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주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가이사는 주가 아니다’ 라고 말하는 것을 함축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가이사가 주이다’라고 말하지는 않는 것을 함축한다. 이것은 무엇을 부정하느냐 하는 작은 표현의 차이일 뿐이지만 내게는 이것이 신약성서의 증언에 대해 많은 것을 설명해 준다. ‘예수님이 주이다’라는 확언에 요구되는 것은 지상의 주인들에 대한 단호한 공격이라기보다 그들의 교만한 주장들에 대한 세심하게 계획된 침묵이다. 가이사의 부풀려진 자기주장에 대한 옳은 대응은 메시아 예수의 참된 의미에 대해 더 크게 선포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주이다’라는 선언에 가이사는 주가 아니라는 믿음이 반드시 동반되지는 않는다.
---「서문」중에서
요한계시록 연구에 있어서 제국 비평은 오래전부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 왔는데 이제는 신약성서 전체에 적용되고 있다. 이 방법론은 복음이 영적인 메시지뿐 아니라 제국에 대하여 전복적인 메시지를 포함하고 있으며 복음이 강력한 구속의 메시지이자 해방의 외침이었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주의를 기울여 읽으면 우리는 신약성서가 때로 가이사를 공격할 뿐 아니라 또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완전히 다른 질서를 가진 사회를 만들 것을 요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을 왕으로 모셔 그분 말씀에 귀 기울이고, 로마 황제나 그의 법이 아닌 예수님과 그분의 윤리적 비전이 명하는 대로 살며, 십자가를 따라 희생과 자기부인을 추구하는 사회, 가이사가 아니라 왕이신 예수를 경배하는 사회 말이다.
만일 이러한 접근법이 정당하다면, 그 함의는 실로 엄청나다. 그런데 이 정당성이 바로 문제다. 많은 이들이 이 접근법이 정당한지 묻고 있다. 우리는 로마 제국과 가이사를 신약성서에 대입하여 읽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신약성서 안에 실제로 있는 것을 읽고 있는 것인가? 우리가 제국이라는 주제를 신약성서에 끌고 들어오면 자연히 그 주제는 모든 곳에서 발견될 것이다. 그렇다면 제국이라는 주제는 단지 우리가 본문에 투사한 것인가? 이 책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답하고자 한다.
---「머리말」중에서
로마 제국은 광대했고, 황제들이 제국을 다스리는 데 필요한 행정적 수단이 많지 않았다. 로마 제국은 야만적인 폭력이나 개인의 지배력을 보여 주는 수단에 의존하기보다는, 로마의 지배에 대한 전통적 이데올로기를 제국이 하나의 가정이라는 개념에 연결시키는 전략을 취했다. 동전, 조각상, 제국 제의는 모두 이러한 전통적인 이데올로기와 연속성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황제를 대중 앞에 내세웠다.60 사람들은 자신들이 가문의 조상들을 숭배하듯 아우구스투스를 숭배했고, 그를 주인이자 왕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는 신중하게 자신의 역할을 권력에 관한 전통적인 상징과 전형에 연결시켰다. 제국의 주인으로서 그는 일개 개인이 아니라 로마 문명 전체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제국의 구성원들에게 그의 이미지와 이야기는 단지 아우구스투스라는 개인뿐 아니라, 질서 잡힌 세계적 공동체이자 구성원들에게 혜택을 제공하는 제국을 상기시켰다. 제국은 신들이 임명한 직무를 수행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제국은 힘과 권력의 사용을 선호했다. 제국은 계층적인 권력 구조와 안정성을 중시하는 사회 구조 안에서 덕스러운 삶을 영위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제국은 세계적이었고 계층화 작업은 정복된 국가들에서 국제적으로 시행되었다. 정복된 엘리트에게는 혜택을 제공했지만 ‘시시한 부류’의 사람들에게는 별다른 혜택을 주지 않았다. 제국은 전통을 중시했고, 제국의 영광은 엘리트들의 자기자랑과 연결되었다. 제국은 명예를 중시했고 명예롭게 행동하는 자들에게 물질적 보상을 제공했다.
제국은 로마다움을 상징했던 황제의 호의적이고 광범위한 영향력 아래에 있는 거대한 가정이었다. 칼리굴라 같은 예외도 있었지만, 아우구스투스와 그의 후계자들은 과대망상적인 권력욕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역민들에게 ‘로마니타스’의 전형과 혜택을 가르치고 제국의 사업을 촉진시키기 위해 제국 제의를 사용했다. 신약성서가 전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메시지는 로마 제국의 사업과 다른 점이 많다. 참된 왕과 주의 정체성은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차이를 보이며, 그 개념은 다른 여러 차이점을 내포하고 있다.
---「1장」중에서
초기 기독교와 로마 제국에 대한 학자들의 관심이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역사적 연구는 우리가 로마 제국의 맥락을 이해하는 데에 매우 중요하다. 역사적 연구는 서로 사뭇 다르지만 서로 맞물려 있기도 한, 1세기 말에 존재하고 있던 세 개의 종교 분파에 집중해 왔다. 제국 제의, 유대교, 초기기독교가 그것이다. 최근의 사회문화적 이데올로기들은 고대의 저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던 사상과 세력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이 저자들은 깊게 연관되어 있는 저 문화들 속에 살았고 그 속에서 글을 썼다(심지어 순교하기까지 했을지 모른다). 문학적으로 볼 때, 묵시문학과 같이 익숙한 의사소통 수단은 저자들이 가치 있고 적절하다고 간주한 역사적?이념적 특징을 전달했고 독자들은 그것을 알아보았다. 신약성서를 역사적?이념적?문학적으로 연구함으로써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사명을 더 잘 알고,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더 잘 이해하고,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우리의 문화 속에서 어떻게 그리스도를 경배하고 따라야 할지를 온전히 파악할 것을 추구하는 것이다.
---「2장」중에서
로마서에 대한 이 장의 연구는 이스라엘의 신앙이 언제나 사회정치적이었기 때문에 바울의 복음도 사회정치적 함의를 가지고 있음을 밝혀냈다. 바울은 그의 신학적 담론에서 제국적인 개념들을 분명히 환기시키고 그것들을 수정하고 있다. 그의 신학의 주요 원천은 물론 신약성서와 예수 전승이다. 동시에 그는 로마 제국의 맥락 속에 있는 주제들, 언어, 특징들과 공명한다. 로마의 동전, 비문, 문학, 봉헌물, 종교와 조금이라도 친숙한 사람이라면 바울이 저항의 숨겨진 지문을 사용하고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퀴리오스’와 ‘유앙겔리온’과 같이 바울이 사용하는 용어들이 로마적 용법들과 병렬적 관계에 놓여 있다는 점이 아니라, 그러한 용어들이 종말론적?메시아적 서사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 때문에 로마서는 암묵적으로 반제국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바울의 ‘유앙겔리온’은 하나님의 ‘디카이오쉬네’가 믿는 유대인과 그리스인 모두에게 두루 미친다는 왕의 선언이다. 그러나 그 선언은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동시에 드러내기에(롬 1:18) 권력자들에게는 나쁜 소식이다. 바울이 로마인들에게 쓴 편지는 참된 주는 오직한 분 예수 그리스도뿐이라는 담대한 주장을 제국의 심장부에 전달한다. 군대의 힘으로 유지되는 로마 권력의 폭력성뿐 아니라 로마 종교의 어리석음까지도 모두 그리스도의 나라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결국 무너지고 말 것이다. 만일 로마의 한 관리가 로마서를 읽었다면, 그 편지는 동방의 미신에 빠진 어느 열광주의자가 토해 내는 열변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것은 좋게 보면 정치적 악의를 품고 있는, 나쁘게 보면 선동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편지로 읽혔을 것이다.
---「7장」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