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내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매니큐어를 바르는 것이다. 매니큐어를 바르는 동안만은 외롭지 않아요. 예전에 이 집에 묵어간 어떤 여자의 말이었다. 그 여자는 가방에 늘 매니큐어를 가지고 다니며, 자신이 외롭다고 느낄 때마다 매니큐어를 바른다고 했다. 아침마다 매니큐어를 바르기 시작한 건 그 무렵부터였다. 이제는 습관을 넘어 강박적이 되어 버린 매니큐어. 그런데 이렇게까지 된 데는 사실 이유가 따로 있었다. 깜빡 잊고 매니큐어를 바르지 않았던 날 발생한 고양이 27의 사고와 죽음. 아마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나는 매니큐어로 하루를 시작하지 않으면 불행이 끼어들 것만 같아 불안해졌다.
더 이상 불행해지지 않기 위해 오늘도 나는 화장 솜에 리무버를 묻혀 손톱과 발톱의 까만 매니큐어를 지운다. 87개의 매니큐어 중 오늘은 펄이 들어간 분홍색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일순간 방 안에 퍼진 매니큐어 냄새가 엄마 방에 밴 책 냄새를 삼켜 버린다. 엄마 방에서 나는 책 냄새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냄새다. 시간이 흐를수록 저 책들이 뿜어내는 냄새는 점점 진해지고 있었다. 먼지 냄새와는 다른 냄새, 그것은 눅눅한 듯 눅눅하지 않은 이상야릇한 냄새였다. 좋은 냄새가 아님에도 그 냄새가 싫지 않다는 게 나는 더 이상했다. 그게 바로 책에서 나는 냄새라는 걸 알았을 땐 뭔지 모를 편안함마저 느껴졌다. 그렇게 책 냄새를 알게 된 날, 나는 엄마 방을 내 방으로 정해 버렸다. 그러고는 예전에도 몇 번 들락거린 방인데 그때는 왜 이런 냄새를 인지하지 못했던 것인지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 그때 내가 내린 해답은 후각도 성장을 한다는 것이었다. 예전에 몰랐던 냄새에 매료되는 건, 사람이 자라면서 오감도 같이 자라기 때문이다. 입맛이 변하는 것도, 좋아하는 색이 달라지는 것도 모두 그 때문이다. 그게 바로, 인간이 세상에 진력내지 않고 계속 살아가게 되는 이유였다. --- pp.76-77
나는 그제야 알았다. 엄마, 아빠가 왜 편지에다 그 집으로 가라고 했는지를. 엄마, 아빠는 거긴 내 집이니까 아무도 건드리지 못할 거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짐을 꾸렸다. 그리고 고양이 다섯 마리와 함께 열한 개의 방이 있는 그 집으로 향했다.
봄바람이 불던 날 밤이었다. 혼자 대문을 열었고, 혼자 빨간 벽돌 길을 걸어 들어갔다. 집은 아주 고요했다. 나는 그날의 고요를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세상에 혼자 남겨졌다는 공포와 함께 나를 에워싼 고요는 잔인하게 내 살을 후벼 팠다. 그때 보인 게 밤하늘의 별이었다. 올려다본 밤하늘엔 수천 개의 별들이 초롱초롱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래, 이 집엔 별이 있었지. 망원경이 있었어! 나는 짐 가방을 내려놓고 탑으로 올라갔다. 서울 도심에서는 별을 제대로 관측할 수 없어 옮겨 놓은 망원경에, 압류에서 용케 살아남은 그 망원경에 눈을 갖다 댔다. 온 우주가 보였다. 나를 찰나의 존재로 만들어 버리는 별, 나를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만들어 버리는 별들도 보였다. 그래, 아무것도 아닌 나한테 일어난 일이니 이건 아무것도 아니야. 나를 위로하는 별들의 말이 내 입을 통해 흘러나왔다. 그러자 엄마, 아빠의 죽음 따윈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겨졌고, 고요 속의 공포도 이겨 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나는 이제 고요 같은 건 하나도 무섭지 않다. --- pp.99-100
유희도 저랬다. 여자들만의 공통된 습성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다른 여자에게서 내 여자를 떠올리게 만드는 구조가 우습긴 하지만 나쁘지는 않다. 왜냐하면 여자들만의 공통된 습성으로 인해 이별을 겪은 남자는 금세 다른 여자에게 익숙해질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시 사랑을 하게 되고, 사랑의 상처는 그렇게 치유되는 것이다. 이 지구에 사랑이 넘쳐 나는 이유다.
선택을 끝낸 그녀가 이번엔 화장품 코너로 간다. 쇼핑 공간 속 여자들은 모두 저렇게 럭비공이 된다. 화장품 코너 다음엔 또 어디로 튈지 궁금해하며 그녀의 뒤를 밟는다. 이때 그녀의 뒤꿈치가 들어온다. 다시 봐도 매끈한 뒤꿈치다. 입을 벌리고 그녀의 뒤꿈치를 한입 베어 무는 나를 상상한다. 새콤달콤한 과즙이 내 입가에 흘러넘친다. 그녀의 신음 소리가 들려온다. 자극에 몸부림치는 그녀의 몸뚱어리가 눈앞에 어른거린다. 오르가슴에 다다른 그녀의 몸이 내 페니스를 자극한다. 그런데 그녀의 뒤꿈치로 시작된 성적 상상이 정말로 내 바지 속 페니스로 전달된다. 빌어먹을! 페니스가 말을 듣지 않는다. 나는 들고 있던 빵 봉지로 사타구니를 가린다. 유희의 하얀 목덜미를 봤을 때도 이랬다. 나는 얼른 새끼손가락을 귓속에 찔러 넣는다. 면봉으로 귓속을 건드려 주면 곧추선 페니스를 진정시킬 수 있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것 같다. 있는 힘껏 귓속을 후벼 판다. 그러나 별 소?없다. 차선책으로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내쉬기를 반복하며 동요를 불러 본다. 동요 한 곡을 끝까지 부르고 나자 진정의 기미가 보인다. 어떻게 보는 것만으로도 이런 자극이 일어나는지, 여자들의 육체는 정말 경이롭고 불가사의하다. --- pp.105-106
정말로 그의 몸은 수술 자국투성이다. 가슴 한가운데로 뻗어 내려온 자국과 아랫배와 옆구리를 가로지른 자국이 선명하게 돋아나 있다. 엉망진창인 그의 몸뚱어리. 그는 어제 저것 때문에 웃통을 벗지 않았던 것이다. 겉은 멀쩡해 보여도 인간이란 모두 저마다의 아픔과 상처를, 고작 단추 몇 개로 숨긴 채 살아가고 있었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전 아버지 없이 컸어요. 어릴 때 폐암으로 일찍 돌아가셨거든요. 가장 노릇을 해 오던 형마저 사고로 잃었을 땐 정말 미치는 줄 알았어요. 세상이 날 버렸다고 생각했으니까요.”
“됐어요. 그만해요.”
“머잖아 어머니하고 여동생도 내 곁을 떠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점점 이상해져 가더라고요. 그때 사고를 당했어요. 이상한 정신 상태로 횡단보도를 건너다가요.”
“…….”
“그 사고로 신장 하날 떼어 냈죠. 이 옆구리는 그때 그 수술 자국이고요. 근데 전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어머니하고 여동생 대신 불행을 겪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때 어머니나 여동생한테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전 정말 죽고 싶었을 거예요. 그래서 누구보다 전 요다 씰 이해해요.”
“네?”
“요다 씰 이해한다고요. 가족, 슬픔, 고독…… 뭐든 다요.”
“…….”
“우리 아버진 작은 사진관을 운영하셨어요. 근데 이상하게도 저희 집엔 가족사진 한 장 없었어요.”
사진관 주인 집에 가족사진 한 장 없었다니, 왜일까.
“왜냐고 안 물어봐요?”
나는, 안 물어봐도 얘기 할 거잖아요, 라고 퉁명스레 말하려다 관둔다. 대신에 왜…… 라고 말끝을 흐리며 간신히 묻는 척을 한다. 마지못해 물어보는 것처럼 보였는지 모르겠다.
“너무 쉬운 일은 왜 잘 안 하게 되잖아요. 맘만 먹으면 얼마든지 찍을 수 있다는 생각에 그렇게 돼 버린 것 같기도 하고요. 그러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형까지 가 버린 거예요. 그래서 전 사람들을 만나면 꼭 그것부터 물어봐요. 집에 가족사진 있느냐고요. 없으면 빨리 찍으라고 종용하곤 하죠. 가족사진이 가족의 행복을 지켜 준다고, 가족을 잃어버리지 않게 잡아 준다고 생각했거든요. 부적처럼요. 요다 씨네는 가족사진 있어요?”
그러고 보니 내게도 가족사진은 없었다. 그래서 엄마, 아빠가 죽어 버린 걸까. 그래서 우리 세 식구의 행복이 지켜지지 못했던 걸까. --- pp.155-156
강해 보이기만 하던 그녀가 눈시울을 붉힌다. 행복이 사라지는 순간은 누구에게나 눈물겹다. 불행은 결코 서서히 오지 않는다. 예고도 없이 어느 날 갑자기 들이닥친다. 단 몇 시간, 아니 단 몇 초만에 찾아오기도 한다. 그래서 불행은 늘 찰나적으로 맞닥뜨려야 하는, 세상에서 가장 어이없는 짓거리다. 불행이 배신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예고도 없는 그 찰나성! 나는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길 기다린다. 왜 그런지, 그냥 그녀의 눈물이 보고 싶어졌다. 그냥에는 아무 이유가 없을 수도 있는 거니까. --- p.164
“그게 이 명함에 있는 일이군요. 처음 이 명함 봤을 때 정말 흥미로운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에요?”
“말 그대로 무엇이든 같이 해 주는 여자예요. 고독한 현대인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고민하다 생각해 낸 일이었어요.”
“혹시 외로운 요다 씨 본인을 위해 시작한 일은 아니었어요?”
“아니에요.”
그녀는 아니라고 하지만, 내 눈엔 그래 보인다.
“솔직히 말하면 무자본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찾다가 생각해 낸 일이었어요. 학벌도, 별다른 경력도 없는 저였으니까요. 결정하고 보니 나쁘지 않았어요.”
“그럼 정말로 무엇이든 다 해 주는 거예요?”
“같이 잠을 자 주고, 같이 죽어 주는 것만 빼고요. 첫 고객은 같이 영화를 봐 달라는 사람이었어요. 실연당한 지 얼마 안 된 30대 초반의 남자였죠. 그것을 시작으로 전 같이 밥을 먹어 주고, 같이 청소를 해 주고, 같이 여행을 가 주고, 같이 산책을 해 주고, 같이 요리를 해 주고, 같이 술을 마셔 주고 그랬어요. 부르기만 하면 어디든 달려갔어요. 정말로 같이 잠을 자 주고, 같이 죽어 주는 일만 빼고는 다 해 본 것 같아요.”
“에이, 설마요. 같이 사기를 쳐 주거나 사람을 죽여 주진 않았을 거 아니에요.”
“해 줬다면요?”
그냥 해 본 말이었는데, 정말로 사기를 치고 사람을 죽였단 말인가.
“다신 생각하고 싶지 않은 끔찍한 경험이었어요. 너무 끔찍해서 그때는 같이 사람을 죽여 주는 것보다 같이 죽어 주는 게 훨씬 낫겠다 싶었으니까요.”
“지금 농담하는 거죠?”
“농담 같아요?”
그녀는 왜 저렇게 솔직해지는 걸까. 너무 솔직해서 오히려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생각까지 든다.
--- pp.178-1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