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한 사람, 재일동포 리정애
영화〈우리학교〉가 막 개봉했을 당시니까 아마도 2007년 봄이었을 것이다. 종로에 있는 어느 극장에서 상영을 마치고, 관객과의 대화도 끝내고 극장 앞 넓은 마당에서 여러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예전에 취재 때문에 만난 〈민족21〉 기자 분이 알은 체를 했고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그 기자 분이 소개할 사람이 있다고 했다. 옆에 있는 키 크고 얼굴이 아주 작은 어느 여성이었다. 그러나 이 여성은 누구를 만나 자기 소개를 차분히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얼굴은 이미 눈물 범벅이 되어 있었고,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할 정도였다. 드문드문 가쁜 호흡 사이로 ‘저는 재일동포 리정애 입니다.’라고 자기 소개를 했다. 이것이 내가 기억하는 리정애의 첫 모습이었다. 그전에도 많은 재일동포들이 이 영화를 보고 눈물 가득한 얼굴로 손을 잡아 준 적이 있어서 그리 낯선 모습은 아니었지만, 정말이지 그때 본 리정애의 얼굴은 특별했다. 그 눈물을 그치게 하느라 기자도 나도 애를 태웠던 기억이 난다.
일본에는 60만이라는 재일동포가 살고 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약 20만이 학교에 다녀야 하는 청소년이다. 이 중에 약 10퍼센트도 되지 않는 아이들만 민족학교에 다닌다. 그러니까 재일동포 학생들 대부분은 전부 일본학교에서 학창시절을 보낸다고 할 수 있다. 재일조선인들이 세운 민족학교인 조선학교(우리학교)를 영화의 소재로 했기에 지금도 일본에 가면 우리학교 관계자 분들과 자주 만나게 된다. 그분들은 리정애와 같이 재일조선인이라는 자부심이 굉장히 강한 분들이었다. 그러나 사실 이분들은 전체 재일동포 가운데서도 소수이다. 그리고 이른바 ‘조선적’동포들은 극소수이다. 일본 학교에 다니는 재일동포 학생들 가운데서 ‘조선적’을 지키고 있는 이는 정말 모래에서 바늘 찾기처럼 힘들다. 그런데 고등학교까지 일본 학교를 다니고 대학교를 조선대학교로 가다니. 민족학교를 다니든 일본 학교를 다니든 일본 대학에 그대로 진학하는 것이 보편적인 선택이 된 지금 재일동포 사회에서는 이것 또한 정말 드문 일이다. 이런 사람이 남쪽에서 진보 성향을 띠는 사람들과 특별한 인연을 맺고, 끝내 남쪽 통일운동가와 결혼을 하게 됐다. 자! 그러니 재일동포 리정애는 얼마나 특별한 사람인가?
그러나 이 특별한 여성이 더욱 특별히 느껴지는 이유는 그이가 가진 특별한 ‘용기’ 때문이다. 일본이든, 한국이든, 어디를 가서든 자신이 ‘조선적’이라고 당당히 이야기할 수 있는 용기를 재일동포들 사이에서 발견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재일동포들에게는, 특히 민족학교를 다니지 못하고 일본사회 안에서 청소년 시기를 보낸 수많은 재일동포들에게는 스스로 자기 존재를 드러내는 데 강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어쩌면 그것은 세대를 거치면서 무의식적으로 획득한 피해의식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사실 그이를 알게 된 뒤로 꽤 걱정했던 것도 사실이다. 일본에서는 말할 나위도 없지만, 특히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가진 민족주의가 얼마나 강한지, 게다가 우리들 의식에 뿌리 깊이 박혀 있는 반북 정서가 얼마나 심한지 잘 알기에 더더욱 그이가 걱정스러웠다. 재일동포를 만나다 보면 드물게 일본학교만 다니다 뒤늦게 자기 정체성을 깨닫고 동포사회를 위해 일하는 길을 선택한 분들을 만나게 된다. 이런 분들일수록 일반적인 재일동포, 심지어는 우리학교를 졸업한 재일동포들보다도 한층 강한 자기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만큼 잃어버린 자신의 세월을 안타까워하고 그 시간을 채우려는 마음이 강한 게 아닌가 싶다. 그리고 이런 분들일수록 마음이 여리고 감성이 강한 분들이 많다. 내가 아는 리정애는 가장 감성이 뛰어난 여성이다. 그래서 이런 사람이 남쪽에서 부딪치고 깨지면서 받을 수많은 상처가 남다를 거란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자칫하면 그이가 일본에서 흔치 않은 경험으로 쌓아 온 정체성이 한국사회에서 크게 흔들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난 뒤 리정애가 남쪽 청년과 결혼을 한다고 한다. 뒤따라 들리는 소식들은 내가 그이를 두고 한 걱정이 괜한 것임을 확인해줬다. 끝까지 ‘조선적’이라는 자기 정체성을 포기하지 않고 결혼하겠다고 한다. 비록 상징에 지나지 않은 무국적 ‘조선적’이지만, 이것을 포기하고 결혼한다고 해서 그 누구도 나무라지 않겠지만, 이 결혼이 이루어진다면 내가 아는 몇몇 커플과 함께 리정애, 김익 부부는 우리가 처한 분단 현실을 상징처럼 보여주는 존재가 될 것이다. 아니 무엇보다도 감성이 ‘지나치게’ 뛰어난 리정애가 이제는 혼자 분개하고 혼자 눈물 흘릴 일이 없어졌다는 것이 너무나 다행스럽다. 그리고 이 땅에 이런 이들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이미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통일의 이유가 될 것이다. 이 여린 여성은 평생을 거쳐 그런 특별하면서도 무거운 짐을 어깨에 짊어지고 사는 길을 택한 것이다.
이 눈물 많은 여성이 일본과 한국을, 그리고 북을 왔다 갔다 하면서 걸어 온 아주 특별한 길을 그동안 〈민족21〉을 통해서만 엿볼 수 있었는데, 이제는 단행본으로 묶인다. 독자들은 이 책에서 너무나 여린 한 재일조선 여성의 눈을 통해 우리 사회의 적나라한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참 부끄럽기도 하고, 아프기도 하고, 또 한없이 슬픈 자화상이다. 그리고 리정애와 그이가 속한 재일조선인 사회가 우리에게 얼마나 강한 각성제 역할을 하고 있는지 잘 알게 될 것이다.
김명준(영화 ‘우리학교’ 감독)
리정애 씨와 마찬가지로 저도 한국에서 따뜻한 사람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 민족을 느꼈고 내 고향을 느꼈습니다. 한국에서 만난 모든 분들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리고 싶고, 한 명이라도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보고 일본에서 나고 자란 재일동포들을 이해해 주었으면 합니다. 마지막으로 이 책이 북남해외 우리 민족을 하나로 이어주고, 통일의 그날로 건네주는 ‘다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안영학(재일조선인,남아공 월드컵 북쪽 대표선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