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소년 시절부터 ‘예술’을 정의내릴 수 없었고, 철학적으로 알고 싶어하지도 않았다. 그것을 다만 ‘좋은 것’, ‘멋있는 것’, ‘아름다운 것’으로 믿어왔었고, ‘시’를 정의할 수 없었지만 무엇인가를 써서 그것을 ‘시’라고 불렀다. 나는 어떤 글을 시라고 부르고, 어떤 그림이나 사진이 미술인지를 구별해왔었고, 어떤 소리를 ‘음악’이라고 구별할 수 있다고 믿어왔고, 어떤 사람들을 ‘예술가’, ‘시인’, ‘소설가’, ‘화가’, ‘조각가’, ‘음악가’라고 분류할 수 있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세잔, 피카소, 뒤샹, 칸딘스키, 클레, 폴록, 워홀 등의 화가들, 브르통으로 대표되는 초현실주의자들이나 이상 같은 이상한 시인들, 존 케이지 같은 작곡가, 크리스토 같은 설치 미술가들, 백남준 같은 전자설치 조각가들이 출현하고, 오늘날 수많은 갤러리에서 볼 수 있는 쓰레기나 부서진 자동차, 넝마 같은 것들을 전시하는 이른바 전위적인 설치 미술가들을 만나면서부터 나는 갈수록 ‘예술’이 무엇인지 알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은 예술과 비非예술작품을 구별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함축한다. 동서의 유명한 예술가, 시인 그리고 철학자들의 수많은 ‘예술’의 정의를 접해봐도 어느 것 하나 만족스럽지 않았다. ---‘둥지의 예술철학’ 박이문
서양에서는 어떤 화가가 자기의 그림을 그려놓고 내가 이 그림을 왜 그렸는지 모르겠다고 할 수 있다. 뭘 위해서 그렸는지 모르겠다고 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이 그림의 해석은 보는 사람의 자유다, 이렇게 볼 수도 있고 저렇게 볼 수도 있다, 이것이 예술이다, 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동아시아의 예술에서는 이런 것들이 통하지 않는다. 특히 문인화文人畵로 말하자면, 그림을 그린 화가에게 그림을 설명해보라 했을 때 어떻게 해서 이 그림이 나왔는지 모르겠다, 이 그림이 무얼 뜻하는지 모르겠다고 하는 것은 일단 문제가 된다. 사실 왜 그렸는지 모를 수는 있다. 그림이 무의식에서 나올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의 무의식을 설명할 줄은 알아야 한다. 왜 그렸는지 정확한 이유를 모르거나 자기의 무의식 세계가 어떤지 모르겠다는 것은 동아시아 예술에서 허용될 수 없는 것이다.--- ‘예술적 상상력과 동양의 사고’임태승
작가든 감상자든 프로그램으로 된 가상현실에 참여할 뿐 주체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은 예술에서 가장 중요한 몫인 “예술 창작 혹은 창의의 주도권”의 상실을 말해준다. 예를 들어 예술작품을 통로로 한 다중 접속의 소통도 기획된 대화의 교류일 뿐 소통 자체의 주제를 참여자가 생산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디지털 예술은 미리 프로그램된 가상현실에 들어가는 것인데, 그 주도권이 구획된 예술에 있는 것이기에 그것의 미디어(소통)적인 기능은 진정한 상호작용성을 구현하지 못한다. 기계를 중심으로 한 다자간 소통은 다만 “기획된” 화제만으로 대화를 나누는 것이니, 대화 자체 혹은 소통 자체의 주제를 참여자는 생산할 수 없게 된다.---‘예술적 상상력과 동양의 사고’임태승
동일성 신화가 구축한 철옹성 같은 형이상학의 집, 즉 동일성 철학의 건축물들constructions이 내파內破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였다. 그것은 한마디로 말해 ‘니체의 망치질’에 의해서였다. 하지만 망치의 역부족은 이내 니체를 ‘힘에의 의지’로 무장시켰고, “나는 다이너마이트다”라고 외치게 했다. 로고스가 지어온 형이상학이라는 유령의 집을 허물기 위해서, 특히 헤겔의 절대이념이 지은 사이비사원을 파괴하기 위해서 니체는 디오니소스적인 힘에의 의지가 필요했다. (…) 그러나 동일성 신화를 해체하려는 니체의 고뇌와 노력에도 불구하고 차이의 철학은 별로 주목받지 못했다. 로고스의 신화를 폭로하고 일자적 토대에 망치질해도, 심지어 기독교의 “신은 죽었다”고 외쳐대도 그를 주목하거나 지지하는 이는 흔치 않았다. 그의 망치 소리는 철옹성을 뒤흔들지 못했고, 그 안의 성주들도 괴롭히지 못했다. 성채가 무너지기 시작한 것은 그가 죽은 지(1900년) 반세기쯤 지나서의 일이었다. 1960년대에 들어서야 비로소 니체는 부활했고, 철학의 역사도 반성하기 시작했다. 호기심 많은 사람일수록 동일성보다 차이를, 같음보다 다름을 더 주목하게 되었기 때문이다.---‘현대미술과 철학의 이중주' 이광래
의인법적인 은유를 벗어나 객관적이고 실질적인 방식으로 몸 공간과 유비쿼터스적인 전자물질공간이 하나로 연결된다는 것은 존재론적/인식론적인 차원에서 대대적인 혁명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이 혁명이 완결되기 위해서는 유비쿼터스 기술과 사이보그 기술이 결합되어야 한다. 사이보그 기술은 신경계와 전자계의 완전한 결합을 노린다. 사이보그 기술이 전자계와 물질계의 완전한 결합을 노리는 유비쿼터스 기술과 완전하게 결합하게 되면, 신경계와 전자계 그리고 물질계가 하나로 통일되는 그야말로 은유적인 의미 차원을 넘어서서 실질적인 차원에서 존재론적인 대혁명이 일어나는 것이다.
--- ‘철학의 눈으로 본 매체’ 조광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