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은 이제 다음 단계로 나아가고 있다. 바이오(Bio) 의약품이다. 케미컬 의약품이 화학 물질들의 합성을 통해 치료제를 만드는 것이라면, 바이오 의약품은 살아 있는 생명체의 유전자나 단백질, 세포를 원료로 치료제를 만든다. 바이오 의약품의 탄생 배경은 분자생물학(Molecular Biology)이다. 분자생물학의 목표는 유전자 정보인 DNA 분석, 단백질 및 세포 사이의 역학 관계 해명 등이다.
케미컬 의약품은 사람의 몸 바깥에서 만들어진 화학 물질이 몸 안으로 들어왔을 때 나타나는 효과를 기대한다. 그런데 바이오 의약품은 기본적으로 살아 있는 생물체 안에서 약을 만든다. 우리 몸은 병에 걸렸을 때 스스로 치료하는 기능이 있다. DNA, RNA, 단백질, 세포 사이의 상호 관계를 연구하면 질병의 원인과 발생 메커니즘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 메커니즘을 활용해 치료제를 개발한다. 특정 단백질, 예를 들어 인슐린이나 성장호르몬 같은 것이 결핍되었을 때, 이를 재조합해서 만든 단백질을 투여하는 방식으로 치료를 하겠다는 컨셉이다. 물론 유전자나 세포 치료도 포함된다. 바이오 의약품은 케미컬 의약품보다 치료 효과가 높고, 부작용이 적다. 특히 케미컬 의약품이 다루기 힘들었던 암이나 난치병, 희귀질환과 만성질환 등에서 높은 효과를 보인다. _본문 16~17쪽
바이오시밀러의 최대 장점은 저렴한 가격이다. 질병으로 고통받는 환자에게 바이오 의약품은 희망이자 절망이다. 미국을 기준으로 류마티스 관절염 환자가 바이오 의약품 치료를 받으려면 1년 평균 2만 달러 이상의 비용이 필요하다. 바이오 의약품이 암 치료에 등장하면 비용은 십만 달러 단위로 올라간다. 치료제가 있고, 효과를 알지만 사용할 수 없다. 공공의료보험 제도가 있다면 정책적으로 접근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못한 남아메리카,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같은 저개발국가에서는 이마저도 쉽지 않다.
그런데 바이오시밀러는 오리지널 바이오 의약품의 70~80%까지 저렴한 비용으로 생산해낼 수 있다. 기술적 완성도를 높이기 위한 투자, 기초적인 임상시험 비용 등, 대규모 생산을 위한 설비 투자 등의 비용 상승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극복할 수 있는 과제들이고, 좀더 저렴한 가격의 치료제를 공급할 수 있다. _본문 66~67쪽
위험천만한 알레르기성 질환과 자가면역질환에서 과학자들은 암 치료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았다. 면역의 ‘강력한 힘’이다. 면역 팀의 잘못된 판단과 행동으로 인해 생겨나는 질병들은 치명적이다. 알레르기성 질환으로 사망할 수 있다. 류마티스 관절염은 온 몸 구석구석 관절이라는 관절에 모두 반응한다. 이것을 뒤집어서 생각하면 면역이 정확하게 집중해서 일하기만 하면, 매우 강력하게 질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얘기다.
면역은 감기를 낫게 하고, 작은 상처를 치료하는 보약 정도의 힘을 가진 약한 팀이 아니었다. 고도의 집중력과 파괴력을 가지고 작동하는 강력한 팀이다. 게다가 면역은 원래 암세포를 제거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만약 면역 팀을 이루고 있는 세포들 가운데, 암을 담당하는 부서의 인원을 보강하거나, 더 많은 훈련을 시키거나, 정확하게 암세포를 제거하라는 명령을 내릴 수 있다면, 면역 팀이 가진 엄청난 힘을 발휘해 암을 치료할 수 있을 것이다. 면역세포치료제의 비전이다. _본문 75~76쪽
그런데 암세포가 면역관문단백질이 하는 일에서 자신의 생존 아이디어를 얻는다. 면역 팀은 오늘도 온 몸을 돌면서 이상 유무를 확인하러 다니다가 암세포 쪽으로 온다. 암세포는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정상임!’이라며 면역 팀을 속인다. 면역 팀은 암세포가 건네준 페이크 신호를 정상 신호라고 받아들이고는 다음 세포를 확인하러 넘어간다. 아무리 건강한 면역 기능을 가지고 있어도, 암세포에게 속으면 속수무책이다. 이러는 사이 환자의 암세포는 무럭무럭 자란다.
면역관문억제제는 이런 암세포의 지능적 대응을 무력화하기 위한 것이다. 암세포가 흘리는 거짓 정보를 차단할 수 있다면, 환자 자신의 면역 기능만으로도 암을 치료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면역관문억제제는 독한 약이 아니다. 거짓 신호를 막는 일이니 독한 항암 치료 과정에 수반되는 환자의 건강 악화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또한 암세포의 특정 항원을 인식하는 치료제가 아니다. 어떤 암이든 면역 팀에 보내는 신호를 활성화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다양한 암에 적용시켜 치료가 가능하다. 면역관문억제제의 비전이다. _본문 104쪽
특정 부분의 유전자를 잘라내는 것만으로도 실제 질환을 치료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대표적인 것이 후천성 면역결핍증(AIDS, 이하 에이즈) 치료다. 에이즈는 HIV(Human Immunodeficiency Virus)라는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발병한다. HIV는 CCR5라는 수용체를 통해 사람의 세포로 침투한다. 이 때 크리스퍼 카스9 기술을 사용할 수 있다. CCR5 유전자의 일부를 잘라내면 HIV가 CCR5 수용체에 결합하지 못한다. 그러면 에이즈 바이러스가 세포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이 막히고, 에이즈가 치료되는 것이다. 실제 2007년 티모시 레이 브라운이라는 에이즈 환자에게 이와 같은 치료를 실시했는데 완치되었다고 보고되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잘라낸 곳에 원하는 유전자를 넣을 수도 있으며, 유전자 서열을 뒤집을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일부 혈우병을 치료할 수 있다. 혈우병은 피가 응고되지 않는 대표적인 유전질환이다. 약간의 외상이나 내상만으로도 과다출혈로 이어져 생명이 위험해질 수 있는 위험한 병이지만, 유전질환이었기에 마땅한 치료제는 없었다.
혈우병을 야기하는 원인 가운데 하나로 ‘팩터8(Factor VIII) 유전자’에 이상이 생기는 것이 있다. 팩터8 유전자는 혈액을 응고시키는 기능을 담당한다. 그런데 원래 제자리에 있어야 할 팩터8 유전자가 거꾸로 뒤집혀서 분포하는 경우 혈우병이 발병하는 것이다. 크리스퍼 카스9 기술을 이용해 뒤집힌 팩터8 유전자를 원래대로 돌려놓는 방법을 통해 혈우병을 치료하려는 연구가 한창 진행 중이다. 이런 시도는 미국의 바이오테크 상가모 바이오사이언스(Sangamo Bio-Science)가 대표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2017년 현재 상가모에서는 혈우병 환자 80명을 대상으로 임상시험 중이라고 한다. _본문 165~167쪽
2017년 초 미국의 바이오테크 그레일(Grail)은 혈액으로 암을 조기진단하는 기술 개발에 대한 펀딩을 받았다. 그레일의 ‘액체 생검(Liquid Biopsy)’ 기술 개발에는 아마존(amazon)을 비롯한 유수의 기업들이 투자했다. 투자액은 9억 달러, 우리 돈으로 약 1조 원에 이른다.
그레일의 구상은 이렇다. cfNA(Cell Free Nucleid Acid)는 사람의 혈액에 포함되어 있는 핵산 물질이다. 그런데 암 환자의 혈액 안에는 cfNA가 증가한다. 이는 면역 기능을 담당하는 대식세포가 암세포의 찌꺼기를 먹은 다음에 cfNA를 배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암세포가 자라고 있다면 혈액 안에 cfNA가 많이 있을 것이고, 이것을 검출해서 데이터화를 할 수 있다면 혈액검사로 암을 진단해낼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아직까지 한계는 뚜렷하다. 핵산 물질은 암세포에서 나오는 것 이외에도, 모든 정상 세포나 염증 반응이 일어나는 세포에서도 배출된다. 또한 암세포는 균일하지 않고 복잡하다. 한 암세포 안에서도 다양성이 확인된다. 오진할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그레일은 2022년까지 3,000명의 일반인과 7,000명의 다양한 고형암 환자를 모아서 대규모 임상시험을 진행할 예정이다. 데이터가 쌓이면 결국 암을 조기에 진단해낼 수 있다는 비전에, 무려 1조 원의 자금이 몰렸다. 암을 조기진단해야 한다는 필요성과,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은 함께 높아지고 있다. _본문 191~192쪽
직계 가족들의 뚜렷한 가족력, 유전체 검사 결과 나온 명확한 돌연변이, 그리고 해당 유전체 돌연변이 기능 이상이 유발하는 암질환의 종류와 암에 걸릴 확률을 놓고 안젤리나 졸리는 판단을 내렸다. 반드시 암에 걸릴 것이니 사전에 예방을 하자는 판단이었다. 2년 후 안젤리나 졸리는 나팔관과 난소를 잘라내는 수술까지 결심했다. 세계적인 셀럽의 자기 주도적인 결정에 환영을 보내는 목소리가 많았다. 그러나 의료 현장으로 돌아와보자. 유전체 지도에서 브라카 유전자가 돌연변이를 보인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은 유방과 난소를 잘라내야 할까 말아야 할까?
0과 1로 완벽하게 나누어지는 분석은 없다. 유전체 분석도 마찬가지다. 브라카 유전자에 돌연변이가 생긴 사람의 80%는 암에 걸린다고 나왔다. 문제는 20%다. 20%의 사람은 브라카 유전자에 돌연변이가 있지만 암에 걸리지 않은 것으로 나온다. 어쨌건 유전체 분석을 통한 개인 맞춤 정밀의학이 되려면 이야기를 해줘야 한다. 잘라낼 것인지 잘라내지 않을 것인지.
브라카 유전자는 매우 특수한 사례다. 인간의 유전체 지도를 그리는 비용이 줄어들었지만, 현재로써는 거기까지다. 전체 유전체 가운데 어떤 부분이 어떤 작용을 하고, 질병과 관계된 것은 또 어느 부분인지 아직은 정확하게 모른다. 더구나 도출되는 데이터의 값은 언제나 확률이다. 0%면 암에 걸리지 않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할 것이고 100%면 암에 걸릴 것이니 예방이든 치료든 들어가자고 할 수 있다. 그런데 51%나 나올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할까? 공포에 의존한 과잉 진료가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고, 환자의 고통과 사회적 비용이 과도하게 상승할 여지도 무시하지 못한다. _본문 228~2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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