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부문 심사평(백무산, 김해화) - 리얼리즘적 경향은 작가들에게 시대의 평균적 사회의식을 요구하는 것으로 오해를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민중문학, 노동문학 작품들은 사회학에 주눅이 들거나 그에 충실하려고 하는 경향도 보입니다. 문학의 사회적 역할은 오히려 사회 의식적 관계에서 패착된 현실적 난관을 감각적으로 뛰어넘는 힘을 가질 때 비로소 사회적 역할을 한다 할 것입니다. 그래서 작가에게 시대적 감각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입니다. 신인에게 우선적으로 신선한 감각을 요구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예선을 거친 아홉 분의 시를 읽고 우선 세 분의 시를 추려보기로 했으나, (가)(18-2-다-075, 표제시 ‘째깍째깍.....’), (나)(18-1-다-181, 표제시 ‘금 캐는 시간’), 두 분의 시에서 일치를 봤습니다. (가)의 시는 상상의 자유로움과 표현의 기교면에서뿐 아니라 대상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그 이면을 꿰뚫어보는 날카로우면서 독특한 시각도 돋보였습니다. 좋은 시인이 될 자질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나)는 오랜 시간 습작으로 단련했음직한 저력을 보여주었습니다. 민중적 삶을 미화하거나 과장하거나 엄살을 떨지도 않고, 한발 물러선 관찰자의 입장도 거부하면서, 있는 그대로 진실 되게 껴안으려는 자세와 이를 깊이 천착해가려는 노력으로 좋은 시를 쓸 수 소양과 저력을 키워온 것 같습니다.
두 분 가운데 삶의 현장에서 살아 숨 쉬는 전태일 정신을 살려내는 쪽에 무게를 실었습니다. (나)의 경우 투고작 모두 고른 수준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도 다소 가산점이 주어졌습니다.
(가)도 이미 일정한 수준에 올라 있습니다. 그를 다른 지면에서 곧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에게 축하의 박수를 보냅니다. 신인다운 패기로 기성 시에 주눅 들지 말고 맘껏 펼쳐 보이시기 바랍니다. 신인은 초보시인이 아니라 전위시인이기 때문입니다.
소설 부문 심사평(김하경, 안재성) - 주인공의 직업은 ‘병아리 감별사’다. 병아리는 인간에게 생명체가 아닌 일개 소모품이다. 인간을 위해 알을 낳아주고 그 기능이 끝나면 사라지는 소모품인 것이다. 주인공의 직업은 이렇듯 철저하게 인간의 이해관계에 맞춰 병아리의 성별을 구별한다. 이익에 맞는 암컷 병아리만 선택하고, 이익에 맞지 않은 수컷 병아리는 가차 없이 죽여 버린다.
그런 그가 버스터미널에서 기거하는 홈리스 몽골 여인을 주목하는 이유는 뭘까. 자신의 손에 의해 죽어버린 수많은 병아리에 대한 죄책감? 보상심리?
이 작품의 특징이라면, 주인공이 현실에 대해 흥분하거나, 분노하거나, 탄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도덕적인 설교를 늘어놓거나 장황한 생명철학을 과시하지도 않는다.
전주의 집에서 광주의 직장으로 매일같이 고속버스로 출퇴근하면서도 애초의 의도대로 광주 직장 근처의 숙소로 이사 가지 않은 이유는 몽골 여인 때문이다. 이 한가지로 그의 직업적인 죄책감이 보상받는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일 뿐이다. 이 한계가 바로 현실이다. 이 리얼리티야말로 감동이다. 어찌할 수 없는 현실에 갇힌 인간의 나약함, 나약함 안에서도 최소한의 무언가를 잃지 않으려 안간힘쓰는 인간의 삶, 그러한 현실, 이것이 우리를 한없이 슬프게 한다. 소설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백 마디 천 마디 외침보다 더 가슴이 먹먹하다.
몽골 여인은 보따리 하나를 아기집처럼 품고 산다. 어떤 위기의 순간에도 놓지 않는다. 소설이 진행되면서 그 보따리 안에 든 물건의 정체가 점점 궁금해진다. 그리고 마지막, 주인공은 몽골 여인과 하루 밤을 보낸 뒤 몰래 그녀의 보따리를 열어본다. 보따리 안에는 희귀한 보물도 거액의 돈도 없었다. 어쩌면 주인공은 그 보따리가 절망적인 현실에서 그를 구해줄 어떤 의미나 상징이 들어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보따리 안에는 몇 번이나 빨아서 색이 바래고 낡아빠진 그녀의 속옷 몇 가지가 들어있을 뿐이었다. 평소에 쓸모없다고 여길만한 그런 하찮은 물건들이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현실이었다. 낡고, 지루하고, 무가치하고, 평범하기 그지없으며, 대수롭지 않은, 그런 하찮은 우리의 현실 말이다.
소설은 설명이나 주장을 하지 않는다. 현실을 그대로 보여줄 뿐이다. 그걸 통해 독자 스스로 가슴으로 느끼게 할 뿐이다. 독자가 책장을 덮는 그 순간 현실에 대한 슬픔과 분노, 욕망, 감동이 그의 가슴을 가득 채울 것이다. 그 다음 독자의 삶이 어떻게 변할지 아니면 아무 변화 없이 전처럼 그대로 살아갈지는 모를 일이다. 현실에서 떨쳐 일어나 주먹을 불끈 쥐든, 그대로 잊어버리고 돌아서든 그건 순전히 독자의 몫인 것이다.
생활글 부문(서정홍) - 예심을 거쳐 올라온 작품이 10편입니다. 원고를 받아들고 마치 봄므 맞이하듯
마음이 설褸습니다. 이런 설레는 마음이 없으면 험한 세상을 어찌 살 수 있겠습니까?
〈시장 할머니〉, 〈아주 잘 지냄〉, 〈운무〉, 〈나는 인간쓰레기가 아닙니다〉, 〈검은 얼굴〉, 〈담벼락 인생〉, 〈구두 수선〉, 〈설상적화〉와 같은 글은 누구나 읽어도 가슴이 찡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사랑을 배운다〉 외 여러 편을 한꺼번에 응모한 분의 글은 군더더기가 없어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한편 한편 읽고 느낀 마음을 나누었으면 좋겠습니다만 여기서는 당선작인 〈담벼락 인생〉에 대해서만 소감을 적겠습니다. 감원바람이 불어 “가벼운 형벌을 받아” 서울에서 부산으로 일터를 옮긴 글쓴이가 출퇴근하면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목소리 높이지 않고 잔잔하게 썼습니다. 그것도 남의 집 담벼락 아래에서 장사하는 가난한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말입니다. “김 과장! 내일 출근할 때에, 회사 들리지 말고 L커피솝에서 만납시다!” 라는 문자 메시지를 받고 “내일은 틀림없이 한바탕 비나 눈이 오려나 보다.” 라고 생각하는 글쓴이는 지금쯤 어찌 되었을지 궁금합니다. 이제는 “가벼운 형벌”이 아니라 “무거운 형벌”을 받고 도시의 밤거리를 떠돌고 있지 않은지……. 앞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지은 죄라곤 부지런히 일한 죄밖에 도 없는 사람들이, ‘무거운 형벌’을 받고 거리를 떠돌지 모르는 세상입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러나 글을 읽으면서 아쉬운 점도 많았습니다. 한글 맞춤법과 문장 부호에 조금 더 정성을 기울여야 하고, 응모할 때는 누구나 읽기 쉽게 편집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여기저기 고치고 다듬었으면 좋겠다 싶은 곳도 있었습니다만 자신의 삶과 가난한 이웃들의 삶을 진솔하게 써서 읽는 이들의 마음을 봄비처럼 적셔주리라 여겨 당선작으로 뽑았습니다.
기록문 부문(박영희) - 기록문, 아직은 낯설다. 예심을 거쳐 손에 들어온 7편의 공모작도 예외는 아니었다. 기록이라고 하기에는 산만하고 로뽀로 보기에도 역시 엉거주춤한 자세다.
한번은 술잔을 들이켜는 속도로 그리고 다음은 담배를 피우는 속도로 읽었다. 그렇게 해서 남은 작품은 단편 〈누가 홀로 시들어 간 들꽃을 기억할까〉, 〈고운 정 미운 정〉, 〈겨울이 오면 봄은 멀지 않으리〉, 중?장편〈……들이 운다〉 등 4편이었다.
〈누가 홀로 시들어 간 들꽃을 기억할까〉, 〈고운 정 미운 정〉은 아쉬움이 컸다. 두 편 모두 간격을 좁히지 못한 가운데 손만 내밀고 있는, 고모로 대치된 한애자 씨도 담임을 감동시킨 영수도 작자와의 거리가 너무 멀게 느껴졌다. 문학의 모든 장르가 다 그렇겠지만 특히 기록문에서 ‘천착’은 다시금 되새겨볼 일이다.
노숙인과 술은 가깝고도 먼 한·일관계? 그리하여 노숙자는 술 때문에 존재하고 또 술 때문에 죽어간다? 원고지 80여 매를 통해 한 작자의 삶을 얼마만큼 냉철하게 그려내고 파악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선뜻 자신할 수 없으나 -설령 〈겨울이 오면 봄은 멀지 않으리〉가 주는 내용들이 상당히 유창한 글쓰기의 소유자라 할지라도- 단편 당선자로 내세우는 데 있어 큰 망설임은 없었다. 왕년에 내가 잘 나갔다 하더라도 지금 사회는 한번 무너지면 재기가 어려운, 누구라도 기초생활수급자로 노숙자로 전락할 수 있음을 꾸준히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후암동 쪽방에 찾아든 봄 햇살이 좀 더 오래 머물렀으면 하는 바람이다.
중·장편 〈……들이 운다〉는 서너 차례 고심이 뒤따랐다. 확인 작업도 필요했다. 예심에서 넘어온 중·장편이 딱한 편이기도 했거니와 와중에 연작형태를 띠고 있어서 결정이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욕심을 낼 수밖에 없었던 건 인간의 소중함과 그 눈물들의 기록이 고스란히 묻어났다는 점이다. 광채에 이르기까지는 담금질에서 빼빠, 빠우를 거쳐야 하듯 〈……들이 운다〉 역시 그 과정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승리보다는 더 많은 패배 속에서 도 촛불은 타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