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칸 아이돌」 은 슈퍼스타를 발굴하는 리얼리티 쇼이다. 2002년 시작해 8년째를 맞고 있다. 해를 거듭할수록 식지 않는 인기를 누리며 확실히 자리매김을 했다. TV 앞에서 우리의 작품이 나올 때마다 우리는 환호성을 질렀다. 그 짧은 8초짜리 애니메이션이 군데군데 방송되면서 테드의 말대로 ‘뭐야 이거?’ 하는 반응을 얻어냈다. 결과는 예상대로 평소보다 시청자들이 광고 때 채널을 돌리지 않는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인터넷에는 어느새 8초 애니메이션의 정체가 도대체 뭐냐, 폭스 사가 제2의 심슨 만화를 구상하는 것이냐, 재미있다, 택시 속 몰래카메라 리얼리티 「쇼 MTV」 를 표절했다, 영화 「보랏(Borat)」 이 뜨니까 이런 것들이 쏟아져 나오는구나, 쓰레기들, 인종차별이다, 택시기사를 우롱했다, 웃겨 죽겠다, 폭스가 드디어 미쳤구나, 돈을 쓸 때가 없어서 환장했구나 등의 곳곳에서 다양한 종류의 리플들이 달리고 있었다.
“페이스북에 우리 8초 애니메이션 팬클럽이 생겼어!”
“누구야? 누가 또 만든 거야?”
제이슨은 회사 안의 누군가가 조작해서 만든 줄 알았는지 두리번거리며 실실 웃고 있었다. 팬클럽의 주인장은 어느 평범한 대학생이었고 일리노이의 시골 외딴곳에 사는 남자였다.---p. 23
나와 전화를 받는 리셉션이스트만 빼고 상사나 동료들은 모두 남자였다. 게다가 매니저 겸 수석 아티스트로 일하던 스콧이라는 사람이 워낙 유별난 성격이었다. 무슨 조선시대도 아니고, 남존여비의 사상을 뚜렷이 갖고 있어 함께 일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회사의 사장도 그의 성격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일을 잘 마무리 짓고, 귀찮은 일까지도 모두 맡길 수 있어서 그를 포기하지 못했다. 예를 들어 주말동안 롱아일랜드에 있는 별장에 가서 아이들과 함께 쉬고 싶은데, 월요일까지 끝내야 할 일이 쌓여 있는 경우! 바로 스콧에게 일임하고 떠나면 되었다. 스콧은 영어 표현으로 ‘선생님의 애완동물(teacher’s pet), 즉 선생님이 시키는 일을 얄미울 정도로 잘하고 칭찬을 듣고 업적을 쌓기 위해 때때로 같은 반 친구들을 무시하고 억누르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 스콧의 그림자에서 나는 오랫동안 제대로 빛을 보지 못했다. 어찌나 내 이름을 잘못 발음하는지 내 이름이‘수정’이라고 아무리 얘기해줘도 일부러 ‘수지큐’라고 멋대로 바꿔 불렀다. ---p. 39
“다음 주 월요일부터 다시 나와 줄래요? 미안한 건 인턴에게 돈을 줬던 전례가 없어서, 모두에게 이해를 구하고 찬성을 얻어내는 데 시간이 걸렸어요. 그리고 박물관 재정상 하루에 1백 불밖에 줄 수가 없고요.”
지금 1백 불이라고 했나? 10시부터 5시까지 일하고 그사이 점심시간이 1시간인데? 인턴에게 이렇게 많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정말 미안하지만 이거라도 받고 일해 줄 수 있겠어요?”
“그럼요. 고려해줘서 고마워요. 월요일 날 뵙죠.”
자연사박물관에서의 인턴 생활은 해양관 개조 프로젝트가 마무리되면서 끝났다. 이것이 나의 마지막 인턴 경험이 되었다. ---p.149
졸업한 지 4년이 지났을 때였다. 대학교 과모임에서 모두 졸업 후 1년에서 3년 정도의 슬럼프가 있었음을 털어놓았다. 그 시기를 견디지 못했던 한 친구는 수의사가 되기 위해 대학교에 다시 입학했고, 다른 친구는 부모님의 사업을 돕는 일을 선택했다. 또 애니메이션을 공부한 것을 후회했다는 친구, 미대에 간 것 자체를 후회했다는 친구도 있었다. 간호학을 공부하려고 재입학했다가 한 학기 만에 때려치우고 다시 이력서를 돌리기 시작했다는 친구, 인턴만 1년을 하다가 화가 나서 그만뒀는데 그만두자마자 그 회사에서 신규로 5명을 뽑는다는 광고를 봤다는 친구, 밀린 학비를 갚아나가야 하는데 부모님이 죽어도 안 도와준다는 친구 등등. 친구들의 각양각색의 슬럼프 이야기를 들으면서 한때 내가 가졌던 슬럼프는 내가 유학생이기 때문에 겪는 것이라고 잘못 생각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p. 164
사장인 롭은 1990년도 초반부터 3D를 다루었던 그 분야의 선구자 세대이다. 그는 오래된 노하우를 바탕으로 매년 업그레이드되는 소프트웨어에 적응해서 남들보다 빠르게 새로운 테크닉을 구사하는 유능한 3D 아티스트이다. 또한 기타를 잘치고 음악적 감각이 뛰어나서 작곡가로도 활동한다. 프로젝트가 들어오면 효과음이나 배경음악을 직접 만드는 것은 기본이다. 인디영화의 음향 설계 작업도 한다. 그는 어려운 컴퓨터 소프트웨어 책이나 잡지들을 무슨 가벼운 소설 책 대하듯이 커피 한 잔을 홀짝이며 우아하게 읽었다. 그런 다음 컴퓨터 앞에 앉아 아까 눈으로 잠깐 훑었던 고도의 테크닉을 단 한 번에 실연해내는 사람이었다. 3D 작업도, 음악가로서의 작업도 섬세한 롭의 손을 거치고 나면 특별한 느낌으로 고급스러워졌다. ---p. 175
조는 일반 캐리커처 아티스트와 달리 익숙한 것 대신에 전혀 새로운 각도에서 그림을 그렸다. 그래서 그 그림을 예술로 인정하거나 해학으로 웃어넘기지 못하는 사람들에게서 욕을 듣고 환불을 요구받는 일을 많이 겪었다. 한 엄마가 자기 아이를 그려달라고 부탁했는데, 조가 그린 캐리커처를 보더니 서럽게 울었다고 한다. 엄마는 그 그림을 조의 얼굴에 던지면서 우리 아이는 이렇게 못생기지 않았다고 소리를 벅벅 지르면서 떠났다고 했다. 물론 그 아이는 그림과 똑같았다. 조는 놀이공원에서 일하던 시절에 그렸던, 그중에서 거절당하고, 환불 당하고, 욕을 바가지로 먹은 그림들만 모아 책으로 엮어서 출판했다. 그 책의 제목은 『리젝트(거부, 반품, 퇴짜)』. 당사자들에게 원성을 샀던, 그러나 묘하게 그 사람과 꼭 닮았던, 그리고 당시 조를 쫄쫄 굶게 했던 작품들이 모여서 멋진 한 권의 책이 완성된 것이다.---p. 186
완벽주의자 로리는 눈에 차지 않는다는 듯 계속 컴퓨터를 만지고 있었다. 테드가 갑자기 종이 위에 그래프를 그리기 시작했다. 100%를 완성이라고 했을 때 0%부터 95%까지는 작업의 질이 눈에 띄게 상승하지만 95%에서 정상에 다다르는 순간까지는 아주 미세하게 발전하는 모양의 그래프였다.
“이 마지막 5%가 제일 힘들지.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성과를 위해 자신과 하는 싸움이거든. 그런데 현실적으로는 이 마지막 5%는 필요하지 않아. 그 5%를 채우기 위해 다들 혈안이 되어 있기 때문에 나머지 95%로도 충분하다는 진리를 잊고 있는 거지. 그래서 계속 쳇바퀴 돌 듯 일하게 되는 거라고.”---p. 190
패탈리아는 까다롭기로 명성이 자자한, 함께 일할 때마다 우리를 아주 힘들게 하는 사람이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아니야. 보다 파워풀하고 보이시했으면 좋겠어요. 내일까지."
"음, 이건 아니야. 요점이 없잖아. 뭔가 칙칙한 분위기이고, 좀 더 깔끔하고 우아하게. 내일까지."
"음, 조금 좋아지긴 했는데. 이건 아니야, 뭔가가 아니야. 아무래도 동작 샘플을 봐야 이해가 되겠어요. 내일까지."
"흠, 가능성이 있어요. 좀 더 화려하게. 그리고 시선이 확 가게, 좀 더 드라마틱하게."
또 내일까지? 프로젝트가 끝난 뒤에도 그녀의 주문들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패탈리아는 뉴욕에서 만날 수 있는 전형적인 디렉터 스타일이다. 우선 강하고 차갑고 무례한 듯 보이는 말투로 엄청난 양의 일을 쉽게 해라, 마라 한다. 좋게 봐줘서 상냥하고 예쁘게 이야기하는 일은 거의 없다. 한마디로 잠시도 비빌 틈을 주지 않는 것이다. ---p. 239
왜 여자들의 결정이 더 결정적일까에 대해 직장동료들과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우리가 분석한 그 이유란 것이, 그 자리까지 올라온 여자들의 기질과 능력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사실 여자들이 디렉터나 프로듀서의 위치까지 오르려면 남자들에 비해 더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승진의 기회는 남녀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진다. 그러나 이 업계에서 중요한 클라이언트들은 대개 이름난 대형회사에서 일하는 5~60대의 남성 임원진이다. 여자들은 그들을 상대로 매끈한 대화를 풀어갈 수 있는 탁월한 말솜씨를 가져야 한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일로 인정받기 위해서 남자들보다 더 강하게 더 완벽하게 일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그러므로 평소 자신의 결정에 자신감이 넘치고, 개인적 견해나 스스로의 문제해결 방식에 높은 신뢰도를 가진 여자들이 책임 있는 위치에 오를 수 있다. 그래서 같은 직급의 남자들과 최종결정권을 가지고 옥신각신하고 있다면 지금껏 단련한 몇 년 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더욱 강하고 완벽해진 대부분의 뉴욕 여자는……무조건 이기게 되어 있다. ---p. 273
뉴요커들에게도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분야가 있으니, 바로 네일이다. 뉴욕 여자들의 자존심은 손톱과 발톱에서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늘 단정하게 정리해서 정성스럽게 매니큐어를 발라 관리하는 손과 발은 그 여자의 성격과 경제적 능력 등의 많은 정보를 제공한다. 잘 벗겨지는 매니큐어를 완벽하게 관리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심리적 경제적 여유를 드러낸다. 꼼꼼하고 때로는 까칠한 성격도 엿보이는데 이것은 일을 잘할 것 같은 인상으로 연결된다.
그래서 뉴요커들은 구직 인터뷰를 갈 때에 새 옷을 사거나 머리모양을 다듬기보다 네일을 정리한다. 손이 예쁜 날에는 지하철 손잡이도 자신 있게 잡을 수 있다. 진짜 신기한 것은 옆 자리에서 나와 손잡이를 같이 잡고 있는 여자의 손톱이 엉망이라면, 그 여자는 다른 사람들이 자기 손톱을 볼 수 없도록 반드시 가리고 있다. 나는 이 점을 알고부터 새로운 조직에 들어가면 항상 개성 있게 네일을 꾸며 출근했다. 참 재미있는 심리다.
---p. 2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