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린스턴은 오히려 성경에 대한 내 생각을 바꿔놓았다. 물론 내가 자진해서 생각을 바꾼 것은 아니었다. 나는 끊임없이 저항하고 발버둥 쳤다. 내 믿음을 지켜달라고 기도했고, 믿음을 지키기 위해 치열하게 싸웠다. 온 힘을 다해 저항했다. 그러나 하나님께 진실로 헌신한다면 진리에도 완전히 헌신해야 한다는 생각을 떨칠 수는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성경에는 오류가 있을 수 없다는 내 생각이 틀렸다는 사실이 점점 명백해졌다. 성경에도 오류가 있다는 해석을 받아들일 것인지, 아니면 지금까지 믿던 대로 진리가 나를 인도할 것이란 믿음을 고수할 것인지 선택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다. 진실은 진실일 뿐이었고, 진실이 아닌 것은 진실이 아닐 뿐이었다. --- 프롤로그 “열린 마음으로 성경의 실체에 다가가기” 중에서
역사비평적 접근법은 성경의 저자들이 우리 시대가 아닌 그들의 시대와 공간에서 살았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들의 마음을 지배하던 문화적이고 종교적인 전제는 지금과 달랐을 가능성이 크다. 역사비평적 방법론은 저자들이 어떤 의도에서 그런 글을 썼는가를 찾아내려 애쓴다. 이런 관점에서 저자마다 고유한 글쓰기 방식이 있었으리라 가정한다. 신약성서에서 마태복음의 저자는 누가와 똑같이 말하지 않는다. 마가복음도 요한복음과 다르다. 모든 책이 다르고, 모든 책에 메시지가 담겨 있으며, 모든 메시지가 귀담아 들을 만하다. --- 1장 “성경을 읽는 또다른 방법” 중에서
성경은 이해관계를 초월해 객관적으로 쓰인 역사책이 아니다. 성경에 포함된 어떤 책도 그렇지 않다. 여러분이 법정의 재판관인데 목격자들의 증언이 일치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어떤 목격자의 증언도 100퍼센트 사실이라고 가정하지 않는 지점에서 판단을 시작해야 할 것이다. 누군가, 또는 모두가 뭔가를 잘못 알고 있는 게 확실하다. 따라서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를 알아내는 것이 급선무다. 신약성서와 같은 고대 문헌도 마찬가지다. 증언과 역사적 사실이 충돌한다면, 모든 목격자가 옳을 수는 없다. 따라서 우리는 누구의 말이 가장 사실에 가까운지 찾아낼 방법을 알아야 한다. --- 2장 “성경 속 모순 고찰하기” 중에서
예수가 두 복음서에서 말하고 행하며 경험한 모든 것을 짜 맞추어 하나의 포괄적인 이야기로 만들면,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 담긴 메시지가 완전히 사라진다. 예수는 누가복음의 예수처럼 확신에 찬 모습이므로 마가복음의 예수처럼 깊은 고뇌에 빠지지 않을 것이고, 또 마가복음의 예수처럼 절망에 빠져 허우적거리기 때문에 누가복음의 예수처럼 차분하게 상황을 파악할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절망에 찬 절규를 내뱉는 동시에 하나님을 믿고 온몸을 맡긴다고 말할 것이기 때문에, 예수가 마지막에 남긴 말마저 완전히 다른 뜻을 갖게 된다. 마태복음과 요한복음까지 이런 식으로 짜깁기하면 예수가 괴상망측하게 합성된 인물로 변해버리기 때문에, 복음서에 기록된 사건이 거짓말에 불과하다는 잘못된 생각에 빠질 위험이 있다. 이런 식으로 성경의 이야기에 접근하면 결국 저자의 양심을 빼앗는 짓이고, 저자가 이야기를 통해 전하려던 의미까지 빼앗게 된다. --- 3장 “다른 관점, 다른 믿음, 다른 메시지” 중에서
네 복음서는 익명으로 쓰였고, 저자들 중 누구도 자신이 목격자라고 주장하지 않았다. ‘마태복음’처럼 복음서 제목에 이름이 붙어 있긴 하지만, 사실 그 제목들은 나중에 붙여진 것이다. 즉 복음을 다른 식으로 해석한 권위자가 누구인지 독자에게 알리기 위해 편집자가 덧붙인 제목이다. 복음서가 처음 쓰였을 때 현재의 제목이 아니었다는 점은 조금만 생각해 보면 분명해진다. 마태복음을 쓴 저자는 자신의 책에 ‘마태복음The Gospel according to Mattew’이란 제목을 붙이지 않았다. ‘마태복음’이란 제목을 붙인 사람들이 그 복음을 마태가 썼을 거라고 생각한 것뿐이다. 저자들은 복음서 제목에 자신의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 4장 “누가 성경을 기록했을까” 중에서
주일 성경학교나 목사의 설교를 통해 예수가 종말론을 가르쳤다는 말을 들어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 전역의 유수한 신학교와 신학대학원에서는 오래전부터 이렇게 가르쳤다. 예수를 종말론자로 해석하는 것은 모두 신약성경의 복음서에 근거한 것이며, 앞에서 제시한 진정성의 원칙에도 맞아떨어진다.
4장에서도 언급했듯이, 공관복음에서 예수는 곧 다가올 하나님 나라를 설교한다. 하나님 나라는 ‘하늘’, 즉 우리가 죽어서 가는 곳에 있지 않다(7장에서 다시 다루겠지만, 후기 기독교 사회에서는 하나님 나라가 ‘하늘’에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 나라는 이 땅에서 실현되는 나라로, 하나님이 이 땅에서 구벼주를 통해 지배하며,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되는 유토피아이다. 예수는 마지막 복음인 요한복음에서만 하나님 나라가 곧 도래할 거라는 설교를 하지 않는다. 요한복음을 쓸 때까지 하나님 나라가 오지 않는 바람에, 요한복음 저자가 자기 시대에 맞게 예수의 메시지를 재해석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쓰인 복음들은 곧 도래할 하나님 나라에 초점을 맞추었다. --- 5장 “역사적 예수를 찾아서” 중에서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쓰인 책이 아니라 지극히 인간다운 책이라 생각한다. 물론 성경의 많은 가르침이 내게 기운을 주지만, 성경 뒤에 하나님의 손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성경의 저자들이 쓴 원본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것도 아니다. 성경은 군데군데가 인간의 손으로 변경된 필사본이며, 우리가 성서라 생각하는 책들은 작성되고 나서 수백 년이 지난 후에야 정전으로 인정을 받았다. 또한 그 과정에 하나님이 개입하지도 않았다. 어떤 책이 올바른 책인지 결정하려고 안간힘을 쓴 교회 지도자들, 결국 인간의 땀으로 이루어낸 결과물이다.
믿음이 깊은 기독교인이나 신학자는 그 과정을 다른 눈으로 보며, 하나님의 손이 그 기나긴 과정에 끊임없이 개입했다고 주장한다. 역사학자인 내가 그런 주장에 왈가왈부할 수는 없지만, 신이 개입했든 그렇지 않았든 간에 그것은 아주 인간적인 과정이었다. --- 6장 “성경은 어떻게 완성됐을까” 중에서
초기 기독교의 발달 과정에서 연속성을 강조하든 단절을 강조하든 간에, 훗날 예수를 따른 사람들을 지배한 믿음과 관점이 예수의 종교 자체와 사뭇 달랐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신학적 해석의 혁신을 꾀하며 오늘날의 기독교 교리를 만들어낸 사람은 비단 바울만이 아니다. 그 변화 과정에는 수많은 기독교인이 개입했다. 이름 없는 기독교 사상가와 설교자 들이 예수의 가르침을 그 시대에 맞게 재해석했고, 그런 재해석은 당시의 역사적·문화적 요인의 영향을 받았다. 먼 훗날을 사는 우리는 그 요인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짐작하고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기독교는 하루아침에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었다. 여러 해석과 교리, 관점과 기준 등 이 경쟁했고, 갈등과 다툼을 겪으며 오랜 시간에 걸쳐 탄생한 것이다. 기독교라는 종교는 역사적·문화적인 의미를 지닌 인간의 발명품이었다. 아마도 서구 문명에서 가장 위대한 발명품이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7장 “기독교인이 만들어낸 것들” 중에서
성경을 여전히 하나님께 영감을 받아 쓰인 책이라고 믿더라도 그런 믿음을 업신여길 생각은 조금도 없다. 그러나 성경을 신앙적으로 읽는 것만큼이나 역사적으로 읽는 것도 가치 있는 일이다. 역사적으로 읽으면 성경의 많은 결함이 눈에 띈다. 모순과 차이, 잘못된 주장, 불가능한 선언, 해로운 이데올로기까지 모두 찾아낼 수 있다. 성경을 역사적인 관점으로 읽을 때, 우리는 성경을 완전히 새로운 시각에서 이해하며 성경에 담긴 다양한 메시지를 찾아낼 수 있다. 성경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성경에서 뭔가를 배울 수 있다. 성경은 반드시 읽고 연구해야 마땅한 책이다. 성경은 단순한 신앙서적이 아니다. 생각과 믿음, 경험과 활동, 사랑과 증오, 편견 등 서양 문명의 기초를 닦은 사람들의 의견이 집대성된 역사적인 기록이다. 성경은 우리 삶의 중요한 문제들, 예컨대 우리가 왜 여기 있고, 무엇을 해야 하며, 이 세계를 어떻게 만들어가야 하는지를 생각하는 데 도움을 주는 책이다. 성경은 실제 사례를 들어 교훈을 주고 훈계하는 책이다. 또 우리에게 진실을 추구하고, 억압에 맞서 싸우며, 정의를 위해 노력하고, 평화를 지키라고 촉구하는 책이다. 성경은 지금보다 더 충만한 삶을 살라는 의욕을 일깨우고, 우리 자신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살라고 용기를 북돋우는 책이다.
--- 에필로그 “믿음은 가능한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