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전 중에 접촉 사고를 당한 어느 교민이 현장에서 상대 차 운전자와 대화를 나누는 중에 ‘Sorry’라는 말을 입에 올렸다가 낭패를 봤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잘잘못을 떠나 사고 발생에 대한 한 명의 당사자로서 도의적인 측면에서 상대방에게 예의를 갖추며 던진 그 말이 스스로 잘못을 인정하고 사죄를 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져 꼼짝없이 책임을 지게 되었다는 웃지 못할 내용이었다.
지금의 내가 그와 똑같은 입장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보고 내용을 직접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테리가 작성한 사고 보고서에는 실제의 잘못은 ‘머트리얼 핸들러(Material Handler)’ 라울에게 있지만 그러한 잘못을 미연에 방지하지 못한 소트와 오퍼레이터의 책임도 배제할 수 없다는 내용이 담겨 있을 것으로 예상되었고, 특히 소트는 스스로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였다는 내용이 추가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가능케 하였다. 에러 발생에 대한 기록은 어쩔 수가 없지만 나에 대한 책임은 없는 것으로 하겠다는 슈퍼바이저의 결론을 얻어냈음에도 돌아나오는 기분이 가볍지가 않았다.
처한 상황이나 입장에 따라 자신의 의중을 적절하게 표현할 능력이 아직도 부족한 사람으로써 상황에 따라 액면 그대로 ‘미안하다’는 뜻에서부터 ‘유감스럽다’, ‘안타깝다’, 더 나아가 크고 작은 결례나 잘못에 대한 사죄의 뜻까지 담겨 있는 ‘I’m sorry’가 경우에 따라 뜻밖의 족쇄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깊게 인식하며, 앞으로는 가장 아껴야 할 말임을 명심하였다. -P266
한동안 몸무게가 크게 줄었던 일 외에는 두 해가 지나도록 건강에 이렇다 할 이상이 없었던 것을 큰 다행으로 여겨왔다. 이상이 없었다기보다는 이상을 발견할 만한 겨를이 없었고 웬만한 증세 정도야 묻어버릴 수밖에 없는 생활이었다. 속된 말로 아플 시간조차 없었다는 말이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의료 보험의 혜택이 없을 때는 비싼 의료비 부담 때문에, 의료 보험 혜택을 받게 된 후에는 언어 소통 문제 등 번거로움을 이유로, 이래저래 병원을 멀리했고, 더구나 미국인 닥터 오피스를 찾아나선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저 별탈이 없기를 바라며 타이레놀, 아스피린을 만병 통치약으로 삼아 지내왔다.
서너 차례 참을 수 없는 복통을 견뎌낸 적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음식을 의심하며 급체로만 여겼고, 혹시 오래 전에 경험한 위궤양이 재발하지 않았나 하는 정도의 짧은 걱정으로 덮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회사에서 일을 하다가 똑같은 통증을 다시 느끼기 시작하였는데, 참을 수 없는 고통으로 그만 휴게실에 드러눕고 말았다. 사색이 되어 달려온 슈퍼바이저를 안심시켜야 했고, 앰뷸런스의 사이렌 소리를 들어서도 안 된다는 생각에 이를 악물었다. 나도 모르게 ‘살려 달라’며 어머니를 찾았다. 등줄기는 흘러내린 식은땀으로 흥건하였다.
그 동안 주기적으로 나타난 복통이 급체가 아니었다는 직감에 초조해지기 시작한 나는 닥터 오피스에 예약하기를 더 이상 망설일 수가 없었다. 이 곳 저 곳을 찾아다니며 치른 초음파 검사 등 몇 가지 검사 결과를 종합한 패밀리 닥터 카프만은 ‘담석증’이라는 진단을 내렸고 악화된 상태로 보아 수술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의견과 함께 전문의에게 예약을 서둘러주었다.
‘담석증’이라니 천만다행이었다. 이 곳에 오기 전까지 정기적으로 받아온 건강 진단을 통하여 언제부턴가 담낭에 돌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왔었다. 그리고 해를 더하면서 그 숫자가 늘어가고 있다는 사실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나마 큰 걱정을 덜 수 있었다. -P287
택스 리턴(Tax Return), 이 나라에서는 세금 정산 보고를 이렇게 말한다.
나의 짧은 영어 실력으로는 ‘세금 환불’이라고 해석할 수밖에 없었던 시절, 이 나라의 각종 제도에 어설픈 나로서는 주위 교민들의 오가는 이야기를 귀동냥한 지식으로 이 나라에서는 납세자가 일 년에 한 번 세금 정산 보고를 하기만 하면 이미 낸 세금의 일정 부분을 모두 돌려받는 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 얼마나 낯 붉어지는 일인가? 택스 리턴은 세금 환불이라는 의미가 아니고 세금 보고서 용지에 필요한 사항을 기재해서 세무 당국에 제출하는 서류를 말한단다. 따라서 이는 택스 리포트(Tax Report)와 같은 세금 보고라는 의미이고, 돌려받는 세금 환불은 택스 리펀드(Tax Refund)라고 해야 맞다고 한다. 이렇게 지극히 상식적인 내용을 정확하게 아는 데 3년이란 세월이 흘렀으니 혼자 덜컥 하고 느끼는 부끄러움이 클 수밖에 없다. P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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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국으로부터 우송되어 온 ‘EAC(Employment Authorization Card)’를 건네주는 집사람의 표정이 무거워 보이는 것이 이상하였다. 학교에서 돌아와 그 카드를 보고는 좋아라 하며 아빠한테 빨리 알려준다고 전화를 했는데 누군가가 아빠를 ‘임씨’라고 부르는 소리를 엿듣고는 아이가 그렇게 속상해하며 저녁도 먹지 않았다고 귀띔하였다.
“네가 뭘 잘 모르고 있는 거야. ‘임씨’가 뭐가 어때서 그래? ‘미스터 임’을 우리말로 하면 ‘임씨’잖아?”
“아니에요. 저도 알아요. 한국에서는 아빠를 그렇게 부르는 사람이 없었잖아요? 아빠는 ‘임부장님’이었잖아요.”
“그래, 그런데 지금은…. 그리고 뭐라고 부르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잖아.”
“아빠를 그렇게 부르는 것이 저는 정말 싫었어요. 외국인 회사에 들어가시는 게 아빠의 꿈이셨고 이제 카드도 나왔으니 미국인 회사로 옮기시면 안 돼요?”- P57
오래지 않아 마주한 풍채 좋은 중년의 남자 직원은 입사 지원서의 과거 경력을 이미 살핀 듯, 대뜸 화이트 칼라 직에, 그것도 관리직에만 오래도록 있었던 사람이 왜 이런 회사에 입사를 희망하느냐고 물었다. 정식 면접도 아니고 입사 지원서의 작성 내용을 훑어보며 확인하는 간단한 면담인데도 왜 그리 떨리던지.
그는 닭고기 가공 회사에서 해야 하는 어려운 일들을 자세히 설명해준 다음 이렇게 힘든 육체적 노동을 할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 또 시간급을 알려주면서는 이렇게 급여가 좋은 직장을 놔두고 무슨 이유로 이 나라에 왔느냐며 의아해하는 눈길을 준다. 더듬거리는 영어로 그가 묻는 내용에 대한 나의 입장을 자세히 설명할 능력도 부족하였지만 그 친구가 던지는 질문에서 쪽박을 깨려드는 의중을 읽었기에 고개를 떨굴 수밖에 없었다. 그저 할 수 있다고, 충분히 해낼 자신이 있다고, 그러니 일을 할 수 있게 해달라고 매달리는 말만 두세 번 반복하였다. ‘Good luck’이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듣고 일어서긴 하였지만 기대하기 힘들 것 같다는 예견이 차라리 홀가분했다.
‘그래, 차라리 빈칸으로 남겨둘걸….’ -P60
다섯 명이나 되는 면접관을 앞에 두고 마주앉은 나는 꼼짝없이 법정에 선 피고인 꼴이 되고 말았다. 면접관들의 기대치에 부응하는 정답을 찾아 조리 있게 답변을 해도 시원치 않을 자리에서 그들이 묻는 질문이 무슨 내용인지조차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으니 이보다 황당한 일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이런 답답한 친구가 어떻게 이 자리에까지 오게 되었는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둥거리기 시작하는 면접관 앞에서 ‘Pardon?’, ‘Excuse me?’를 연발하고, 더듬거리는 동문서답으로 더 이상의 시간을 끌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신을 차려야 했다.
“가지고 있는 질문지를 좀 봅시다.”
당돌하게 나오는 나의 태도에 의아해하는 면접관들에게 영어로 듣고 말하기에 아직 어려움이 있다는 사실과 듣고 말하기보다는 읽고 쓰기가 다소 나은 이유를 설명하였다. 그리고 질문지를 보여주면 거기에 대하여 할 수 있는 데까지 답변을 하겠다고 나섰다. 인사부 실무자로 보이는 젊은 친구가 웃으면서 가지고 있던 표준 질문지를 건네주었다. - P144
“승진 안 할 거야?”
나에게 있어 가장 큰 ‘백’인 슈퍼바이저 짐이 나를 만날 때마다 건네는 이 말을 들은 지도 벌써 오래 되었다. 그리고 우리 파트를 담당하고 있는 인사부 직원 빌도 여러 차례 나의 의사를 확인하면서 건네온 말이기도 하다.
‘웃기는 친구들 다 보겠네. 이 나라에는 승진을 싫다 하는 사람들도 있나? 일을 잘한다고 말로만 하지 말고 내가 승진할 자격이 충분하다고 판단되면 적당한 시기에 쥐도 새도 모르게 좋은 자리를 찾아 승진 발령을 해주면 누가 마달까? 승진할껴? 안 할껴? 물어만보고 다니는 저의가 무엇일까? 무슨 다른 생각이 있어서 그러는 건 아닌가? 이 친구들마저도 은근히 사람 가지고 놀리는 거 아니야? 못된 사람들 같으니라고.’ 이러한 투정이 절로 터져나왔다.
하지만 내가 모르고 있을세라 회사의 승진에 관한 절차를 자세히 설명해주기도 하고, 승진이나 이동이 가능한 직책이 명기된 ‘Job Opportunity List’가 게시판에 새로 붙여질 때마다 때를 놓치지 않고 관심을 보여주는 그들에 대한 오해는 금방 풀어졌다. 회사의 인사 제도와 승진 절차를 잘 알고 있기에 그렇게 관심을 가져주는 그들이 고마울 따름이었다.
회사에서는 인력 수급상 필요한 보직별 인력을 공표하고, 보임 자격 기준을 갖춘 자들의 신청을 미리 받아 상위직 보임에 필요한 연수 과정을 거쳐 보임시키는 승진 제도를 두고 있었다. 따라서 아무리 타고난 능력을 가진 자라 하더라도 본인의 승진 신청이 없이는 승진할 수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 지금 내가 다니는 회사에서 행해지는 승진이라 함은 회사가 회사의 필요에 따라 종업원에게 일방적으로 내리는 은전이 아니고, 회사와 종업원이 동등한 입장에서 합의를 통하여 상호간의 필요 충분 조건을 충족시켜나간다는 정신이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또 다른 특징 하나는 평가 순위에 의한 우수자 순이 아니라 근무 경력, 근태, 징계 등 사전에 정해진 최소한의 결격 사항에 저촉되지 않는 다수를 대상으로 선착순으로 선발한다는 점이다. 이렇듯 두드리는 자에게만 열어주는, 그리고 먼저 두드리는 자에게 먼저 열어주는 문 앞에서 나는 두드리기를 망설이며 서성거리는 소극적인 사람이었던 것이다.
아직도 어려운 의사 소통으로 조직의 링커 역할을 감당하기가 쉽진 않겠지만, 그보다는 상하 구분이 뚜렷하지 않은 이들의 조직 속에서 눈에 튀기 시작하는 ‘옐로’가 되어 콧대 높은 친구들의 곱지 않은 시선을 어떻게 이겨낼지, 그 부분에대한 염려가 해결되지 않은 탓도 컸다. -P164
정면에서 보아도 눈에 튀는 아이들의 외모는 등뒤에서도 이 곳 아이들과 또 다른 모습으로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다른 아이들 것보다 유난히 크고 무거워 보이는 책가방이었다. 하나 가득 둘러맨 큼지막한 가방이 아이들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막 떠나는 스쿨 버스를 향해 무심코 손을 들어 흔들었는데 아이들이 보았는지 모르겠다. 운동삼아 단지를 한 바퀴 돌아 들어오는 동안 무거운 책가방으로 어깨가 처져 있는 아이들의 뒷모습이 따라다녔다.
학교 시간표를 짜면서 물정 모르는 아빠가 너무 욕심을 부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 이 곳 아이들의 시간표에 하루 한 시간 정도는 들어가 있다고 하는 자습 시간이 일 주일 내내 단 한 시간도 없게끔 빽빽하게 짜맞추었다. 자습 시간의 필요성에 대하여 아빠를 이해시키려고 드는 큰아이를 공부하는 자세가 제대로 되어 있지 못한 아이로 몰아세우면서까지 아빠의 역할에 충실하려 하였다.
부족한 영어를 따라잡기 위하여 필수 과목으로 ‘ESL(English as a Second Language)’시간을 최우선적으로 챙겨야 하였고, 그렇다고 같은 학년의 보통 아이들이 배우는 다른 과목들을 빼먹게 할 수도 없었다. 결국 자습 시간은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는 알찬(?) 시간표를 만드는 데 성공하였고, 아이들에 대한 아빠의 높은 교육열을 유감없이 담아낸 시간표로 카운슬러를 놀라게 만들었다. - P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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