함께 서둘러 진행된 재판에서 즉결처분되었다. 그러나 그의 수하였던 수많은 공산당 비밀 정보원들은 여전히 권력의 상층부에 포진하고 있다. 이런 현상이 에드워드 베르가 루마니아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혁명’이라는 단어에 의문을 표시하는 원인이기도 하다. 루마니아 혁명이 미완의 혁명이기 때문에 그럴지도 모른다. 지도자는 가고, 국민들은 남았다. 영도자는 사라졌지만 그 체제나 기구, 또 통치 방식에 대항해서 투쟁했던 사람들이 없애려고 노력했던 수많은 잔재들은 놀랍게도 아무 탈 없이 잘 가동되고 있다. --- p.10

루마니아 공산당원들에 대한 한 연구 결과는 뒤에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했다. 1930년대 공산당원들은 헝가리 인이 26퍼센트, 루마니아 인이 22퍼센트, 유대인이 18퍼센트,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인이 10퍼센트, 불가리아 인이 8퍼센트, 그리고 나머지 10퍼센트도 타국적이었다. 이런 혼합체 성격의 구성 요인은 라이벌 그룹을 만들어냈으며, 결국 루마니아 공산당 내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더욱 암울한 결과를 초래한 것은 또 있었다. 외인부대들의 존재는 ‘유대인-볼셰비키 신화’라는 등식을 만들어낸 나머지 루마니아 인들로 하여금 외국인 세력, 특히 헝가리와 러시아로부터 온 사람들이 루마니아 인들에 대한 음모를 끊임없이 꾸민다고 믿게 만들었다. 이러한 현상들에 대한 반응이 차우셰스쿠뿐만 아니라 미래의 많은 루마니아 지도자와 정치인들로 하여금 원색적인 민족주의를 선보이게 한 밑거름이 되기도 하였다. --- p.86

어린 차우셰스쿠를 가르쳤던 시골 학교 교장 선생님은 차우셰스쿠의 총명함도, 공식 전기에 나타난 어린 나이의 차우셰스쿠에게 혁신 정신을 깊게 심어 줬다는 당시의 개혁적인 사회 현상도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실제로 차우셰스쿠의 공식적인 교육은 초등학교에서 끝이 났다. 후에 공산주의자 세미나에서 보였던 열성은 또 다른 이야기다. 형제와 누이들 대부분이 부쿠레슈티로 빠져나온 것은 차우셰스쿠가 주장했던 대로 가난이었다기보다는 주정뱅이 아버지와 미래에 대한 전망이 전혀 안 보였기 때문이었다. 당시의 루마니아 법에 따르면 아버지의 재산은 남자 형제들에게 균등하게 분배하게끔 되어 있었다. 그런데 만약 안드루차가 사망했을 경우 형제 모두가 시골집에 있으면 적은 농토가 조금씩 분배되어 경제적인 규모가 될 수가 없었다. 메리 엘렌 피셔의 지적에 따르면 이런 이유로 인해 차우셰스쿠가 후에 개인 소유의 소규모 농장 대신 대규모 협동농장을 선호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농촌에 살았었지만 목가적인 분위기에 젖어 본 적이 없었고, 시골 생활을 긍정적으로 기억할 만한 회고거리도 간직하지 못했다. --- p.91

루마니아 경찰 당국이 ‘공산주의자 대학’이라고 불렀던 도프타나Doftana 교도소에서의 차우셰스쿠의 수감 생활은 공산주의자 동료들과 함께 철저한 규율 아래 마르크스주의를 열심히 공부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졌다. 처음에는 교도소 내 질라바 캠프에서, 다음에는 트르구지우 캠프에서 교육을 받은 차우셰스쿠는 원래 책을 가까이 하는 공산당원이 아니었고, 공산주의 이론에 대한 이해도 형편없던 상태였으나 예외적인 공론가의 상상력을 발휘하여 말년에는 소화가 어려운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원리를 줄줄 외울 정도가 되었다. 마르크스-레닌주의는 차우셰스쿠를 지키는 기둥으로 그의 삶에 뿌리를 내렸다. --- p.128

채 2년도 안 되는 기간 동안에 차우셰스쿠는 공산당 내에서 수많은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과거의 결속력이나 함께 했던 어려움이 그렇게 중요한 의미를 가지지 못했으며, 어제의 애국자와 동지가 오늘은 갑자기 변절자로 낙인찍히는 일들이 흔하게 벌어졌다. 또 충성을 받쳤던 윗사람이 잘못이라도 되면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포리슈와 퍼트러슈카누와 같이 체제와 반목했던 사람들이 그런 예에 속할 것이다. 따라서 경계심을 낮춘다는 것은 극히 위험한 일이었다. 신중한 자세, 비밀 유지, 비인간적인 냉정함이 자기를 지키는 유일한 무기라는 것을 몸소 터득하고 있었다. --- p.172

새 정권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인 사람들에 대한 비밀경찰이나 공산당의 압박, 체포, 추방이 전 동구권을 휩쓸었고 국유화, 통제경제, 집단농장 현상도 궤를 같이했다. 문화 예술계에는 초현실주의가 나타났다. 전국적으로 횡행했던 테러 분위기는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불가리아, 루마니아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었지만, 각국의 스탈린 충성분자들이 수행하는 소련의 청사진은 판에 박은 듯했다. 이 기간 동안 루마니아에서 테러에 희생당한 사람들의 정확한 숫자는 알 길이 없다. 1946~47년에 걸쳐 희생당한 사람들만 약 6만 명이 넘는 것으로 추계되는 실정이다. 또 수만 명의 노동력이 데즈가 호기심에서 추진한 ‘다뉴브 강-흑해 운하’ 공사 현장으로 추방되기도 했다. 예상치 못한 시련은 공포감을 증폭시켰다. 전쟁 기간 중 처음에는 독일에게, 다음에는 소련군에게 철저히 약탈당했던 루마니아는 다시 한 번 소련의 강탈을 경험했다. 모든 물자는 소련으로 보내졌고, 소련과 루마니아가 세웠던 합작공장들은 세금을 한 푼도 내지 않으면서 생산품은 터무니없는 헐값에 소련으로 수출하고 있었다. --- p.175

공산당 내의 권력투쟁을 보면서 차우셰스쿠는 정치적인 술수를 연마했고, 경쟁자를 제거하기 위한 마키아벨리적 수법에도 능하게 되었다. 바실레 루카의 경우 범죄 행위가 뚜렷하지 않았으나 당시 루마니아의 경제 사정이 극도로 어려웠기 때문에 그러한 상황을 희석시키기 위해서는 언제든지 희생양을 손쉽게 찾아낼 수 있었으며, 구실 또한 도처에 널려 있던 실정이었다. 차우셰스쿠는 집단농장제도가 어처구니없는 결과를 낳자 루카를 재판에 몰고 갔던 상황이 자기한테도 연출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그런 일은 다행스럽게도 일어나지 않았다. --- p.185

차우셰스쿠의 전략적인 솜씨와 꼼꼼한 계획이 모습을 나타낸 것은 1965년 7월 제9차 전당대회에서였다. 취재에 나섰던 서방 특파원들은 예전과 다르게 개방적이고 당 지도자들을 쉽게 만날 수 있던 분위기에 충격을 받았다. 개인 우상화 현상은 자취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전당대회장 어디에도 살아 있는 당 지도자들의 사진을 찾아볼 수가 없었던 것이 그 증거였다. 차우셰스쿠의 명령에 따라 당의 명칭도 ‘루마니아 노동당’에서 예전의 ‘루마니아 공산당’으로 복원되었다. 나라 이름 또한 ‘루마니아 인민공화국’에서 ‘루마니아 사회주의공화국’으로 바뀌었다. 이런 조그마한 변화를 통해서 과거 부르주와 가정을 끝없이 괴롭혔던 분파주의적 조치들이 사라졌다는 인상이 심어졌다. --- p.210

수감 생활 중 지식인들에 대한 배타적인 감정이 한층 격화되었던 차우셰스쿠까지도 1950년대 말부터 60년대 초까지는 문화적인 치장을 해야겠다고 느꼈다. 연설가로서,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차우셰스쿠의 개발은 이때부터 시작된다. 비록 훌륭한 자질로까지는 발전하지 못했으나 벙어리 같은 루마니아 공산당원들 앞에서뿐만 아니라 외국의 유명한 손님들이나 정치인들 앞에서 메모가 없더라도 횡설수설하지 않고 요점을 잘 정리하여 말하는 훈련을 했다. 각고의 노력이 집중되었고, 엘레나도 ‘말더듬’을 교정하는 데 옆에서 열심히 도왔다. 사석에서 극도로 흥분하거나 분노가 치밀어 오를 때가 아니면 말을 더듬는 경우가 없어졌다. 단조로운 말투에 10대 이후 심취했던 마르크스-레닌주의 강령에 깊은 영향을 받은 사고방식이나 문장 등은 여전했으나 대중 앞에서 더 이상 당황하지는 않았다. 문법을 교정해 주는 사람들이 항상 옆에 따라다녔고, 발음이 틀렸을 때는 오히려 일부 루마니아 인들로부터 서민적이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 p.213

현실로부터 오는 압박감은 과거에 대한 향수를 불러오게 마련이다. 루마니아 사람들이 1965년부터 1968년까지를 행복했던 시절로 기억하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이혼과 낙태에 대한 제한 조치, 피임약 사용 금지, 임산부들이 불법적으로 낙태수술을 했는지에 대한 산부인과 검사, 자식이 없는 부부들에 대한 중과세, 거의 불가능했던 해외이민제도 등은, 서방국가들이 1980년대 때늦게 알고 분개했지만 루마니아에는 1966년 10월부터 도입되기 시작했다. 미니스커트, 턱수염, 장발 등 서양의 퇴폐풍조 퇴치 운동과 함께 청교도적인 사회 정화 운동이 모습을 드러내자 지식인들의 자유 또한 엄격하게 제한되었다. --- p.214

1968년은 차우셰스쿠가 변화를 추구하기에는 너무 늦은 시기였다. 당시 차우셰스쿠를 가까이서 관찰했던 루마니아 공산주의자 몇 사람은 그가 실제로 두브체크의 개혁안을 지지하지 않았다고 전하고 있다. 그들이 그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1968년 차우셰스쿠가 겉으로는 두브체크를 지지하면서 소련의 체코 침공에 반대했으나 곧바로 자기의 돌출 행동이 소련의 루마니아 침공을 자극할 수도 있다는 데 미쳐 일관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차우셰스쿠가 소련을 비난했던 이유는 소련의 침략 명분보다는 침략 방법이었다. 그가 소련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을 못마땅해 하는 척했지만 루마니아 비밀경찰은 여전히 공산당 내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에 젖어 있던 당원들의 뒷조사를 계속하고, 또 이런 현상이 공포감을 조성했기 때문에 차우셰스쿠 사후까지도 그가 왜 더 이상의 목소리를 내지 않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드물었다.
1968년 서방의 소련권 전문가들이 두브체크와 차우셰스쿠를 비슷한 반열에 올려놓았다는 것은 당시 상황과 두 사람의 개성에 대해 서방세계가 얼마나 무지했는지를 잘 나타내는 척도가 될 것이다. 두 사람의 동질성만 강조되었던 한편, 천성적인 차이점은 크게 무시되었다는 것은 되돌아보면 부끄럽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1968년 8월, 차우셰스쿠는 루마니아 공산당의 집단 지도체제의 잔재를 청소하고 나서 자기의 권위에 여전히 도전 의사를 가지고 있던 게오르기우 데즈 시대 때의 노老 당원들을 숙청하는 계획에 착수했다. 그러나 서방측은 두브체크와 차우셰스쿠 두 사람이 소련의 위성국에서 이탈하려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는 데만 관심을 두고 있었다. --- p.223

차우셰스쿠는 시간이 흐른 뒤에는 외국의 모든 귀족들도 멀리하지 않았지만 초기에는 자기의 위상에 도움이 되는 닉슨이나 서독의 브란트 수상 같은 사람들만 환대했다. 기민한 행동이었다. 왜냐하면 이런 사람들은 반드시 유명한 언론인들을 대동하게 마련이었고, 언론인들 또한 당시 루마니아 상황에 대해 호의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968년 8월 체코 사태의 와중에서 그에 대한 호기심이 높아갈 때 차우셰스쿠의 외국 저명인사들에 대한 융숭한 대접은 해외에서 그의 지명도를 높였을 뿐만 아니라 당시 신중한 자세를 보이고 있던 루마니아 공산당 기관지에게도 그의 위치를 확인시킬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루마니아 언론들은 브란트, 드골, 닉슨의 루마니아 방문을 대서특필했다. --- p.230

차우셰스쿠는 또 제3세계에 대한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제3세계의 지도자들에게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를 매도하는 한편, 자신도 마치 제3세계의 지도자나 되는 것처럼 행세했다. 그는, 루마니아가 저개발 상태에 있어 산업화가 절박하게 요구되기 때문에 동구권 어느 나라보다도 제3세계의 입장을 잘 이해한다는 논리를 전개하고 있었다. 차우셰스쿠는 이렇게 행동함으로써 제3세계 국가들이 소련의 영향권에 들어 있는 어느 동구권 나라보다도 루마니아와의 경제 교류하기를 원할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또 루마니아 전문가들이 제3세계에서 환영받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최소한 초기에는 이러한 접근이 성공을 거두었다.
국제무대에서 자신의 입장을 강화하기 위한 차우셰스쿠의 또 다른 관심은 중동에 있었다. 1967년 이후 공산주의 국가 중에서는 루마니아가 유일하게 이스라엘과 대사를 교환하고 있었다. 소련과 이스라엘 간의 조정자 역할을 하겠다는 차우셰스쿠의 야심에 찬 행동이었다. 처음에는 국제적인 위기가 발생했을 때 각국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조정자로서의 흔적을 남기겠다는 자연스러운 바람으로 시작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개인적인 야욕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변질되어 버렸다. 노벨 평화상을 겨냥한 행동이었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루마니아의 수많은 기관들은 오랜 기간에 걸쳐 오슬로에 있던 노벨상 위원회에 열심히 로비를 했고, 루마니아 사람들 또한 시도 때도 없이 차우셰스쿠가 노벨 평화상 수상 후보로 지명되었다고 떠들고 다녔다. 노벨 평화상에 관한 규정에 의하면 모든 입법기관은 후보자를 추천할 수 있고, 또 후보 자격을 얻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루마니아의 보통사람들서는 알 길이 없었다. --- p.236

경제 문제에 대한 차우셰스쿠의 무지와 아첨꾼 이외의 이야기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던 그의 태도가 경제 파탄의 원인이 되었다. 또 소련에 대한 독립적인 자세와 1970년대의 석유파동이 루마니아 경제 위기에 큰 짐을 지웠다. 중화학 공업의 추진 과정이 혼란에 빠지면서 아무도 에너지 경비에 대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에 루마니아 공장들의 에너지 비용은 서방세계 동종 업계에 비하여 2~4배까지 높았다. 석유시장에서 유가가 높지 않고, 루마니아의 석유 생산이 국내 소비를 충당시킬 수 있었을 때는 이러한 문제가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1975년 이후 유가가 급등하자 루마니아 중화학 공업은 생산성을 잃어버렸다. 소련 또한 루마니아의 독자적인 노선에 대한 반감으로 저가의 소련 석유 공급을 중단하는 보복에 나서자 국제 시장에서 비싼 가격을 주고 석유를 사오는 방법밖에 없었다. 1976년에 들어서자 루마니아는 더 이상 석유를 자급자족할 수가 없게 되었고, 건설 중이던 대규모 정제공장은 기계 한 번 돌려보지 못했다.
제3세계 국가들에 대한 루마니아의 입장도 흔들거리기는 마찬가지였다. 루마니아가 아프리카 국가들하고 합작한 공장들을 지원하기 위해 보조하는 경비가 루마니아 전체 외화 수입을 초과했다. 또 제3세계에서 체면을 유지하기 위해 루마니아는 현지에 있던 대부분의 합작 공장 운영 책임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개발 도상국가?의 지원 규모는 소련에 다음가는 위치로까지 뛰어올랐다. 루마니아가 감당할 수 없는 사치였으나 차우셰스쿠 개인을 위해서는 필요한 경비였다. 문제는 현실이 아니었고, 경비의 많고 적음을 따지지 않은 차우셰스쿠 개인의 위신이었다. 차우셰스쿠는 현실에 대한 감각이 마비된 채 상상의 세계로 빠져 들어갔다. 1977년 지진 때 타계한 반체제 작가 알렉산드루 이바시우크는 당시의 루마니아를 이렇게 묘사했다. --- p.239

루마니아 역사도 차우셰스쿠의 우상화 작업에 동원되었다. 1857년 이후 루마니아의 정치 지도자들은 정당의 지도력뿐만 아니라 씨족에 대한 통솔력도 완전히 장악했기 때문에 브러티아누스와 같은 사람은 지지자들의 변함없는 충성을 만끽하기도 했다. 19세기 루마니아 정치 지도자들 대부분은 귀족들이어서 서방세계의 의회주의자들보다는 중세 봉건영주에 가까웠다. 군주에 대해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태도는 군주제도가 사라지고 공산주의가 태어난 후까지 관습처럼 남아 있었다. 루마니아 사람들은, 루마니아어에 뿌리가 남아 있는 라틴 어의 미사여구와 같이 영웅 숭배 관행을 당연시하여 지나치게 아첨하는 표현에 대해서도 익숙하다. --- p.249

외국으로부터 엘레나에게 주어지는 명예직, 서방 정치인들의 차우셰스쿠에 대한 찬사는 때를 놓치지 않고 루마니아 언론 매체를 장식해서 루마니아 인들의 떨어진 사기에 한 번 찬물을 끼얹었으며, 지식인들을 의기소침하게 만들었다. 베린데이는 “엘레나에게 새로운 명예 학위나 직함이 주어질 때마다 사람들의 사기는 더욱 떨어졌지요”라고 당시의 상황을 설명했다. 차우셰스쿠 사후 루마니아에서는 차우셰스쿠 부부 우상화 작업에 동참했던 서방세계의 정치인들과 지식인들을 비난했던 사람들 대부분이 비판적인 사람들이라고 무시하던 풍조가 사라졌다. 이런 와중에서도 루마니아 학술원은 특이한 예에 속한다. 엘레나가 지배하려는 태도를 보이자 학술원은 끝까지 지연작전으로 맞섰다. 1974년 이후 학술원 회원이었던 엘레나는 원장이 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회원들의 완강한 반대를 뚫지 못하고 꿈을 접어야 했다. 보복에 나선 엘레나는 전문 분야를 연구하는 여러 개의 연구소를 새로 세워 충성심을 보이는 연구진으로 채움으로써 학술원의 위상을 약화시켰다. --- p.261

차우셰스쿠의 우상화 작업이 급진전하자 중상급 지도 계층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1968년부터 1971년에 걸쳐 자존심 강한 루마니아 사람들도 차우셰스쿠에 대한 칭찬을 하면 반드시 혜택이 뒤따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971년 이후 비굴한 태도가 싫어서 사임한 후 정권과의 접촉을 일체 끊어 버린 사람들의 숫자는 많지 않다. 이온 일리에스쿠의 경력을 들여다보면 하나의 전형을 발견할 수 있다. 초기에 차우셰스쿠를 후원했던 그는 청년 공산주의자 동맹의 지도자로서 학원 숙청을 수행한 대가로 고속 승진을 했으며, 1971년 가을 차우셰스쿠의 문화정책을 비판하는 대담성을 보일 때까지 ‘총애 받는 그룹’에 속해 있었다. 당시 일리에스쿠는 중앙위원회에서 문화 업무를 담당하는 중책을 맡고 있었다. 그러나 1971년 이후 그는 ‘곁가지’로 전락하여 티미쇼아라와 같은 지방의 서기직을 맡거나 별로 중요치도 않은 수자원 관리 각료직을 맡는 데 만족해야만 되었다. 1989년 12월에는 과학서적 출판사 중에서 가장 큰 에디투라 테니카의 대표가 된다. 발레리우의 설명이 재미있다. “반체제 인사들에 대한 차우셰스쿠의 접근 방법은 참 묘했다. 우리들 사이에는 이런 이야기가 떠돌았다. ‘모두를 어항 속에 집어넣고 관리하는 거야.’” --- p.262

동료들을 대하는 차우셰스쿠의 태도는 편집증에 가까울 정도의 의심과 경멸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또 끝까지 자기를 지지하는 군중집회를 자기와 인민들 사이의 의사소통으로 이해했으며, 인민들의 자기에 대한 복종으로 생각했다. 1970년대 초반 이후 차우셰스쿠는 현실과의 접촉을 단절하기 시작했다. 이어 나이가 들어가고 당내에서도 토론이 시들해지자 인민과의 대화 통로로 군중집회를 선호하기에 이르렀다. 강제 동원된 사람들이 계속된 집회에 식상했을 때도 그런 태도는 마찬가지였다. 이런 마음가짐 때문에 중국이나 북한에서 있었던 환영 군중집회를 민감하게 받아들였다. 차우셰스쿠의 아시아 순방 때 동행했던 이온 일리에스쿠는 심각하게 생각했지만, 차우셰스쿠 자신은 중국과 북한이라는 나라가 속을 준비가 되어 있는 외국 손님들에게 눈가리개를 씌우는 가련한 사람들의 거대한 집단이라는 현실을 깨우치지 못하고 있었다.
또 다른 이유에서 중국 방문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마오쩌둥의 무자비했던 아내 장칭은 엘레나에게는 ‘하나의 불빛’이었다. 두 사람의 성장 배경은 매우 다르다. 장칭은, 권력에의 길을 그녀의 조그마한 매력에 빠져들었던 상해의 수많은 영화 제작자들하고 잠자리도 불사했던 품행이 난잡한 초년 ?우 시절부터 시작했다. 그런 행동도 자기의 이름을 알리는 데 도움이 되지 않자 장칭은 방향을 돌렸다. 마오쩌둥을 성적, 감상적으로 유혹하여 연안延安 시절 그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까지 부각시켰다. 성장 배경이 달랐음에도 불구하고 두 여인은 잔인하고 교육받지 못한 사람으로서 공통적으로 지식인들을 미워했으며, 추상적인 토론을 배제하고 재빨리 결론에 도달하는 간단한 공식을 쉽게 익히게 되었다. 두 여인은 또 최고 권력자의 없어서는 안 될 배우자이기도 했다. 왜곡된 전체주의적 사고에 젖어 있던 장칭이 여권의 선봉에 서서 중국이라는 남성 우월주의 사회에서도 크게 성공을 했기 때문에 엘레나에게는 각성제 역할을 했다. 엘레나도 장칭을 따라 정치적으로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게 된다. --- p.272

차우셰스쿠가 중국에서 보았던 현실은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강화와 차우셰스쿠 사상의 주입이라는 그의 편견이 옳았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던 한편, 마르크스-레닌주의와 강력한 민족주의가 손에 손을 잡고 전진해야 한다는 차우셰스쿠의 확신을 지원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중국을 보고 난 차우셰스쿠는 보다 엄격한 통제와 자급자족에 대한 필요성을 절감했고, 수십 년 공산주의를 실시했음에도 토론 문화와 개인주의가 여전했던 라틴 국가인 루마니아에 철저한 규율을 더욱 확고히 해야겠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중국과 북한에서 보았던 사회 동원체제가 차우셰스쿠의 말년 터무니없는 행동을 설명할 수 있는 근거이다. 차우셰스쿠는, 『공산당 선언』에서 묘사하고 있는 진정한 혁명을 달성하기 위해 비용의 적고 많음을 무시한 채 다시 한 번 남의 흉내 내기에 나섰다. 차우셰스쿠가 후에 시도했던 도시와 국가 전체의 표준화 작업은 1971년 아시아 방문 때 보고 배운 것이다. 아무런 특징이 없고 심미적으로 볼 때 소름 끼치는 ‘농업사회’의 틀 속에 도시와 국가를 집어넣겠다는 생각과 철저히 좌우 대칭을 이루면서 생동감을 전혀 느낄 수 없는 인공 도시 평양을 이상으로 삼아 부쿠레슈티를 그렇게 만들겠다는 노력이 표준화 작업의 골간이었다. --- p.274

적절한 방법을 동원한 압박의 강도는 더해 갔다. 1980년대 초반 타이프라이터를 소유한 사람들은 모두 경찰에 신고하여 허가증을 받아야만 되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런 설명도 없이 타이프라이터를 압수해 가 버렸다. 복사기를 가지고 있던 국영기업들에게는 풍자만화의 복사를 금지하라는 명령이 내려지기도 했다. 대부분의 동유럽 국가들과는 달리 루마니아에서는 지하 출판물을 찾는 사람들도 없었다. 종이를 문방구에서 대량으로 사는 사람들은 문방구 주인이 경찰에 정기적으로 보고하는 위험을 감수해야만 되었고, 조사까지 받았다. 비밀경찰의 위협과 협박 때문에 사람들은 순종적인 자세를 취하면서 10년 넘게 시키는 대로 살았다. 루마니아에는 소련의 사하로프 같은 사람도 없었고, 체코의 하벨 같은 사람도 없었으며, 또 암흑시대였던 1960년대와 70년대에 폴란드,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소련에서처럼 문화와 자유의 횃불을 높이 치켜든 무명의 반체제 투사들도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루마니아 사람들의 특이한 기질에 넘쳐나는 정보원, 상호 불신의 분위기, 차우셰스쿠 정권의 독특한 면까지 곁들여지자 저항 기미의 싹은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사회적 불만 억제에 모든 역량이 동원됐고, 지식인들의 활동에 관한 한 최소한의 노력으로도 그런 성과는 쉽사리 거둘 수 있었다. 루마니아 지식인들과 민초들 사이의 역사적으로 오래된 상호 불신은 비밀경찰의 역할을 수월하게 만들었다. 베이징과 평양 방문에서 돌아온 차우셰스쿠는 자기의 ‘문화혁명’ 정책에 반기를 드는 사람들에게는 마오쩌둥이나 김일성보다 훨씬 교묘한 방법으로 대응했다. 차우셰스쿠의 ‘작은 문화혁명’이 소수 지식인들의 분노를 자아냈으나 그는 저항의 물결을, 최소한 초기 국면에서는, 달래기도 하는 점잖은 태도로 대처했다. 파울 고마의 회고에 따르면 작가들이 느꼈던 분노는 차우셰스쿠의 새로운 정책을 수행하는 주구 두미트루 포페스쿠, 두미트루 기셰, 바실레 리콜레스쿠에 대한 공격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 p.276

차우셰스쿠의 스탈린식 경제원칙에 대한 굳건한 믿음과 특유의 정책은 루마니아를 파멸의 길로 내몰았다. 놀라운 것은 이런 실패가 오랜 기간에 걸쳐 준비되었다는 점이다. 만약 차우셰스쿠의 체제를 지원했던 두 개의 기둥인, 국제 금융기관의 협조 융자와 1976년까지 이어졌던 이란 팔레비 왕의 금융지원이 없었더라면 1989년 12월 혁명은 훨씬 앞당겨졌을 것이다. 국제 금융기관들은 소련에 과감하게 도전했던 조그마하고 이상한 나라 루마니아에 계속해서 대출하는 것을 특권으로 생각했고, 이란의 팔레비 왕은 차우셰스쿠에게 상상할 수 없이 큰 선물을 주었다. 이란산 석유를 고정가격으로 루마니아 농산물이나 공산품과 물물교환 했던 것이다. 그러나 서방 금융?관들의 대출금은 서방국가가 거들떠보지도 않은 제품을 생산하는 공장을 짓는 데 낭비되었고, 1978년 팔레비 왕의 몰락으로 루마니아는 이란산 석유를 더 이상 싼 가격으로 못 쓰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1978년 이후부터는 이란 산뿐만 아니라 소련산 석유도 모두 현금을 주어야만 살 수 있었던 반면, 은행 대출금으로 지은 공장들은 기름을 잡아먹는 귀신이 되어 있었다. 슬라티나에 있던 알루미늄 공장 하나가 사용했던 전력이 부쿠레슈티 전역에서 사용하던 전력과 맞먹었다. --- p.279

차우셰스쿠는 1970년대에 이미 칼로리 많은 음식을 피했다. 몸무게가 늘어나는 것을 깨달은 엘레나가 70년대 초반 다이어트를 시작하자 그도 따랐다. 차우셰스쿠가 즐겨 먹던 음식은 아주 간단했다. 토마토 스낵, 염소 치즈, 파 등 농민들이 즐겨 먹던 음식을 주로 찾았다. 차우셰스쿠 부부가 먹던 음식의 재료는 국영농장에서 공급했고, 식사 때마다 영양사와 감별사가 배석하였다. 해외여행 때도 차우셰스쿠는 자기가 먹을 음식을 가지고 다녔다. 차우셰스쿠가 먹을 음식은 소량이 먼저 연구실로 보내져 검사를 거친 다음 24시간 동안 별도로 보관했다. 이 부부가 언제나 함께 했던 점심에는 다른 사람들이 초청되는 경우가 드물었다. 식탁에서 엘레나가 늘어놓은 잔소리는 진절머리가 날 정도였다. --- p.282

종교 문제를 살펴보면 마르크스주의를 신봉하는 루마니아는 종교와 관련이 깊은 나라이다. 전체 인구의 약 50퍼센트가 일요일이면 교회를 간다고 한다. 대부분이 동방정교회 신도로 알려져 있다. 교회가 활성화되는 것은 물론, 신학 대학에도 신도들의 관심이 높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정부의 종교에 대한 태도는 양면성이 있다. 루마니아 정부가 무신론을 내세우는 것이 종교나 신학교의 교리에는 어긋날지 모르지만 영국의 기준으로 봤을 때 교회나 신앙심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가혹한 행위로는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정부가 성직자들의 급여를 보조했고, 또 새로 교회를 짓는데도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다. --- p.291

루마니아에서는 크리스마스도 공휴일이 아니고, 루마니아 외무부 장관이 부쿠레슈티에 있는 외국인 거주자들에게 크리스마스 카드와 연하장을 루마니아 친구들에게 보내지 말라고 권유했던 한편, 차우셰스쿠를 비난한다는 오해를 받을 수 있으므로 현지인을 만나지도 말라고 암시했던 사실을 스톡우드 추기경도 들었을 것이다. 옳지 못한 기준과 정확하지 못한 평가에 더불어 스톡우드 추기경은 소련의 철수 후에 루마니아 가톨릭에 가해진 박해와 루마니아 동방정교회가 차우셰스쿠와 가깝게 지내면서 누렸던 특혜를 구분하는 데도 실패했다. 모든 종교의 지도자들은 전국인민대회에 무임소 대의원 자격으로 참석했다. 루마니아 동방정교회의 부흥과 재정 지원을 맡고 있던 내무부 장관은 말 잘 듣는 성직자들을 주요 직책에 앉힌 다음 이들을 앞세워 미국이나 캐나다에 거주하던 루마니아 사람들을 차우셰스쿠 지원 세력으로 유인하는 책략도 구사했다. 이곳에 망명했던 동방정교회의 성직자들은 철저한 반공주의자였으며 한때는 철의 동맹의 열렬한 지지자들이기도 했지만 철의 동맹 회원이었던 성직자들이 방문하여 차우셰스쿠를 ‘민족주의자이자 우리와 같이 평범한 사람’이라고 치켜세우면 아무런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다. 루마니아 해외정보국 책임자로서 차우셰스쿠의 신뢰를 받다가 1978년 망명한 이온 파체파는 이런 방법으로 비밀경찰이 해외의 루마니아 인 사회에 침투했다고 증언했다. --- p.292

공산주의에 대한 얄팍한 지식 때문에 차우셰스쿠 또한 마르크스 이론과 스탈린의 산업주의에 거친 태도로 적응해 갔다. 자신의 이런 태도를 도농都農 간의 차이를 과감하게 없애는 혁명적인 조치라고 표현했다. 심미적이거나 역사적인 고려는 전혀 문제가 안 되었다. 오래 전부터 차우셰스쿠는 사유재산의 형태로 뿌리를 깊게 내리고 있는 부르주아 문화의 토대를 허물어 버리기 위해 ‘조직화·현대화·문명화’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그리고 실제로 지진이 일어났던 1977년 이전에도 이런 방향성을 가진 몇 가지 조치들이 취해졌다. 전후 바르샤바에 모였던 공산주의자들은 나치가 파괴해 버린 구 시가지들을 복원하기로 결정했으나, 차우셰스쿠만은 유서 깊은 마을들을 전부 없애 버리고, 주민들은 날림으로 지은 교외의 빈민가로 이주시키는 한편, 부쿠레슈티 유적지 일부도 흔적을 없애기로 결정한 후 도시 재개발 사업을 진행시키다가 다행히 그의 사후 막을 내렸다. --- p.304

세계 어느 곳에서도, 심지어 소련 내부에서조차 차우셰스쿠 시대의 루마니아처럼 강압체제가 횡행했던 곳은 없다. 루마니아 비밀경찰은 루마니아의 모든 것을 지배했다. 그들은 차우셰스쿠 자신보다도 더 무서운 존재였으며, 소련의 KGB를 능가하는 음흉한 분위기를 풍겼다. 루마니아 공산당과의 협조체제는 물론 소련의 KGB보다 훨씬 다양한 기능을 가지고 ?부 기관에 침투해 있었기 때문이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루마니아 해외 통상부는 단순히 비밀경찰 정보원들의 온상이 아니라 비밀경찰 본부와 다름이 없었다. 비밀경찰은 자체 조직으로서 무역회사, 해외 지주회사, 심지어 은행까지 운영했고, 공산당 내부의 정보망을 이용하기도 했다. --- p.316

비밀경찰은, 시류에 영합했던 사람들은 물론, 기회주의자, 공무원들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권력자에게 대단한 힘을 실어 주었다. 대부분의 비밀경찰 조직원들은 대학 교육까지 받았던 사람들이었으며, 전직 교사였다가 이아시의 반체제 인사가 되었던 단 페트레스쿠는 매우 총명한 아이들까지도 절망감 속에 비밀경찰이 되기를 원했다고 전했다. 고문과 협박을 보조 수단으로 사용했던 비밀경찰은 복잡한 지휘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차우셰스쿠는 필요한 경우에는 루마니아 인이 아닌 팔레스타인 정치깡패들을 동원하여 고문, 협박, 암살 등 갖은 잔악 행위도 불사했다. 이런 이유로 인하여 1989년 12월 22일부터 25일까지 부쿠레슈티 시가지를 휩쓸었던 폭력단과 암살단들이 ‘아랍 특공대’라는 소문도 있었다. --- p.327

비밀경찰은 숙청된 지도급 인사에 대해서도 특별 감시를 게을리 하지 않았으나, 반체제 인사들은 가끔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만날 수가 있었다. 심지어 비밀경찰 내부에도 인민들 사이의 폭넓은 불만을 못 들은 체하는 태도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소수세력이 있었다. 비록 몇몇은 안 되었지만 비밀경찰 정보원들 중에 반 차우셰스쿠 음모에 가담하여 심부름을 하거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것을 진지하게 고려한 사람들까지 있었다. 1971년 이후 실제로 몇 가지 음모가 있었다. 민중봉기를 이용해서 수년간 수동적인 자세를 취했던 지도부를 축출하자는 마지막 음모를 제외하면 모두 생각했던 차원에서 그쳤던 수준이었지만. --- p.341

모든 혁명은, 혁명에 참여했던 사람들까지도 집어삼키는 것이 상례이지만 루마니아 혁명은 그 포악성에 있어서 유별났다. 투명하지 못했던 발원지와 추진 세력의 미지근한 태도 때문에 처음에는 많은 사람들이 빠져들어 갔으나 곧바로 추방당하는 초라한 신세가 되었다. 혁명 초기에 루마니아 사람들이 가졌던 안도와 희망은 견딜 수 없는 고통으로 변해 갔다. --- p.361

많은 루마니아 사람들에게는 소련의 수용소 군도나 나치의 집단수용소에서 살아 나온 사람들의 쓰라린 기억만큼이나 잊혀지지 않은 아픔이 있다. 육체적인 고통보다 심리적인 압박감이었다. 물론 영양실조, 불법적이며 서투르기 짝이 없는 낙태수술, 나이를 핑계 삼아 수술이나 치료를 거부해서 죽은 수많은 노인들의 문제도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아마 차우셰스쿠는 이러한 통계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고아원이나 정신병동에서 신음하는 아이들에게는 눈길 한 번 준 적이 없었다. 노동자의 천국이라고 외치는 차우셰스쿠의 이미지에 먹칠을 할 것이 두려운 나머지 의사들까지 이러한 사실을 숨기고 있었다. --- p.365

더욱 경악스러운 일은, 잘사는 루마니아 사람들의 뇌리에 차우셰스쿠 시대의 망령이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다는 사실이다. 영국에서 교육을 받아 친영주의자라는 평판이 나 있던 유명한 의료 전문가 한 사람을 만나서 인터뷰를 하는 동안 나는, 진찰실 한 가운데서 분노에 찬 사람을 만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내가 차우셰스쿠에 대해서 물어보는 것에 대답하는 대신 내가 차우셰스쿠를 폄하하는 태도를 훨씬 더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듯했다. 그는 또 내가 자신의 감정을 몹시 상하게 했다는 보고를 상부에 올리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 거친 태도를 보고 나는, 차우셰스쿠 시대 때는 그럼직도 했었겠지만 1989년 12월 혁명에 의해 새로 들어선 정부가 이런 사람들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는 점에 놀라움을 금할 길이 없었다.
--- p.3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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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유익한 정보와 재미있는 내용이 듬뿍 담긴 책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은 대단히 흥미로운 일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독자들의 주위를 환기시킬 수 있는 능력 있는 저자가 썼다는 사실이 더욱 관심을 끄는 것은 물론, 그 저자까지 돋보이게 한다. 충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을 뿐 아니라 공산주의자의 탈을 쓴 드라큘라의 추문에 대한 적나라한 고발을 줄거리로 하고 있는 이 책은 4반세기가 넘는 기간 동안 세계의 묵인 아래 아무런 저항 없이 탐욕스럽고 혐오스러운 차우셰스쿠와 엘레나 부부가 한 나라를 어떻게 유린했는가를 철저하게 분석하고 있다.
리스자드 카푸친스키 (작가)
에드워드 베르는 공산주의자의 탈을 쓴 루마니아의 독재자 차우셰스쿠가 장기간에 걸쳐 병적인 만행을 어떻게 저질렀는지를 역사적으로 잘 추적했다. “나 같은 사람은 500년 만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하다”는 터무니없는 자신감이 엘레나와 함께 루마니아 전역에 천박스러운 기회주의자들을 양산해 놓았다. 방대한 조직의 비밀경찰은 전 국토를 안개 자욱하게 만들어 인민들이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괴이한 공산주의 우상에 대한 가장 섬세한 분석이다.
Publishers Week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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