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장메뉴
주요메뉴


닫기
사이즈 비교
소득공제
과학과 종교는 적인가 동지인가

과학과 종교는 적인가 동지인가

리뷰 총점9.0 리뷰 2건
베스트
역사와 문화 교양서 top100 9주
정가
18,000
판매가
16,200 (10% 할인)
구매 시 참고사항
eBook이 출간되면 알려드립니다. eBook 출간 알림 신청

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0년 07월 05일
쪽수, 무게, 크기 415쪽 | 582g | 153*224*30mm
ISBN13 9788958073123
ISBN10 8958073128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저자 소개 관련자료 보이기/감추기

저자 : 로널드 L. 넘버스 Ronald L. Numbers
위스콘신-매디슨 대학의 과학사와 의학사 전담 교수다. 현재 국제 과학사·과학철학연맹의 회장을 맡고 있으며, 객관적이고 실증적인 분석으로 과학사 연구의 새로운 담론을 주도하고 있다. 과학과 종교의 관계사에 대한 그의 지속적인 관심 역시 이런 작업의 연장선상에 있다. 역사를 보는 편협한 시각과 관성적인 사고를 탈피하여 과학과 종교에 대한 균형적인 안목을 이끌어 내는 게 그의 목표다. 과학사에 대한 잘못된 인식과 통념을 짚어보고, 유관 전공 교수들의 글을 모아 논증한 이 책은 그의 이런 노력이 맺은 값진 열매다.『창조론자The Creationists : From Scientific Creationism to Intelligent Design』와 『성직자와 평신도의 과학과 기독교Science and Christianity in Pulpit and Pew』를 포함해 20여 권이 넘는 책을 쓰고 엮었다.
역자 : 김정은
성신여자대학교에서 생물학을 전공했고, 현재는 ‘펍헙 번역그룹’에서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미토콘드리아』, 『세상의 비밀을 밝힌 위대한 실험』, 『신은 수학자인가?』, 『강의 죽음』등이 있다.

책 속으로 책속으로 보이기/감추기

중세 교회 당국은 대부분 인간의 해부를 용인했을 뿐 아니라 권장하기도 했다. 주로 종교적 목적에서였는데 이를테면, 성인의 육신을 보존하고 기린다는 명목 아래 내장을 적출하거나 유해를 나누고, 성인이나 성녀의 내부 기관을 조사하여 거룩한 증표를 찾아내거나, 훗날 제왕절개라고 알려진 수술을 하여 죽은 산모에서 꺼낸 태아에게 세례를 주기 위해서였다. 이 모든 관례를 볼 때, 교회가 사후의 육신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한 집단이었다는 주장은 거짓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마찬가지로 왕족이나 귀족도 매장을 하기 전에 유해를 가르는 풍습이 널리 퍼져 있었다. 그래도 역시 중세 문화에서 해부할 수 있는 시체의 수는 아주 엄격하게 제한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런 제한은 개인과 가족의 명예와 예의범절이라는 세속적 가치를 반영하는 것이며, 교회 당국보다는 지역 행정 당국에 의해 강요된 것이다.
실상은 이렇다. 인체 해부는 13세기 말 이전까지 유대교, 기독교, 무슬림, 이교도를 막론하고 어떤 문화권에서도 정기적으로 시행된 적이 없었다. 기원전 4세기에서 3세기까지의 기간이 유일한 예외인데,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활동한 헤로필루스Herophilus와 에라시스트라토스Erasistratus라는 두 사람의 그리스 의학자가 해부를 토대로 인체를 연구했었다. 그리스와 로마에서 인체 해부를 회피한 것은 시체가 부정하다는 믿음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반면 초기 기독교 문화에서 무덤을 신성한 장소로 받아들이고 시신을 치유력과 마법의 원천으로 여기고 존중하면서, 시체가 부정하다는 인식은 많이 누그러들었다. 중세 초기에 교회가 인체 해부를 금지하지는 않았지만, 마찬가지로 인체 해부가 실행되었다는 증거도 없다. 이는 부분적으로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초기 기독교 작가의 불만이 반영된 것일 수도 있다. 그는 시신 훼손에 열광하는 것이 신성모독이라기보다는 구원과 관계없는 것에 관심을 갖는, 일종의 불건전한 호기심이라고 생각했다. 의학 교육 및 관련 연구가 쇠퇴기에 접어들었던 서로마 제국이 5세기에 멸망하고 서구 유럽이 전반적으로 의술이 발달하지 않은 상태였다는 상황은 인체 해부가 활발히 이루어지지 않은 이유와 무관하지 않다.
의사가 인간의 몸을 해부했다는 기록은 13세기 말에 처음 등장한다. 이 해부는 지방 자치 정부의 명령으로 시행되었는데, 주로 범죄의 판결이나 공중 보건을 위해 사인을 규명하는 검시와 연관이 있었다. 의학 교육과 연구를 목적으로 오늘날과 같이 정기적으로 시행되는 인체 해부는 1300년에 이탈리아의 볼로냐에서 처음 시작되었다. 볼로냐는 당시 의학 교육의 중심지였다. 그리스의 의사이자 저술가인 갈레노스Galenos, 129?~200?와 그의 아랍 후예들의 작품에 새롭게 흥미를 느낀 볼로냐의 의학 교사들과 학생들은 인체를 해부하기 시작했고, 몬디노 델루치Mondino de’ Liuzzi, 1275?~1326는 인체 해부를 기초로 한 최초의 해부학 교재를 저술했다. 이 책은 16세기 초까지 대학 의학 교육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처음에는 해부가 이탈리아 내의 의과대학과 칼리지에서만 제한적으로 실시되었고, 해부학을 필수과목으로 지정한 대학은 일부 이탈리아 대학과 프랑스 남부에 위치한 몽펠리에Montpellier 대학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나 15세기 말이 되자 해부 수업은 북부 유럽의 의과대학에까지 퍼졌고, 16세기에는 가톨릭, 프로테스탄트 지역을 막론하고 모든 의과대학과 칼리지에서 광범위하게 시행되었다. --- pp. 74~76

16세기 유럽인의 기준에 따르면, 조르다노 브루노Giordano Bruno, 1548~1600는 이단이었다. 그는 처녀가 잉태를 하고 그리스도가 곧 하나님이라는 것을 의심했다. 그리스도가 대단히 총명한 마법사라고 생각한 그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를 막론하고 모든 주요 기독교 교파에 거슬리는 존재였다. 그는 이 발언과 그밖에 여러 발언을 철회하라는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아, 16세기의 마지막 해에 로마 종교 재판소에 의해 기소되었다. 이듬해인 1600년 1월, 브루노는 유죄가 인정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2월 17일에 로마의 캄포 디 피오리Campo dei Fiori 광장에서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산 채로 불태워졌다. 브루노의 사형은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잔인하지만, 근대 초기에는 그리 특별한 사건이 아니었다. 당시에는 반란 주동자나 중죄인들의 경우, 산 채로 내장을 끄집어내 사지를 절단한 뒤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교수대나 다리 위에 매달아 두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근대의 과학적 사고방식과 실천의 등장, 곧 16세기와 17세기의 ‘과학 혁명’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면 대중적인 글은 물론 학술적인 연구에서도 브루노의 죽음이 빠짐없이 등장한다. 좀 더 신중한 역사학자들은 브루노를 확실히 이단이라고 밝히지만, 이들 대부분도 그의 이단 행위를 과학적 우주론의 중요한 혁신과 연결시킨다. 특히 브루노는 우리 우주가 수많은 태양과 행성이 있는 무한한 공간이라고 생각하고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을 옹호했는데, 이는 훗날 르네 데카르트Ren? Descartes와 아이작 뉴턴, 피에르-시몽 라플라스Pierre-Simon Laplace의 열린 우주론의 기초가 되는 탐구로 여겨졌다. 이런 연관성 때문에 심지어 일부에서는 브루노를 최초의 과학 순교자로 규정하기도 한다. 엄격한 신학적 교의와 자연철학 안에서의 자유로운 사색 사이의 피할 수 없는 충돌에 불을 붙여 다가올 근대과학을 예견한 사례로 여긴 것이다. (… 중략…) 브루노는 혁신적인 자연철학자였고 그의 사상은 근대과학의 기초가 되었지만, 결국 교회는 이를 빌미로 그를 처형했다. 따라서 교회는 과학적 개념의 자유로운 발전을 제한하기 위해 브루노를 죽였다는 것이다. 영생과 죄사함에 관한 가톨릭의 가르침에서 핵심을 이루는 성삼위일체 교리를 부정하고도 전혀 뉘우치지 않아 이단으로 파문을 당한 수도사 브루노는 어떻게 “세계 최초의 과학 순교자”가 되었을까?
계몽주의 시대 이후의 역사 평론가들은 여러 가지 이유에서 종교적 권위를 등에 업은 귀족 정부의 권위에 맞서 사상의 자유를 위해 싸우는 전형적인 인물로 브루노를 격상시킬 방법을 모색했다. 브루노의 우주론은 이미 18세기부터 서구 사조의 공식적인 발전에 포함되었으며, 19세기에 들어서서는 윌리엄 휴얼William Whewell, 존 틴들John Tyndall, 헨리 페어필드 오즈번Henry Fairfield Osborn 같은 대중적인 작가들이 과학사에서 브루노의 위치를 더욱 공고히 다졌다. 19세기 말엽에는 이와 같은 주장이 추진력으로 작용해 근대주의자들과 일반인들에게 이탈리아의 통일이라는 포부가 생겼으며, 브루노가 화형을 당한 자리에 그의 동상을 세우려는 노력이 이탈리아 전역에서 일어났다. 브루노는 폭정에 항거하는 인물로도 그려져, 20세기에 전체주의가 휩쓸던 시기에도 훌륭한 구실을 했다. 그러나 역사 서술 방법론의 편견과 기회주의로 잘 설명되지 않는 것이 있는데, 이미 17세기부터 브루노가 철학, 특히 자연철학의 자유를 상징하는 인물이었다는 점이다. 과학 혁명을 이끈 바로 그 과학자들이 쓴 새로운 과학의 태동 이야기도 브루노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논란의 여지가 있기는 하지만 태양 중심적 우주론의 승리는 새로운 과학의 출현을 가장 극적으로 상징한다. 여기에 실제보다 축소된 갈릴레이의 구실이 더해지자, 갈릴레이에 앞서 억압에 항거해 철학적 자유를 위해 싸운 통찰력 있는 선구자이자 순교자라는 브루노의 위치가 더욱 확고해졌다. --- pp. 97~103

갈릴레이의 재판에서 나온 판결문과 이단 포기 각서에 있는 1차적인 증거만 보면, 갈릴레이가 감옥에 갇혀 고문을 당했다는 이야기가 그럴 듯하게 느껴진다. 이런 오해는 갈릴레이가 투옥과 고문을 둘 다 겪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문서가 나올 때까지 변함없이 남아 있었다(투옥 이야기는 약 150년 동안, 고문 이야기는 약 250년 동안 이어졌다).
투옥에 관한 새로운 정보는 1633년에 있었던 편지들에서 나왔는데, 첫 번째 편지는 로마 주재 토스카나 대사(프란체스코 니콜리니Francesco Niccolini)가 피렌체에 있던 토스카나 국무장관에게 보낸 편지고, 두 번째는 토스카나 대사가 갈릴레이와 주고받은 편지였다. 토스카나 당국자들이 갈릴레이에게 각별한 관심을 둔 까닭은, 그가 토스카나 대공의 수석 수학자이자 철학자였기 때문이었다. 갈릴레이는 『두 개의 주된 우주 체계에 관한 대화』를 토스카나 대공에게 헌정했으며, 피렌체에서 이 책을 성공적으로 출간하는 데 대공의 도움을 구했다. 따라서 토스카나 정부는 이 재판을 정부의 일인 것처럼 여겼다. 니콜리니 대사는 이 상황에 대해 정기적으로 교황을 알현해 직접 논의를 하고, 그 결과를 피렌체에 보고했다. 게다가 갈릴레이는 니콜리니 대사 부부와 대단히 막역한 사이였다.
1774년에서 1775년 사이에 발견된 1633년 편지를 보면, 갈릴레오는 종교 재판소의 소환을 받고 1월 20일에 피렌체를 출발해 2월 13일에 로마에 도착했다. 종교 재판소는 갈릴레이가 토스카나 대사관에 묵을 수 있도록 허락해주었고, 갈릴레이는 재판이 시작되기 전까지 격리되어 있었다. 4월 12일에 갈릴레이는 첫 번째 심문을 받기 위해 종교 재판소로 갔다. 그는 추가 심문을 받기 위해 그곳에 18일 동안 머물렀지만 6개의 방이 있던 검찰관 숙소에서 하인과 함께 지냈으며, 하인은 하루 두 번씩 토스카나 대사관에서 그의 식사를 가져왔다. 두 번째 증언에 대한 기록과 서명이 끝난 후인 4월 30일, 갈릴레이는 대사관으로 돌아왔다. 그곳에서 갈릴레이는 51일 동안 머물렀고, 그 사이에 세 번째 증언을 하기 위해 한 차례 종교 재판소를 다녀갔다. 6월 20일 월요일, 갈릴레이는 법정에 출두하라는 소환장을 받았다. 화요일에 엄격한 조사를 받고, 6월 24일까지 종교 재판소에 있었다. 이때 갈릴레이가 감옥에 수감되었는지 검찰관 숙소에 있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6월 22일에는 선고를 받고 이단 포기 선서를 하기 위해 산타 마리아 소프라 미네르바Santa Maria sopra Minerva의 수도원에 나타났다. 이틀 후 갈릴레이는 종교 재판소를 떠나 로마에 위치한 메디치 저택Villa Medici으로 숙소를 옮겼다. 메디치 저택은 토스카나 대공이 소유한 호화 궁궐이었다. 6월 30일, 교황은 갈릴레이가 가택 연금 생활을 할 곳으로 갈 수 있도록 시에나Siena까지 여행 허가를 내주었다. 갈릴레이가 연금될 집은 갈릴레이의 절친한 친구인 대주교의 집이었다. 대주교는 갈릴레이를 5개월 동안 이곳에 묵게 했다. 1633년 12월, 갈릴레이는 피렌체 인근 아르체트리에 있는 자신의 저택으로 돌아왔고, 1638년에 잠시 피렌체 외곽에 머물던 기간을 제외하고 1642년 숨을 거둘 때까지 자택에서 연금 상태로 지냈다. … (중략) …
지금까지 드러난 증거에 비추어 볼 때, 가장 타당한 주장은 갈릴레이가 고문의 위협 속에서 조사를 받았지만 실제로 고문을 당하지 않은 것은 물론, ‘실제 위협’도 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1633년 재판 기간과 그 후 9년 동안 갈릴레이는 가택 연금 상태였지만 결코 감옥에 가지는 않았다. 그러나 일반 대중은 각각 150년과 250년 동안, 갈릴레이가 재판이 끝난 뒤 투옥되었다는 것과 갈릴레이가 고문을 받았다는 것을 나타내는 증거만 접할 수 있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갈릴레이의 고문과 투옥에 관한 통념은 사실이 아님에도 사실로 보였던 완전히 그릇된 통념이다. 그리고 일부 어설프게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나 부주의한 학자들 사이에서는 지금도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 pp. 117~124

다윈주의 이론은 일부 종이 다른 종에 비해 ‘더 고등’하다고 생각한 진보적인 이론이었을까? 일부 인종이 다른 인종에 비해 더 진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인종차별적인 이론이었을까? 유대인들을 하등한 인종으로 매도한 특별히 반유대주의적인 이론이었을까? 다윈주의 이론이 윤리학의 박애주의 전통을 파괴하여 이기적 편의주의에 기초한 사악한 나치의 도덕을 조장했을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정말 나치가 헤켈의 다윈주의를 포용했을까?
19세기 유럽은 과학적, 기술적, 상업적인 면에서 엄청난 발전을 직접 목격했다. 이는 신의 은총을 확인시켜주는 종교적 증표인 것 같았다. 위에 있는 지층일수록 더 복잡한 화석이 발견된다는 사실은 지구상의 생명이 일반적으로 점차 발전해왔다는 것을 나타냈다. 다윈은 자신의 이론이 이렇게 당연한 사실로 여겨지는 생물의 발전과 사회 발전을 설명할 수 있다고 믿었는데, “자연선택이 오로지 각각의 생명체의 이득을 위해서, 그리고 이득에 의해서 작용하는 것처럼 유형무형의 모든 유산도 완벽을 향해 나아가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었다. 다윈은 각각의 종이 점진적으로 발전하는 모습을 화석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뿐 아니라, 헤켈과 마찬가지로 진화 역사를 관통하면서 차츰 발전하는 형태를 단계적으로 보여주는 역동적인 ‘그림’이 남아 있는 배 발생 과정을 통해서도 점진적인 발전을 간파할 수 있다고 믿었다. 다윈 역시 헤켈의 법칙을 활용한 것이다. (… 중략 …)
헤켈은 다윈의 이타주의적 도덕 개념을 지지했다. 다윈의 개념이 전통적인 기독교 도덕을 위한 토대로 더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더 나아가 헤켈은 1870~1871년에 벌어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기간 동안, “군 선택military selection”이라고 칭한 비열한 현상을 묘사했다. 가장 용감하고 똑똑한 사람은 전장에서 죽음을 맞는 반면 나약하고 비겁한 사람은 집에 남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도덕성이 낮은 성격이 후대에 전달된다는 것이다. 헤켈은 다음과 같은 희망을 술회했다. “장기적으로 볼 때는 가장 좋은 무기를 가진 사람이 아닌 가장 지력이 뛰어난 사람이 승리를 거둘 것이다. 그리고 승리를 이끈 그 두뇌라는 자산을 자손에게 물려줄 것이다.”
이렇게 헤켈이 친유대적이고 군에 반대하는 성향을 나타냈는데도, 나치가 그를 포섭하고 그의 다윈주의를 포용하려고 했을까? 아니면 나치는 권력을 잡기 15년 전에 세상을 떠난 그의 평판이라도 이용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1930년대에 나치 정부는 이전 세기의 저명한 독일 석학들의 시각을 활용해 새로운 정치 체계를 정립하고자 했다. 이를테면 나치의 선동가였던 알프레트 로젠베르크Alfred Rosenberg는 1세기 전의 독일 최고 과학자였던 알렉산더 폰 훔볼트가 국가사회주의의 이상을 지지했다고 말했다. 훔볼트는 유대인 친구가 있는 동성애자였는데도 말이다. 헤켈 역시 하인츠 브뤼허Heinz Br?cher같은 몇몇 야심찬 학자들에 의해 나치에 이름이 올랐다. 브뤼허는 헤켈의 진화론적 일원론이 히틀러의 인종에 대한 견해와 잘 맞아떨어진다고 주장했다.
--- pp.263-268

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보이기/감추기

회원리뷰 (2건) 회원리뷰 이동

한줄평 (0건) 한줄평 이동

  등록된 한줄평이 없습니다!

첫번째 한줄평을 남겨주세요.

배송/반품/교환 안내

배송 안내
반품/교환 안내에 대한 내용입니다.
배송 구분 예스24 배송
  •  배송비 : 무료배송
포장 안내

안전하고 정확한 포장을 위해 CCTV를 설치하여 운영하고 있습니다.

고객님께 배송되는 모든 상품을 CCTV로 녹화하고 있으며, 철저한 모니터링을 통해 작업 과정에 문제가 없도록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목적 : 안전한 포장 관리
촬영범위 : 박스 포장 작업

  • 포장안내1
  • 포장안내2
  • 포장안내3
  • 포장안내4
반품/교환 안내

상품 설명에 반품/교환과 관련한 안내가 있는경우 아래 내용보다 우선합니다. (업체 사정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반품/교환 안내에 대한 내용입니다.
반품/교환 방법
  •  고객만족센터(1544-3800), 중고샵(1566-4295)
  •  판매자 배송 상품은 판매자와 반품/교환이 협의된 상품에 한해 가능합니다.
반품/교환 가능기간
  •  출고 완료 후 10일 이내의 주문 상품
  •  디지털 콘텐츠인 eBook의 경우 구매 후 7일 이내의 상품
  •  중고상품의 경우 출고 완료일로부터 6일 이내의 상품 (구매확정 전 상태)
  •  모바일 쿠폰의 경우 유효기간(발행 후 1년) 내 등록하지 않은 상품
반품/교환 비용
  •  고객의 단순변심 및 착오구매일 경우 상품 반송비용은 고객 부담임
  •  직수입양서/직수입일서중 일부는 변심 또는 착오로 취소시 해외주문취소수수료 20%를 부과할수 있음

    단, 아래의 주문/취소 조건인 경우, 취소 수수료 면제

    •  오늘 00시 ~ 06시 30분 주문을 오늘 오전 06시 30분 이전에 취소
    •  오늘 06시 30분 이후 주문을 익일 오전 06시 30분 이전에 취소
  •  직수입 음반/영상물/기프트 중 일부는 변심 또는 착오로 취소 시 해외주문취소수수료 30%를 부과할 수 있음

    단, 당일 00시~13시 사이의 주문은 취소 수수료 면제

  •  박스 포장은 택배 배송이 가능한 규격과 무게를 준수하며, 고객의 단순변심 및 착오구매일 경우 상품의 반송비용은 박스 당 부과됩니다.
반품/교환 불가사유
  •  소비자의 책임 있는 사유로 상품 등이 손실 또는 훼손된 경우
  •  소비자의 사용, 포장 개봉에 의해 상품 등의 가치가 현저히 감소한 경우 : 예) 화장품, 식품, 가전제품, 전자책 단말기 등
  •  복제가 가능한 상품 등의 포장을 훼손한 경우 : 예) CD/LP, DVD/Blu-ray, 소프트웨어, 만화책, 잡지, 영상 화보집
  •  소비자의 요청에 따라 개별적으로 주문 제작되는 상품의 경우
  •  디지털 컨텐츠인 eBook, 오디오북 등을 1회 이상 다운로드를 받았을 경우
  •  eBook 대여 상품은 대여 기간이 종료 되거나, 2회 이상 대여 했을 경우 취소 불가
  •  모바일 쿠폰 등록 후 취소/환불 불가
  •  중고상품이 구매확정(자동 구매확정은 출고완료일로부터 7일)된 경우
  •  LP상품의 재생 불량 원인이 기기의 사양 및 문제인 경우 (All-in-One 일체형 일부 보급형 오디오 모델 사용 등)
  •  시간의 경과에 의해 재판매가 곤란한 정도로 가치가 현저히 감소한 경우
  •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보호에 관한 법률이 정하는 소비자 청약철회 제한 내용에 해당되는 경우
소비자 피해보상
  •  상품의 불량에 의한 반품, 교환, A/S, 환불, 품질보증 및 피해보상 등에 관한 사항은 소비자분쟁해결기준(공정거래위원회 고시)에 준하여 처리됨
환불 지연에
따른 배상
  •  대금 환불 및 환불 지연에 따른 배상금 지급 조건, 절차 등은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 보호에 관한 법률에 따라 처리
  • 절판 상태입니다.
뒤로 앞으로 맨위로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