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발행일 | 2017년 07월 12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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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형 | 양장? |
쪽수, 무게, 크기 | 1168쪽 | 1360g | 128*188*60mm |
ISBN13 | 9788954646116 |
ISBN10 | 8954646115 |
발행일 | 2017년 07월 12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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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형 | 양장? |
쪽수, 무게, 크기 | 1168쪽 | 1360g | 128*188*60mm |
ISBN13 | 9788954646116 |
ISBN10 | 8954646115 |
하나의 그림을 떠올려본다. 모차르트의 오페라 「돈 조반니」를 일본의 아스카 시대로 옮겨온 듯한 「기사단장 죽이기」라는 일본화다. 한 젊은 청년이 노인의 가슴 한복판에 검을 깊숙이 찔러 넣었다. 사방으로 붉은 피가 묻어 있고, 지켜보는 한 젊은 여자가 있다. 하인이나 시종인 듯한 젊은 남자가 있는 그림 한쪽에 네모난 뚜껑을 열고 내다보는 수염투성이 긴 얼굴의 남자가 있다. 긴얼굴은 기묘한 목격자로 보였으며 마치 본문에 숨은 각주처럼 왼쪽 아래에서 지상의 사람들을 관찰하고 있는 듯 하다. 돈 조반니가 아름다운 돈나 안나를 억지로 차지하려다 들키자 그녀의 아버지 기사단장을 결투 끝에 찔러 죽이는 그림이다. 이 그림은 이 소설의 전편을 설명하는 매개체로써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나'는 아내와의 이혼후 홀로 여행을 하다 대학 동기의 아버지이자 일본화로 유명한 화가 아마다 도모히코가 살던 산속의 집으로 들어오게 된다. 화가로서 특별히 이름을 날리지는 않았으나 초상화 분야에서는 나름 이름을 알린 그였다. 생계를 위해 그렸던 초상화를 당분간 그리지 않고 자신만의 그림을 그리겠다는 포부도 있었을 것이다. 어느 날 손님방 천장 속에 감춰둔 아마다 도모히코의 일본화 「기사단장 죽이기」라는 그림을 발견하고 그에게 기이한 일이 발생했다. 그의 집 테라스에서 마주 보이는 흰색 저택에 사는 멘시키로부터 거액의 대금과 함께 초상화를 의뢰 받고, 그의 초상화를 그리던 중 새벽에 방울 소리를 들었다. 그 다음 날도 방울소리가 들리자 소리의 진원지를 향해 나아갔다. 잡목림 속 사당이 있는 부근에서 난 소리였다.
멘시키는 기이한 이야기를 담은 우에다 아키나리의 『하루사메 이야기』를 한다. 징소리 비슷한 소리가 들려 살펴본 곳에 산채로 매장당한 승려 '즉신불'을 발견한 이야기를. 하루키는 『하루사메 이야기』를 모티프로 「돈 조반니」의 이야기와 함께 멘시키와 주인공 '나'가 듣는 음악들 사이에게 부유하는 작품을 썼다. '나'는 여태 그려왔던 방식이 아닌 새로운 형태의 초상화를 그리게 되고, 이는 자신의 내부에 묻혀 있던 새로운 이미지를 찾아내는 작업이었다. 멘시키는 초상화의 모델을 서며 누군가에게 전혀 하지 않았던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결혼에는 생각이 없었으나 좋아했던 여자와의 마지막 하룻밤을 격렬하게 보낸 뒤 그 여자에게 태어난 아이가 자신의 딸인 것 같다는 이야기였다. 자신의 딸일지도 모르는 아이를 바라보기 위해 산 집이 바로 흰색의 저택이었고, 그곳의 테라스에서 망원경으로 마리에의 집을 바라보며 홀로 살고 있다고 했다.
자신의 초상화 작업이 끝나자 멘시키는 '나'에게 자신의 딸일지도 모르는 아키가와 마리에의 초상화를 부탁한다. 그 전에 멘시키가 기계를 들여와 인부들과 함께 방울소리가 들린 구덩이를 팠고, 구덩이 속에는 오래되었지만 깨끗한 상태의 방울이 들어 있었다. 잡목림 속 구덩이에서 누군가에 의해 방울 을 울렸던 것인가. 방울 외엔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 멘시키와 '나'는 방울을 도모히코의 작업실 선반에 올려두었다. 그리고 「기사단장 죽이기」의 그림 속의 인물인 기사단장이 60센티미터의 크기로 '나'의 앞에 나타났다. 자신은 이데아이며 시간과 공간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존재라고 했다.
지하의 석실을 열어버림으로써 우리는 무언가를 잃어버리고 무언가를 얻었을 겁니다. 과연 무엇을 잃어버리고 무엇을 얻었을까요? (1권, 297페이지)
그림 교실에서 말이 없었던 아리에는 '나'와 단둘이 있으면서 자유롭게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였다. 가슴이 작아서 고민이라며, 말벌에 쏘여 죽은 엄마에 대한 기억이라고는 '비 냄새' 밖에 없다고 했다. 고모와 함께 사는 이야기, 「기사단장 죽이기」를 바라보며, '이 그림은 뭔가 호소하고 있어요. 좁은 새장에 갇힌 새가 바깥으로 나가고 싶어하는 것처럼'(2권, 23페이지) 이라고 말했다.
소설에서 멘시키는 기묘한 인물로 나온다. 기묘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멘시키와 더불어 아주 평범하지만 새로운 자신만의 그림을 그리게 되는 '나'와 이 소설을 이끌어가는 주체다. 마리에의 친아버지일지도 모르는 인물로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자신의 친딸일지도 모르지만 굳이 밝히지는 않겠다고 말한다. 또한 「기사단장 죽이기」를 그렸던 아마다 도모히코의 과거에 대해서도 정보를 모으는 역할을 한다. 음악적 지식 또한 풍부해 '나'와 함께 클래식을 자주 듣는 인물로 묘사된다.
내가 그것들을 그림으로써 하나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기분이 들었다. 누군가가 나에게 기록자의 역할 혹은 자격을 부여한 걸까? 만약 그렇다면 그 누군가는 대체 누구일까? 그리고 어째서 다른 사람도 아닌 이 내가 기록자로 선택되었을까? (2권, 185페이지)
이 작품이 출간된 후 일본 극우파의 공격을 받았다고도 하는데, 이는 소설에서 일본이 나치와의 협력을 했던 역사적인 문제를 짚었던 것 때문이었다. 치명적인, 돌이킬 수 없이 파국으로 치달은 사건이라고 표현했는데, '난징대학살' 이었다. 소설 속 일본화의 대가인 아마다 도모히코의 동생이 관련된 사건이었다. 하루키는 이 사건을 소설 속에서 언급하며 과거 일본의 역사를 말했고 괴이담 『하루사메 이야기』를 직접 인용하여 현실과 판타지를 교묘히 직조했다.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로, 아내에게 이혼을 통보받은 후 산속의 집에서 새로운 형식의 그림을 그리게 되는 현실의 '나'와 환상과 이야기의 세계를 이끄는 마리에라는 인물의 특성은 어쩌면 판타지에 가깝다. 다른 이들은 믿지 못할 경험을 하므로써 서로에게 동질감을 느끼는 부분에서 '나'는 마리에에게서 열세 살에 죽은 여동생 도미를 떠올렸다. 일상적 삶과 환상의 이야기가 조화롭게 이루어져 있었다.
이게 이야기의 힘인가. 문학은 이처럼 역사와 괴이담을 아울러 표현할 수 있으며 환상이 현실이 될 수도 있음을 표현할 수 있다. 문학이기에 가능하지 않겠나. 진정한 문학이란 글을 읽는 사람들의 마음을 훔치는 것. 과거의 역사를 기억하고 삶의 나아갈 방향을 새롭게 인식하는 것! 그것이 비록 괴이담일지라도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열어놓을 필요가 있다.
* 전2권 리뷰입니다.
[장편소설]기사단장 죽이기 1권 / 현현하는 이데아
저자_ 무라카미 하루키
발행_ 2017년 7월 12일 초판
분량_ 565쪽
*지금 작성하는 리뷰는 <기사단장 죽이기> 1권만을 토대로 작성한 것입니다*
*그리고 스토리는 이 소설이 어떤 측면에서는 추리극에 가깝기 때문에 줄거리는 가급적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 이야기 기본 틀
서술자_ 나 (36세. 화가). 주인공. 초상화를 직관적으로 잘 그린다.
아마다 도모히코_ 92세 치매 노인. 화가. 그림 <기사단장 죽이기>를 그린 사람.
멘시키_ 거액을 제시하며 초상화를 의뢰한 사람.
기본 서사_ 아내와 이혼을 하고 다시 결합을 하기 전까지(?) 이별을 했던 9개월 간의 이야기. '나'는 아마다 도모히코가 없는 그의 집에 살게 된 경위와, 그 곳에서 사는 동안에 일어난 일을 회상하고 있다.
>> 책 속으로
1권의 내용은 102쪽에서 <기사단장 죽이기>라는 그림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지루하다는 느낌이 든다. 그런데 그림을 발견하고 그 그림이 모짜르트의 오페라 <돈 조반니>를 바탕으로 그린 그림이라는 설명이 이루어질 때까지 속도감이 붙는다. 그리고 그림에 나오는 인물들과 또 다른 한 명의 생소한 인물의 특징을 설명할 때는 마치 한 폭의 그림을 대하고 있는 듯한 생생한 긴장감마저 돈다. 문장력과 서사의 힘이다. 그리고 131쪽에서 멘시키가 등장하면서, 드디어 인물 간의 갈등도 엿보이면서 이야기가 슬슬 재밌어진다.
하루키의 소설은 문장이 어렵지 않다. 술술 익히는 재미가 있다. 그런데 마무리가 딱 떨어지는 맛은 없다. 장면과 사물과 심리에 대한 묘사가 지나치게 많다. 그리고 그것의 이유는 또 뚜렷하지 않다. 마치 그날그날 바뀌는 인상처럼, 또는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기억의 흐름처럼 말이다.
15쪽에서. 종종 사진을 찍을 때 실제 크기를 가늠할 셈으로 피사체 옆에 담뱃갑 따위를 놔두곤 하는데, 내 기억의 영상에 놓인 담뱃갑은 기분에 따라 멋대로 늘어나거나 줄어드는 것 같다. 아마도 사물이나 현상이 쉼없이 움직이고 변화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혹은 그에 대항하듯이, 내 기억 속에서는 고정불변이야 할 잣대마저 움직이고 변화하는 모양이다.
기억 속에 고정불변으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 어느 시점에서 어떤 마음으로 그 기억을 떠올리느냐에 따라 달아질 뿐.
서술자 '나'는 이제 오페라와 후라이팬도 구분하지 못할 치매에 걸린, 그래서 요양원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던 노화가 아마다 도모히코에 대한 생애를 자주, 길게 언급한다. 그의 그림 <기사단장 죽이기>에 대한 인상도 묘사가 뛰어나다. 그리고 그림 속의 인물에 대한 설명이 집요할 정도이다. '나'라는 인물이 노화가의 생애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에 있어서 자주 '하루키'의 모습이 떠오른다. 노화가의 생애와 성격과 그의 작품성을 설명하면서 작가는 자신의 얘기를 들려주고 싶었나 보다.
71쪽에서. 원래 아버지 전공은 서양화야. 그래서 빈으로 유학을 갔고. 당시에는 굉장히 모던한 유화를 그렸지. 그런데 일본으로 돌아오고 얼마 뒤에 갑자기 일본화로 전향했어. (중략) 외국에 나가보고 새삼 민족적인 정체성에 눈뜨는 거. (중략) 자식 입장에서는 그저 까다로운 아저씨였을 뿐이야. 머릿속은 온통 그림 생각뿐이고. 당신 하고 싶은 대로 다하면서 사셨어. 이제는 전부 옛이야기지만.
아내의 느닷없는 이혼하자는 말에 당황하고. 자신의 집에서 나온 '나'는 몇 개월 길 위를 달리면서 방황을 한다. 그리고는 시각적 기억력을 바탕으로 직관에 의지에 초상화를 그리던, 그쪽 업계에서 꽤 잘 나가던 일을 그만둔다. 자신이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려 보겠노라고. 살 곳이 마땅치 않았다. 그런데 미대 동창 친구의 도움으로 그의 아버지가 산속에서 오래 외롭게 지내던 그곳으로 그를 안내한다.
'나'가 노화가 아마다의 집으로 간 것부터 이야기는 환타지라 할 수 있다. 모짜르트의 오페라 <돈 조반니> 그리고 그것의 콜라보 같은, 노화가의 숨겨진 그림 <기사단장 죽이기>. 그것의 상관성을 파헤치는 듯한 추리 소설 같은, 복선이 난무하는 분위기. 그러나...
95-96쪽에서. 시간이 흐른 뒤 돌이켜보면 우리 인생은 참으로 불가사의하게 느껴진다. 믿을 수 없이 갑작스러운 우연과 예측 불가능한 굴곡진 전개가 넘쳐난다. 하지만 그것들이 실제로 진행되는 동안에는 대부분 아무리 주의깊게 둘어보아도 불가해한 요소가 전혀 눈의 뜨지 않는다. 우리 눈에는 쉼없이 흘러가는 일상 속에서 지극히 당연한 일이 지극히 당연하게 일어나는 것처럼 비치는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도무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치에 맞는지 아닌지는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비로소 드러난다.
위에서 인용한 부분이. 이 소설을 관통하는 작가의 메시지 (또는 이야기의 주제)가 아닌가 싶다.
다 읽고 나서야 이해하게 되는 이야기. 이치에 맞다고 여겼는데. 시간이 흐른 뒤에 알고 보니. "갑작스런 우연이었으며 불가사의한 일이었다."라고 밖에 말할수 없는 것들. 그런 이야기를 노화가의 굴곡진 생애와 비밀스럽게 간직된 그림을 빌어서 전개해 놓은 것처럼 보인다.
인상적인 장면들이 있다. '나'라는 인물이 초상화를 그리는 방식이다.
시각적 기억력에 의존하는 방식. 초상화를 의뢰한 사람과 몇 시간의 대화를 통해서. 남은 기억들을 바탕으로 직관에 의해서 그 사람의 인상, 특징, 보이지 않는 무엇을 끄집어내는 방식. 의뢰인을 몇 시간, 며칠 동안 한 자세로 세워 놓고 그리는 방식이 아닌. 화가 자신의 기억 속에 포착된 인상과 느낌을 그려내는 방식. 그래서 초상화 속 인물과 실제 인물은 닮지 않은 듯 한데. 초상화 속 인물이 오히려 더 실제 인물다운 느낌을 주는 것. 책을 읽는 내내 그런 초상화들을 감상하고 싶은 심정이 든다.
<기사단장 죽이기> 그림 속 다섯 번째 인물도 실제로 보고 싶은 욕망(호기심)이 들 정도이다. 과연 어떻게 그려졌길래. 그 그림에 대한 묘사가 장황하고 실감이 나는지 말이다.
어쩌면 글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현실 세계보다 이야기 속에 묘사되고 설명되는 어떤 장면이 오히려 더욱 현실 세계같다는 생각과 그래서 몰입하고 빠져 들고 마는 상황을 초래하는 것. 특히 사람의 묘한 심리, 우연적인 만남, 관계를 맺는 일, 알 수 없는 사건의 전개 등등에서 말이다
그런 장면과 시간을 작가는 너무나 잘 포착하고, 잘 묘사한다고 할 수 있다. 마치 소설 속의 초상화가로 등장하는 '나'처럼 말이다.
그리고 아무리 불가사의한 일들이 난무하고. 이해할 수 없는 사건에 휘말려도. 주인공 남자는 제자리에 돌아오려고 한다. 그래서 이야기는 항상 원상 복귀라는 흔해빠진 표현을 추구한다. 하루키 작가는 이야기와 사랑의 힘을 믿는 작가라는 말이 맞는 것 같다.
15쪽에서. 그 두 번의 결혼생활 (전기와 후기라고 해 두자) 사이에는 약 아홉 달이라는 시간이 험준한 지협에 뚫린 운하처럼 입을 크게 벌리고 있다. 아홉 달 남짓 -이 시간이 이별의 기간으로 길었는지 짧았는지는 잘 모르겠다. 돌이켜보면 영원에 가까웠던 것 같기도 하고, 의외로 순식간에 흘러간 것 같기도 하다.
시간은 상대적 개념이다. 기억의 당사자가 순식간처럼 또는 영원처럼 느꼈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기억도 마찬가지이다. 맞는지 틀렸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기억으로 떠오른 인상 자체가 중요할 뿐이다.
이 책 속의 이야기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되는 것 같다. 서술자 '나'의 기억의 흐름을 따라가면서 당황하고 놀라고 비밀을 만나면, 그저 흥미로울 뿐이다.
>> 책장을 덮으며
이야기 전개가 흥미롭다. 꿈인가? 생각하게 하는 장면들도 있다. 초반에 '나'의 아내가 '꿈'이야기를 하면서 이혼하자고 하는데. 꿈을 믿는 아내 덕분인지. 자꾸 '꿈'이라는 단어에 집착하게 된다. 그림 속의 기사단장과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아무튼. 이야기 속의 화가 '나'의 탁월한 직관이든, 작가 '하루키'의 이야기꾼으로서의 재능이든, 그들의 재능은 귀한 대접을 받을 만큼. 이 책은 장면 묘사와 그림, 사물, 인간 관계, 우연, 물리적 반사 등에 대한 설명이 지루하지 않게 펼쳐진다는 사실이다.
335쪽 내용을 인용하면서 1권의 리뷰를 마무리합니다.
그리고 2권의 이야기도 조만간 리뷰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335쪽에서. 여기서 펼쳐지는 모든 일이 멘시키라는 사람의 등장과, 예의 한밤의 방울소리와 더불어 시작된 듯 느껴졌다. 멘시키는 말했다. "말하자면 그것은 깊은 해저에서 발생한 지진 같은 거지요.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햇빛이 닿지 않는 세계에서, 다시 말해 은밀한 무의식의 영역에서 커다란 변동이 일어납니다. 그것이 지상으로 전해져 연쇄반응을 일으킨 결과 우리 눈에 보이는 형태를 띠게 됩니다. 저는 예술가가 아니지만 그런 프로세스의 원리는 대강 이해할 수 있어요. 비즈니스상의 뛰어난 아이디어도 거의 그와 비슷한 단계를 거쳐 탄생하니까요. 탁월한 아이디어란 어둠 속에서 근거 없이 나타나는 사념인 경우가 많죠.
하루키의 소설에서 언급하는 빛나는 문장들은, 어쩌면 어둠 속에서 근거없이 나타난 사념이 아닌가 싶다. 마치 <기사단장 죽이기>라는 그림이 천장 다락방 어둠 속에서 나타난 것처럼.
하루키의 소설이 나왔다고 하면 관심이 가는 건 어쩔 수 없다. 읽지 않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고, 나와 맞지 않는다 생각했던 적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키의 소설은 묘한 매력이 있었다. 현실과 환상의 묘한 조화라고나 할까? 현실에서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일이 그의 책에선 일어나고 그런 사건을 통해 성장한다. 500페이지가 넘는 2권의 책. 이제 딱 반환점을 돌고 있다. 아직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뭔지 감을 잡지 못하고 있지만 2권을 다 읽고 나면 뭔가 보이지 않을까?
삼십대 중반의 초상화가 ‘나‘. 나에게 어느 날 아내는 이혼을 통보한다. 이혼 통보와 함께 집을 나온 나는, 친구의 아버지이자 저명한 일본화가 아마다 도모히코가 살던 산 속 아틀리에서 살게 된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이곳에서 나는 천장 위에 숨겨진 도모히코의 미발표작 ’기사단장 죽이기‘란 작품을 발견한다. 모차르트 오페라 돈 조반니의 등장인물을 일본화로 표현한 이 그림을 천장에서 가지고 내려온 이후 ’내‘주변에 기이한 일이 일어난다. 골짜기 맞은편 호화로운 주택에 살고 있는 백발 신사 멘시키 와타루가 거액을 제시하며 초상화를 의뢰한다. 또한 한밤 중 이상한 소리에 홀린 듯 나가보니 집 뒤편 사당에서 방울 소리가 들린다. 멘시키의 도움으로 돌무덤을 파헤치지만 그곳엔 방울만 있을 뿐 아무것도 없다. 이후 주인공 ’나‘ 앞에 기사단장의 모습을 한 영혼이 나타나게 되는데....
아직 작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의도를 찾지 못했다. 2권을 읽다보면 작가의 생각이나 의도를 알 수 있을까? 그리고 생각한다. 우리네 인생에 대해서.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은 참 묘하다. 언제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우리를 괴롭힐지, 아님 순탄함을 선물할지 아무도 모를 일이니까. 내가 오늘 하루 무사하게 지나왔던 그 길이 1시간 뒤에 혹은 하루 뒤에 혹은 한 달 뒤에 무서운 일이나 행운의 일이 올 수도 있으니까. 흔히들 그런 이야기를 한다. 한 사람은, 하나의 우주를 포함하고 있다고. 때문에 하나의 우주가 또 하나의 우주와 인연을 맺고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일이 대단히 힘들고 어려운 일이지만 그 만큼 보람도 있는 거라고. 그래서 무엇을 원할 때 간절히 아주 간절히 빌라고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래야 온 우주가 나란 우주의 소원을 들어 줄 수 있는 거라고.
이 책의 주인공은 어느 날 이혼 통보를 받는다. 만약 조금 예민하고 민감한 사람이었다면 아내의 변화된 행동을 감지했을까? 만약 감지했다면 이혼 통보만큼은 막을 수 있었을까? 어쩜 감지했어도 막지 못했을까? 이혼 통보는 결정된 수순일 뿐.. 한 우주가 이별을 결심하게 되면 결국 헤어질 수밖에 없는 필연이 되는 것. 오늘 하루도 엄청난 우주의 기운들이 쉼 없이 흘러갔을 것이다. 나는 나의 기운을 가지고 별탈없이 순조롭게 시간이 흐르길 바랐을 것이고 평화롭게 하루를 보냈음에 감사해야 할 것이다. 사는 것. 그 사는 것에 특별한 의미를 두는 게 아니라 열심히 살다보니 어느 날 특별한 의미가 되는 순간이 오겠지?
문득 생각한다. 이 책의 주인공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 힘들고 난해하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일 수도 있지만, 이 주인공을 부르기 위해 아마다 도모히코의 저택은 우주를 움직였을지도 모른다고. 그곳에서 주인공은 어떤 선택과 판단을 하게 될지... 2권이 기다려지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