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면서
서쪽 하늘에 해가 떨어져 더 어두워지기 전에 가는 길을 서둘러야 할 나그네. 발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노을 진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주위를 둘러보니 바삐 걷는 사람들뿐. 누구도 붉은 하늘을 바라보고 있지 않다. 나그네는 멈춰 서서 생각한다. 그에게도 가야 할 길이 있지만 노을을 바라보며 지나온 길을 잠시 되돌아보는 것이 무의미한 일만은 아닐 것이라고.
서쪽 하늘에 해가 졌다. 해가 진 서쪽 하늘이 처연하게 물들었다. 해는 졌지만 하늘은 금세 어두워지지 않았다. 어두워지기 전 붉어졌다. 방금 떠난 사람의 뒷모습도 이와 같으리. 캄캄해져서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기 전까지 잠깐, 그의 뒷모습은 붉게 물든 노을 같으리. 그는 어둠 속으로 사라지기 전, 그가 걸어온 이야기 몇 개를 노을 속에 남겨놓고 싶어 하리.
S!
그대를 부른다. 마음속으로 그대 이름을 부른다. 나중에 S, 그대가 누군지 아는 사람은 알 것이다.
32년 6개월의 공직생활을 끝내고 공로연수를 위해 직장을 떠나기 30분 전, 그대는 헐레벌떡 나를 찾아왔다. 아! 그대를 보자 내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대가 나를 찾아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마침 내 방에 몇몇 사람이 와 있어 그대와 차 한잔 나누지 못했다. 서서 어정쩡하게 몇 마디 했을 뿐이다. 그대는 조용히 말했다. 안녕히 가세요. 나의 떠남을 아쉬워하며 또 나의 앞날에 축복이 있기를 바라는 그대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나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와 줘서 고마워요. 떠나도 기억할게요.
S!
우리가 만났던 날들을 기억하고 있겠지. 2004년이었다. 그해 1월 나는 그대가 일하고 있던 곳으로 갔다. 신규인 그대에 비해 나는 20년 경력의 중견이었다. 나는 새내기인 그대의 일하는 모습을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그때의 느낌과 감정을 나는 글로 썼었다. 오래도록 함께했으면 싶었지만 얼마 안 있다가 그대는 그곳을 떠났다. 그리고 12년이 흘렀다. 나는 퇴직의 길로 들어섰고, 그대는 믿음직한 일꾼이 되어 있었다.
오늘 그대를 부르는 것은 내가 사무실을 떠나기 직전 나를 찾아온 그대를 새삼 떠올렸기 때문이고, 그대에게 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대가 조금도 원하지 않는 것인지 모른다. 그냥 말없이 사라져야 하는 자가 무슨 미련이라도 있는 듯 머뭇거리며 주절거리는 못난 짓인지 모른다.
나는 직장생활을 하면서 많은 선배들을 만났다. 선배들에게서 전설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만날 때마다 같은 이야기를 반복해서 말하는 선배도 있다.
선배들은 세상이 변했음을 알고 있다. 그들이 겪은 일이 다시는 재생이 안 되는 과거의 일임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들이 후배들을 만난 자리에서 옛이야기를 하는 것은 지난날을 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남에게는 사소하게 보이는 것들이 그들에게는 일생일대의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후배들과의 자리에서 그들이 겪었던 일을 애써 감추지 못하고, 나지막하게, 때로 목소리를 높여 마치 방금 전에 있었던 일인 양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선배들은 자신들이 겪었던 일을 기록하지 않았다. 왜 기록하지 않을까. 그것은 그들이 겪은 일이 대단하다고 여기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제가 뭘요, 하는 심정일 것이다. 매일 놀라운 일이 수없이 일어나는데 그것들에 비하면 자신이 겪은 것은 내세울 게 별로 없다고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설혹 기록한다 해도 허망함으로 끝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이 겪은 일이 인상적이라고 생각한다. 하찮아도 인상적이라고 느끼는 혼란스러운 모순! 세상에 드러내지는 못하지만, 평생을 바쳤기에 나 여기 있소, 하며 존재를 알리고 싶은 욕망 또한 있는 것이다.
청와대에서 일어나는 일만이 중요한 것인가. 청와대 외에 얼마나 많은 행정기관이 있는가. 중앙정부만 있는가. 지방정부는 또 얼마나 많은가. 서울시 등 15개 광역자치단체와 제주특별자치도, 세종특별자치시, 226개 시·군·구 기초자치단체, 전국 3,500여 곳의 읍면동 사무소. 그중에 으뜸은 청와대이므로 청와대가 뉴스의 머리를 차지하는 것에 이의를 달 생각은 없다. 그렇다고 해서 226개의 시·군·구와 220개의 읍, 1,193개의 면, 2,089개의 동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가치가 없고 중요하지 않은 것인가.
S!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선배들은 그들의 삶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을 왜 주저했을까. 비밀엄수의 의무 때문이었을까. 현대사의 숱한 사건과 함께한 선배들. 그들이 지나간 길이 역사가 되었다. 그런데 역사의 길에 선배들은 익명과 무명으로 숨어 있을 뿐이다.
S!
그래서 나는 말하려 한다. 선후배들과 함께 겪은 것들을 이야기함으로써 내가 머물렀던 현장에 이름과 의미를 부여하려는 것이다. 어찌 나에게 두려움이 없겠는가. 내 이야기가 사사로움에 불과하고, 변방의 이야기일 뿐이라는 두려움이 어찌 없겠는가.
나는 높은 자리에 있지 않았고, 뭇사람의 주목을 받지 못했고, 시대의 중앙을 관통해 오지 않았다. 특별한 업적을 남기지도 않은, 보통의 삶을 살아온 자에 불과하다. 그런데 내가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내 이야기에는 선배들이 술자리에서 들려주는 이야기처럼 허풍과 착각이 섞여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솔직하게 말하자. 어느 때부터인지 나는 같은 얘기를 반복해서 말하는 선배들의 전철을 밟고 있었다. 말을 하다가 이런 사실을 깨닫고 얼굴을 붉힐 때가 있다.
나는 지난날들을 기억의 상자에서 꺼내 씨줄과 날줄로 엮어보려는 것이다. 지나온 시간들을 성찰하고 다가오는 날들을 새롭게 바라보고 싶은 것이다. 내 이야기가 케케묵은 빛바랜 이야기로 들릴 것이다. 그런데 내 이야기는 겨우 30년 전부터의 이야기일 뿐이다. 사소한 이야기지만 세월에 묻힌 이야기를 꺼내와 역사의 한 페이지에 조심스럽게 새기려 한다. 그때 이런 일이 있었노라고.
S!
공직을 떠나기 전 잠시 숨을 고를 시간이 주어졌다. 나는 그 시간이 노을의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서쪽 하늘 노을을 바라보며 잠시 걸음을 멈춰 섰다. 장엄하구나! 한 사람의 삶도 이와 같으리. 한 사람의 삶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으리. 한 사람의 기록은 때로 무심히 흘러가는 시간에 대한 뜨거운 증언이며, 시간이 헛되이 사라지지 않도록 지난 시간을 묶고 가둬두는 행위이리. 한 사람의 이야기는 사실 얼마나 어마어마한가. 모든 삶은 들여다보면 다 깊고 유장하고 장엄하다!
S!
내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남루하고 때로 비루하기까지 하다. 그런데 어쩌랴. 그게 내 이야기인 것을. 남루하고 비루하기까지 하나 어느 순간에도 양심을 팔지 않았고 비굴하지 않으려고 했다. 나를 무릎 꿇게 하거나 휘어잡으려는 세상과 피를 흘리며 싸웠다. 그런 삶이었다.
S!
걷던 발걸음을 돌려 지난날의 숲 속으로 걸어 들어가 본다. 지난 시절 쫓기듯 허겁지겁 닫아버린 시간의 문을 열어 과거 한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찬찬히 둘러보고, 그만 챙기지 못하고 놓고 왔던, 잃어버린 사랑 한 조각을 찾아 만난다면, 얼굴 부비며 그리워했노라고 말할 것이다.
S!
나는 한 세월을 걸었다. 애증의 긴 시간이었다. 걸음마다 눈물이고 기쁨이었다. 세상은 지나갔고 시간은 흘러갔다. 지난날들은 다 허무인 줄 알았는데, 오늘 알았다. 뜨거운 사랑, 뜨거운 노래는 끝나도 흐른다는 것을.
S!
내 손을 잡지 않겠나. 함께 시간여행을 떠나보지 않겠나. 동행의 시간들. 내가 만난 사람들, 머물렀던 일터와 지역, 살았던 시대와 함께한 시간들. 갈등과 번뇌, 실패와 좌절, 고뇌의 시간들. 온갖 간난을 견뎌내고 마침내 이룬 성과와 환희, 보람의 시간들. 나는 그 시간들과 동행하였거니. 어둠이 밀려오기 전 붉은 노을 속으로 함께 걸어가 보지 않으려나.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