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고同苦의 윤리
생리학적으로도 고통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고통에 대한 감수성은 생명의 근거이자 생명유지의 절대조건입니다. 고통을 느낄 수 있는 한 인간은 살아있습니다. 반대로 고통에 무감각해짐은 곧 죽어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삶과 역사 안에 고통과 악이 내재한다는 사실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인간과 사회가 그것에 무감각해지고 있다는 비극입니다. 사람들은 고통을 회피합니다. 그저 고통 없는 삶을 추구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고통에도 무감각해지고, 나아가서는 이웃과 사회의 고통에도 무감각해지고 맙니다. 그러나 고통 없는 인간이 그러하듯이 고통 없는 사회, 무감각한 사회는 죽은 사회나 마찬가지입니다. 오늘의 기독교가 직면한 가장 큰 위기는,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고난으로 얼룩진 사회 현실에 대해 점점 무감각해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 pp.35-36
하나님은 십자가의 고통 속에서 인간을 향한 사랑이 얼마나 크신가를 보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은 바로 그 사랑 안에서 나타납니다.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자신의 능력을 감추시고 무능력한 모습으로 고통당하는 그 십자가에서, 그의 사랑과 그의 가장 위대한 능력을 발견합니다. 사랑이 가장 큰 능력인 까닭은, 그것만이 사랑하는 주체에게 자기 자신을 비우고 스스로 무능력해질 수 있는 힘을 창조하기 때문입니다. --- p.37
* 겸비의 윤리
바울은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고 강조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다름 아닌 예수의 겸비를 닮아가는 삶입니다. 이는 타인을 위한 배려로 나타납니다.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자신을 비우신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은 다름 아닌 ‘타인을 위한 존재’입니다. 이는 예수를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기도 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처럼 사는 것입니다. 비운다는 것은 내어줌입니다. 우리는 타인에게 자신을 내어줌으로써 비로소 자기 자신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비움은 다름 아닌 자기실현의 과정이며 거듭남의 과정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내어놓음으로써 비로소 우리 자신을 넘어설 수 있습니다. --- pp.46-47
* 성만찬의 윤리적 의미
성만찬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바로 생명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근원은 고난을 함께 나누는 것에서 비롯됩니다. 육체적으로나 영적으로나 고통에 대한 감수성은 생명의 본질입니다.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참여함은 예수께서 지금 이 순간에도 고난당하는 공동체 속에 현존하시며, 그들에게 자신의 살과 피를 주신다는 고백입니다. 동시에 우리도 이웃을 위해 우리 몸을 주어 주어진 고난을 함께 극복하라는 위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배공동체는 성만찬을 통해 빵과 포도주 안에 내포된 예수의 고난에 참여함으로써 자신들에게 주어진 고난의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이러한 고난의 유비관계를 통해 고통을 함께 나누는 동고sympathy의 윤리적 실천이 가능해집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가 나의 고통을 함께 나눈 것처럼, 나도 이웃의 고통을 함께 나눌 수 있게 됩니다. --- pp.75-76
* 경제 윤리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는 부유한 인간을 비판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부의 위험성에 강조점을 둔 이야기입니다. 물질을 쫓음은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는 것이라서 그 근원에는 자기사랑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을 하나님과 이웃으로부터 고립시킵니다. 이웃과 단절된 자기 사랑은 결국 인간과 인간의 관계뿐 아니라 공동체 전체를 파괴시킵니다. 사회적 약자가 늘어나고 경제적 양극화가 심화되는 이유는, 물질이 자기 사랑의 도구로 전락했기 때문입니다. 자기 욕망을 채우려는 물질주의는 물질을 주신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내가 더 많이 가지면 나의 이웃이 덜 가질 수 있다는 자각이 필요합니다. 각자가 이익을 추구하는 경제 공동체에서 나의 만족이 이웃에게 고통을 초래할 수도 있는 까닭입니다. --- pp.97-98
재물을 상징하는 맘몬이라는 단어의 어원은 ‘어떤 것을 신뢰한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재물에 대한 신뢰도 우상의 일종입니다. 이처럼 물질적인 욕구는 신앙생활의 걸림돌이 됩니다. 따라서 참된 신앙이야말로 물질을 이기는 힘이 됩니다. 물질주의는 불신앙의 대표적 모습입니다. 우리 시대가 나날이 물질주의에 빠져가고 있음은, 결국 기독교 신앙의 정체성이 사라져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물질주의는 어느새 교회 안에도 들어와서 왕 노릇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세상의 빛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세상의 경제논리가 교회를 움직이고 있음을 드러냅니다. --- p.100
예수의 복음은 가나한 사람들을 위한 복음입니다. 예수의 말씀에서 가난이란 말은 포괄적인 의미를 가집니다. 예수는 가난을, 어떤 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얰나 무언가 부족하다는 소극적인 의미로만 사용하지 않습니다. 예수가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빈심’이 아닌 ‘허심’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것을 가지지 못한 마음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것으로 충만해지고 있는 마음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하나님을 더 간절히 열망한다는 의미입니다. --- pp.101-102
* 포도원 품꾼의 비유
비유를 보면 주인이 품꾼들의 마음을 꿰뚫어 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주인이 한 시간 남짓 일한 사람에게 한 데나리온을 주자, 처음 들어온 품꾼은 자신은 12시간을 일했으므로 12데나리온을 받으리라 예상했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품삯을 자신의 몫으로 당연하게 여깁니다. 한편 마지막에 들어온 품꾼은 사실상 하루치 품삯을 받을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는 날이 저물어도 장터 주변을 떠나지 못하고 절박한 심정으로 서성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하루벌이를 포기하던 상황에서 고용되었기 때문에 한 데나리온을 자신의 노동의 대가로 여기지 않고 주인의 은혜로 여깁니다. 그의 마음은 주인에 대한 감사로 가득 차 있습니다. 비유의 핵심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주인의 눈으로 볼 때 먼저 온 사람이나 마지막에 온 사람이나 모두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처음 온 사람은 약속한 노동의 대가로 받았습니다. 나중에 온 사람은 하루 동안의 기다림과 절망, 그리고 감사하는 마음에 대한 대가로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저울은 그렇듯 항상 공평합니다. --- pp.123-124
* 소금의 비유
인간의 삶은 관계의 연속이며, 그 관계 속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습니다. 소금이 음식에 짠맛을 내듯, 그리스도인은 타인에게 영향을 주는 존재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는 표현은 그리스도인이 세상의 부패를 방지하고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맛을 내는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소금의 모습으로 세상에 나아갈 때, 세상에서는 죄의 부패가 더 이상 확산되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가 소금의 모습으로 사람들을 만날 때, 살맛을 잃었던 사람들이 삶의 맛을 찾게 됩니다. 만일 그리스도인이 그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면, 더 이상 세상에 영향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세상에 지배당하는 비천한 신세가 되고 맙니다. 세상에 소금으로 산다는 것은, ‘예수에 대한 믿음’이 ‘예수처럼 사는 실천’으로 열매 맺는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소금처럼 짠맛을 낸다는 것은 교회와 세상이 결코 동화될 수 없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원리와 세상의 원리가 서로 하나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가지고 끊임없이 세상과 부딪쳐서 악을 지적하고 제어해야 합니다. 교회가 그 일을 멈추게 되면 거꾸로 세상이 교회의 소금이 되어버립니다. --- pp.130-131
*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예수는 비유를 통해서 고통당하는 자를 위한 이웃의 모습을 심어 주셨습니다. 그것은 ‘누가 나에게 이웃인가’보다는 ‘나는 누구에게 이웃이 되는가’의 질문 속에서 발견되는 것입니다. 율법사는 이웃과 비非이웃의 경계선을 그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이웃의 범위가 원수에게까지 확장될 수 있음을 강조하셨습니다. 자신에게 도움을 주는 친구만 찾는 사람은 결코 훌륭한 친구를 만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나를 위한 이웃’이 아닌 ‘이웃을 위한 나’를 추구하는 사람에게는 모든 사람이 다 그의 이웃이 될 수 있습니다. 이웃은 나를 채워 주는 존재가 아니라 내가 채워 주어야하는 존재입니다. 이 비유가 궁극적으로 시사하는 점은 바로 율법사 자신이 강도 만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진리를 강탈당했습니다. 비유는 율법사뿐 아니라 모든 독자들에게 강도 만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합니다. --- p.138
* 열 처녀의 비유
열 처녀는 모두 등을 가지고 있었지만 다섯 명만이 기름을 충분히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비유의 핵심은 ‘깨어 있는 것’이 아니라, ‘준비하고 있는 것’에 있습니다. 준비된 사람은 자고 있으나 깨어 있으나 상관없습니다. 그들의 준비성은 평상시에는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신랑이 와서 불을 밝히게 될 때야 비로소 확연히 드러납니다. 그리스도인의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이 있고 없고는 미련한 다섯 처녀처럼 자신도 미처 못 깨달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결정적이 순간이 오면 믿음은 열매로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우리는 그 순간을 늘 깨어서 기다릴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 시간을 위해 준비할 수는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의 등’이 ‘행함의 기름’으로 환하게 타오르도록 날마다 노력하는 것입니다.
--- p.1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