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똑똑한 불가지론자 한 사람과 기독교 신앙에 대해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이야기를 나누는 내내 어떻게 해서든 그의 생각을 바꿔 주고 싶은 생각이 참 간절하게 들었다. 그는 잠시 점잖게 내 말을 듣더니 이렇게 대꾸했다. “부인, 꼭 말해 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우리 같은 불가지론자들이 기독교에 대해 관심을 가져 주길 원한다면 그 신앙에 대해 당신네 그리스도인 스스로 평온함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내가 만나 본 그리스도인들은 하나 같이 평온이 뭔지 도통 몰랐습니다. 신앙을 대하는 태도나 마음 자세가 마치 무슨 골칫거리라도 안고 다니는 양 생각하더라는 말입니다. 마치 자기 머리를 버리고 싶은 마음은 없으면서 머리를 달고 다니길 매우 거 추장스러워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 식의 종교라면 지금은 물론 앞으로도 나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그의 냉정한 지적에 나는 큰 깨달음을 얻었다. 그리고 그때 얻은 교훈을 밑바탕으로 이렇게 책을 쓴다. …(중략)… 나는 물론이요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불안하고 힘들게 신앙생활을 지탱해 가고 있었다. 한 그리스도인 친구의 하소연처럼 마치 ‘자기 자신을 비참하게 만드는 종교를 믿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기대한 신앙생활은 그런 것이 아니었기에 나는 낙심했다. 성경에서는 신앙생활의 열매가 사랑과 희락과 평강이라고 분명히 말한다(갈 5:22 참조).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적인 열매를 맺기는커녕 오히려 종종 의심과 두려움, 불안, 갈등 등 온갖 종류의 괴로움에 시달린다. …(중략)…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자의 삶은 본래 위로가 풍성한 삶으로 계획되었다. 또한 새롭게 회심한 영혼은 누구나 회심의 첫 기쁨 속에서 그러한 삶을 온전히 기대할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신자들이 경험하는 신앙생활은 삶에서 가장 힘들고 편안하지 않은 부분이다. 이것이 정말 주님 탓일까? 과연 그분이 자신의 능력 밖의 것을 약속하셨다는 말일까?--- pp. 9-11
우리의 영적 전투 방법은 회개하고 결단하며 약속을 다지는 일련의 순서로 이루어진다. 힘겹게 승리를 위한 싸움을 치른다. 그러고 나서 다시 넘어지면 회개와 결단과 약속과 함께 새롭게 싸움이 시작된다. 그리고 그때마다 이제 드디어 분명히 승리할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건다. 하지만 그때마다 이전보다 훨씬 더 큰 타격을 입고 쓰러진다. 이런 일이 수주일 또는 몇 개월 심지어 몇 년 동안 지속될 수 있지만 실질적이고 지속적인 구원은 절대 누리지 못한다.
어떤 이는 ‘그럼 어떤 싸움도 우리 스스로는 해서 안 된단 말인가요?’라고 반문할지 모른다. 물론 우리는 싸워야 한다. 하지만 이런 식의 싸움은 아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권면한 대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한다(딤전 6:12 참조). 믿음의 싸움이란 노력의 싸움이나 무엇을 얻기 위한 투쟁적 싸움이 아니다. 그것은 신뢰의 싸움이다. 여호사밧과 그의 군대가 적과 맞서 싸우고자 진군해 나가면서 싸웠던 싸움이다(대하 20장 참조). 그들은 전쟁에 나가면서 승리의 노래를 불렀고 전장에 도착했을 때 적이 모두 죽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런 싸움에서 우리가 할 일은 그 싸움을 주님께 맡기고 승리하게 하실 주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우리의 갑옷이 아니라 그분의 갑옷을 입어야 한다. 바울은 에베소서 6장 14-17절에서 주님의 갑옷이 어떤 것인지 말해 주었다. 진리로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평화의 복음을 준비하는 신발을 신어야 한다. 구원의 투구를 쓰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령의 검을 차야 한다. 특히 그는 무엇보다 믿음의 방패를 차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래야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시킬 수 있다. 여기에는 약속이나 결심 같은 것은 등장하지 않는다. 고뇌에 찬 갈등과 쓰라린 후회의 시간들 따위는 전혀 요구되지 않는다.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엡 6:16). 믿음이 가장 밑바탕이다. 믿음이 없이는 모든 것이 무용지물이다. 전쟁을 주님께 맡겨야 할 뿐 아니라 그분이 승리하시리라 굳게 믿어야 한다. 실질적인 싸움이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가만히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주님을 신뢰하는 게 너무나 위험해 보인다. 우리 손으로 다시 전쟁을 치르고 싶다는 유혹이 이따금씩 너무나 강렬하게 고개를 든다.
영적 전투에서 마냥 손을 놓고 있다는 것은 물에 빠져 죽어 가는 사람이 자신을 구조하려는 사람을 움켜잡지 않고 몸을 맡기는 일만큼 힘든 일이다. 하지만 대부분 본능적으로 구조대원이 구하려 하면 그를 부여잡으려고 허우적거리는데, 이는 오히려 구조를 방해할 뿐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직접 싸워 보겠다고 고집을 부리면 우리를 위해 주님이 싸우시는 일 역시 참으로 어렵다. 싸울 의지가 없어서가 아니라 싸울 수가 ?으시기 때문이다. 우리의 개입이 그의 일하심을 방해하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가 주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그 말씀을 수백 번도 더 읽고 암송해 왔지만 그 말씀이 실제로 진리임을 믿는 자가 몇이나 되는가? 이 주제에 대한 우리의 은밀한 생각들이 공개적으로 드러난다면 아마 다음과 같은 내용이 아닐까? ‘그리스도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을 때 우리 스스로는 많은 일을 할 수 없다는 의미로 말씀하셨겠지. 혹은 중요한 일은 전혀 하지 못한다는 의미로 말씀하셨겠지. 하지만 아무것도 못하다니? 안 돼.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어. 우리는 혼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기가 아니야. 분명히 우리가 가진 힘을 다 사용해 원수들과 싸우길 원하실 거야. 힘이 다 빠지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때가 되면 그때 가서 주님께 도와 달라고 요청하면 되지 않겠어?’
우리의 모든 실패에도 불구하고 더 열심히 노력하고 더 끈질기게 노력하고 포기하지 않는다면 어떤 싸움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영적 영역이나 영적인 원수들에 대해서는 우리의 자연적인 능력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하늘을 날아야 할 때 지상에서 걷는 능력이 아무 도움이 안 되듯이, 영적 싸움에서는 우리의 육신적인 능력이 아무 소용이 없다. 떠다니거나 날고자 한다면 걷고자 애쓰는 게 오히려 방해가 되듯이 그런 능력을 의지하고자 한다면 실제로 방해만 될 뿐이다.--- pp. 93-96
새 집으로 이사를 가면 우리 자신뿐 아니라 우리에게 딸린 모든 것을 함께 가져간다. 무엇보다 특히 가족을 함께 데려간다. 애지중지하던 물건을 두고 가거나 사랑하는 이를 밖에 두고 가는 어리석음을 범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 중에는 자신만 하나님의 거처로 이사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는 믿음이 부족해서다.
위험한 적을 피해 안전한 요새로 도망치면서 자식들을 두고 가는 아버지가 있다면 놀란 눈으로 그 아버지를 바라볼 것이다. 그러나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이런 일을 저지른다. 자녀가 여전히 염려스럽고 불안하다면, 이는 실제로는 그들을 데리고 하나님의 거처로 피신하지 않았다는 증거다.
자신의 인생에 대해 하나님을 의지한다면 사랑하는 이들, 특히 자녀들에 대해서도 하나님을 신뢰해야 한다. 하나님은 세상 아버지가 자식을 위하는 것보다 더욱 극진히 자녀들을 위하신다. 우리 자녀들이 우리에게 소중하다면 하나님께는 더욱더 그러하다. 자녀들을 그분의 손에 의탁하는 것보다 자녀들을 위해 더 잘해 줄 수 있는 일은 없다. 우리가 저지를 수 있는 최악의 일은 그들을 우리 자신의 힘으로 보호하려고 고집하는 것이다.
아들들이 자신의 구원에 대해서는 평강으로 주를 신뢰하지만 종교적 주제에 대해 전혀 무관심한 듯해 이를 무척 염려하는 한 그리스도인 여성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사랑하는 이들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요새에 맡길 수 있다는 말씀을 들었다. 갑자기 천상의 불로 맞은 것처럼 자신은 하나님의 요새에 숨으면서 사랑하는 아들들을 밖에 두고 있는 모순된 자기 모습을 보았다. 즉시 그녀는 믿음으로, 요새로 데려가 하나님이 돌봐주시도록 그들을 위탁했다. 순간 모든 근심이 삽시간에 사라졌고 완전한 평강이 그녀의 영혼을 압도했다. 그녀는 아들들이 이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하나님은 그녀보다 더 큰 사랑으로, 그리고 더 지혜롭고 효과적으로 그들을 돌봐주실 것이다.
…(중략)… “내 백성이 화평한 집과 안전한 거처와 조용히 쉬는 곳에 있으려니와”(사 32:18).---pp. 137-139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자신을 시험하고”(고후 13:5). 이 말씀은 고린도 교인들에 대한 단순한 권면이었다. 거의 믿음을 등진 상태까지 간 그들에게 믿음을 가질지 버릴지 분명히 결정하라고 권면한 내용이다. 자신이 정말 간절한지 혹은 동기가 순수한지 점검하라고 말하지 않았다. 단지 ‘믿음 안에 있는지’ 알아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는가, 안 믿는가’의 문제로, 예, 아니오로 분명히 대답하면 된다. 당시 고린도인들에게 이것을 물었고, 지금 우리에게도 같은 질문을 하고 있다.
나머지 한 본문은 다음과 같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고전 11:27-28).
바울은 성만찬 참가자들 사이에 스며든 잘못된 욕심과 술 취함을 꾸짖는 것이다. 그러면서 스스로를 돌아보라는 권면을 통해 잘 정돈된 바른 태도로 만찬 의식에 참여해야 한다고 교훈한다. 이 두 본문 어디에도 우리가 말하는 자기 점검, 즉 자신의 감정과 경험을 통해 뭔가를 추구하라는 암시는 전혀 없다. 이토록 단순한 두 본문에서 진지하게 주를 추구하는 영혼들을 그토록 비참하게 만든 가르침이 어떻게 발전했는지 놀?기만 하다. 사실 현대적인 이 질병의 기원은 성경과는 전혀 무관하다. 이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자들은 자녀들을 대하는 하나님의 방법을 오해한 불쌍한 희생자들이다.
혹자는 깨어 있으라고 경고하는 성경의 수많은 구절들을 간과한 게 아니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이 구절들이 정말 우리 자신을 돌아보라는 의미인지, 다시 말해서 자기를 점검하라는 의미인지 궁금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구절 가운데 하나를 예로 들어 정확한 의미를 알아보고자 한다.
“그러나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라 가령 사람이 집을 떠나 타국으로 갈 때에 그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각 사무를 맡기며 문지기에게 깨어 있으라 명함과 같으니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일는지, 밤중일는지, 닭 울 때일는지, 새벽일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가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막 13:32-37).
본문을 꼼꼼히 살펴보면 자기 점검에 대해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정확히 정반대 내용을 가르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에게 “깨어 있어 살피라”고 가르치는 것은 맞다. 하지만 우리 자신을 살피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깨어 있어 살펴야 할 것은 주님의 재림이다. 우리 자신의 지난 발자국이 아니라 그분이 오시는 발자국 소리가 우리가 주시해야 하는 대상이다. 종이 깨어서 주인의 귀가를 기다리듯이 우리도 깨어 기다려야 한다. 충직한 파수꾼처럼 언제 오시더라도 그분을 영접하고 맞이할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눅 12:37). 종 스스로를 살피라는 말인가? 아니다. 주인이 오는 것을 살펴야 한다. 주인이 돌아오는지는 살피지 않고 자신의 지난 행실을 분석하며 온전히 성실하게 살았는지 확인하는 데 시간을 허비하는 종을 생각해 보라. 자기를 점검하는 일에 몰입한 나머지 주인이 귀가한 사실도 모른다고 생각해 보라. 그리스도를 기다리며 바라보지 않고 자신을 살피고 관찰하는 잘못된 습관에 빠진 영혼의 모습이 바로 이런 모습이다. 그러므로 이런 구절들은 자기 점검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정확히 정반대 사실을 가르친다. …(중략)…
실제로 봐야 보게 되고, 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게 당연한 세상 이치다. 우리 자신에게 시선이 꽂혀 있으면서 예수님을 볼 수는 없다. 승리하고 견딜 수 있는 능력은 예수를 바라보고 묵상할 때 얻는다. 우리 자신이나 환경 혹은 우리 잘못이나 연약함에 시선을 두거나 관심을 가진다면 그가 주시는 능력을 받을 수 없다. 자신을 바라보면 연약함과 패배밖에 얻을 게 없다. 자신을 바라볼 때 자신의 약함과 빈궁함, 죄악 된 모습밖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을 치유할 방법은 보이지 않고, 그러면 당연히 패배하는 것이다. 하지만 해결책은 항상 있었다. 단, 우리 안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 시선이 간 곳에서는 절대 찾지 못했을 뿐이다. 그리스도를 외면하고 우리 자신을 바라볼 것인지, 아니면 우리 자신을 외면하고 그리스도를 바라볼 것인지 하나를 택해야
--- pp. 158-1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