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여자 친구는 나귀가 멍청하다 여기고 있다, / 나귀야말로 시인이니까.
나귀는 항상 생각에 잠겨 있다. / 나귀의 눈은 비로드 같다.
마음씨 고운 아가씨여, / 너에게도 나귀만 한 고움과 따스함은 없다.
나귀야말로 하느님 앞에 있는 / 푸른 하늘나라의 온순한 나귀니까.
나귀는 가련하게 인종하면서 / 외양간에 남아 있다,
작은 발이 가엾게도 / 너무 지쳐 있기에.
---「그렇게 유순한 나귀가 나는 좋아」중에서
식당에는 빛바랜 장롱이 하나 있다. / 대고모들의 목소리도 들었고, / 할아버지 목소리도, / 아버지의 목소리도 들어 온 장롱. / 이 같은 추억을 장롱은 충직스레 간직하고 있다. / 그 농이 아무 말도 할 줄을 모른다고 여기는 건 잘못이다, / 나는 그 장롱과 이야기를 하니까.
식당에는 또 낡은 찬장도 하나 놓여 있다. / 밀랍과 쨈, / 고기, 빵, 익은 배 냄새가 밴. / 충직한 청지기인 그 찬장은 / 우리에게서 아무것도 훔쳐 가지 말아야 하는 것도 알고 있다.
(…)
내 집에는 남녀 손님이 자주 드나들었지만, / 아무도 이 자잘한 것들에 영혼이 있음을 믿지 않았다. / 방문객이 있어 내 집에 들어서며 / “안녕하시오, 잠 씨?” 하고 말할 때는, / 이 집에 나 혼자만 살고 있다 여기는 듯하여 미소를 머금는다.
---「식당」중에서
주여, 이제 너무나 고뇌하였사오니, 내 영혼에서 / 스스로를 천재적인 창조자라 여기던 교만을 거두어 주소서. / 나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는 오직 / 불그레한 포플러 나무에서 흔들리는 둥우리나 / 상처가 깊은 발을 이끌고 흰 신작로 길을 무겁게 걸어가는 / 가엾은 사람을 바라보는 일만을 기대할 뿐입니다. / 주여, 스스로에게 독을 뿌리는 교만을 내게서 거두어 주소서. / 오, 나로 하여금 가을의 슬픈 일들로부터 / 울타리를 치장하는 초록 봄의 축제에 이르기까지 / 겸손하게 걸어가는 순박한 양 떼를 닮게 하여 주시고, / 글을 쓰며 일어나는 나의 교만이 사라지게 하시고, / 내 영혼도 세상 사람들 목소리의 메아리에 불과하다는 것과 / 다정하신 아버지가 참을성 있게 내게 꾸준히 / 문법 규칙을 가르쳐 주셨음을 결국은 생각하게 하여 주소서.(…)
---「자신의 무지를 고백하기 위한 기도」중에서
탕아여, 친구여, 이제는 아무것도 후회하지 마라. / 고향의 따스함이 넘쳐흐른다. 고향의 따스함이 아닌 / 모든 것은 쓰디쓰다. 난봉꾼이여, 사막에 살아라. / 내 돌아오는 길엔 불쌍한 개만이 뒤를 따랐다.
오, 아버지! 팔 벌려 아버지와 서로 껴안았을 때, / 어제만 해도 그리 모질었던 내 마음은 그때 / 아버지 마음속에 겨울눈처럼 녹아 흘러들었고, / 녹아서 아버지의 낡은 외투로 철철 넘쳐흘렀다.
(…)
부모를 괴롭히던 자식 때문에 얻은 슬픔을 / 지는 해가 황금으로 물들이고 있음을 / 자식 돌아옴에 몸 일으켜 바라보는 부모의 괴로움 알아 다오.
---「탕아여, 친구여, 이제는 아무것도」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